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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과학문화의 씨를 뿌려라

등록 2006-02-16 00:00 수정 2020-05-03 04:24

<사이언스 올제>를 5년 동안 펴내며 과학과 사회의 소통을 시도하는 박성근 교수…힉스의 검증에 사용되는 검출기 개발을 계기로 기업의 과학잡지 발행 지원 이끌어내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2004)인 데이비드 그로스 박사가 부러워하는 국내 학자가 있다. 바로 고려대 한국검출기연구소장인 박성근 교수(입자물리학 실험)다. 박 교수는 우주의 생성이나 입자의 근원이라는 ‘힉스’의 존재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대형 강입자 충돌가속기’(LHC)로 규명할 2007년이 다가오면서 들뜬 나날을 보내고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과학자 피터 힉스가 1964년에 물질이 질량을 갖도록 하는 기본 입자로 지목한 힉스를 검증할 ‘전방 저항판검출기’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검출기연구소는 CERN의 주도로 스위스 국경지대에 원둘레 27km 규모로 건설하는 LHC에 장착할 500개의 검출기 가운데 350개를 이미 납품했다.

어른들이 먼저 과학적 마인드 가져야

처음 검출기 개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선진국 기술을 따라잡기 버거웠다. CERN에 참여하는 국내 과학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8년 전 박 교수의 실험실을 찾았을 당시만 해도 검출기 시제품은 기계들 사이에서 사다리꼴 모양의 허름한 금속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10의 25 제곱분의 1초 동안 존재했다가 뮤온 입자로 붕괴되는 힉스의 흔적을 찾는 도구로 거듭난 셈이다. 앞으로 박 교수팀이 개발한 검출기는 고에너지 실험장비로 뮤온이라는 입자가 지나갈 때 생성되는 미세한 전하량을 검출해 힉스의 존재를 확인한다. 만일 박 교수팀이 만든 검출기로 힉스의 존재를 규명하면 세계적 석학 스티븐 호킹 박사가 난처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 호킹 박사가 “힉스가 없다는 데 100달러를 걸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세계가 주목하는 연구자인 박 교수를 물리학자라는 말에 가두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는 검출기 너머에서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무려 5년이나 걸어왔다. 2001년 5월부터 미국의 월간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한글판 <사이언스 올제>의 발행인을 겸하면서 실험실을 오가야 했다. 15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저명한 잡지를 내게 된 것도 검출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개발한 검출기는 거대한 실험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공항이나 항만 등지에서 보안 검색하는 장치로도 널리 쓰인다. 검출기를 개발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벤처 창업을 권유하는 기업인에게 과학잡지 발행 지원을 요청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래의 과학’을 뜻하는 <사이언스 올제>를 창간했다. 올제는 ‘오다’ 혹은 ‘미래’를 뜻하는 ‘올’과 ‘때’라는 뜻을 내포한 ‘제’를 합성한 말로 <계림유사>에 나오는 이두문자로 만들었다. 미래의 과학을 생각한다면 전문성을 내세운 잡지보다는 청소년을 위한 과학잡지를 창간하는 게 맞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성인이 과학을 알아야 자녀에게 과학을 접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과학대국이라는 구호에 다가서는 길은 다양하다. 어린이들이 과학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는 책도 필요하지만, 어른들이 과학적 마인드를 가져야 장기적으로 과학문화 확산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사실 박 교수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대학 신입생이었던 그는 교내 벤치에 앉아 있다가 외판원의 ‘작업’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국내에 과학 관련 매체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과학 일러스트레이션에 푹 빠져 “그림 하나만 제대로 이해해도 구독료를 뽑겠다”는 생각에 덜컥 1년 동안 정기 구독을 하기로 했다. 문제는 영어 실력이 짧은 탓에 그림을 이해하는 것도 버거운 일이었다. 구독료는 꼬박꼬박 내면서도 1년 동안 잡지를 방 한쪽에 쌓아둬야만 했다. 그러다가 미국 유학 시절에 영어 실력 때문에 가까이할 수 없었던 문제의 잡지 속에 비로소 다가설 수 있었다.

‘과학 콘서트’의 원조?

“국내에 돌아와 연구에 매진하느라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기업가가 ‘투자’를 하겠다고 하니까 순간적으로 ‘한국판 발행’이 떠올랐다. 벤처기업을 해서 돈을 버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벤처기업 투자를 바랐던 기업인도 밑 빠진 독에 퍼붓기식이 될지도 모르는 한국판 발행에 뜻을 같이했다. 박 교수는 미국에 연락을 취해 라이선스 계약을 준비하면서 (주)과학과문화사를 설립했다. <사이언스 올제>의 발행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전세계에서 10번째로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번역판을 준비하는 데는 채 석 달이 걸리지 않았다.

박 교수는 지난 2002년 5월 한국판 발행 1주년을 기념해 이색적인 시도를 했다.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는 과학잡지를 내면서 독자들에게 뜻깊은 선물을 하려는 의도였다. 당연히 과학에 관련된 기념 선물을 준비할 법하다. 하지만 <사이언스 올제>가 선정한 선물은 놀랍게도 ‘클라리넷 연주가 김영갑씨의 독집 음반’이었다. 일찌감치 발행사 이름을 ‘과학과문화’로 정한 까닭을 생각하면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상상을 뛰어넘은 것만큼은 사실이다. 거기엔 박 교수의 신념이 담겨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훌륭한 과학자가 나오려면 과학이 다른 분야와 소통하는 사회적 토양을 이뤄야 한다. 과학의 사회적 소통에 예술이 기여할 수 있다.”

이같은 박 교수의 생각은 <사이언스 올제>를 통해 변함없이 유지됐다. 창간을 기념해 과학 강연회를 마련하면서 실내악이 있는 ‘사이언스 올제 콘서트’를 꾸몄다. 심장마비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인 죽상동맥경화증에 관한 전문가의 진단 예방법을 들으려고 강연장을 찾은 청중들에게 소프라노의 성악과 클라리넷 연주는 감동 이전에 충격이었을 것이다. 요즘 흔히 쓰이는 ‘과학 콘서트’라는 말의 저작권이 따지고 보면 박 교수에게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과학적 상상력과 예술적 상상력이 통하는 단적인 사례로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로플린 한국과학기술원(KAIST) 총장의 피아노 연주를 꼽을 수도 있으리라.

지금껏 <사이언스 올제>는 세계적 권위가 있는 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해 실험실의 안과 밖을 이어주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창간호에 당시만 해도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제대혈’의 가능성을 폭넓게 조명한 뒤로 용어조차 생소한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전파식별), 해킹을 차단하는 차세대 기술인 ‘양자암호’ 등 사회적 대응이 필요한 기술을 지속적으로 소개했다. 대부분 생소한 첨단 기술인 탓에 읽는 이에게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서구의 과학 지식과 정보를 우리 토양에 맞도록 흡수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어려움이리라.

우리의 첨단과학으로 채워지기를

그렇다고 <사이언스 올제>가 서구의 첨단 과학에 경도돼 있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과학의 문화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창간 정신’이 유효한 가운데 과학을 하거나 과학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시민으로 자리잡는 데도 관심을 기울인다. 국내의 다양한 필자들의 글을 꾸준히 싣는 것도 ‘우리식 교양’의 뿌리를 다지고 싶다는 바람에서다. 박 교수가 <사이언스 올제> 발행인으로서 꿈꾸는 미래도 여기에 있다. “지금은 첨단 과학기술 정보가 국내에서 재생산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보인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제안하는 첨단과학만으로 <사이언스 올제>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5년 동안 박 교수는 <사이언스 올제>를 통해 한 줌의 과학문화 씨앗을 뿌렸다. 과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도 심층 분석된 첨단과학을 언어의 장벽 없이 쉽게 다가설 수 있었다. 때로는 거친 토양에 씨앗이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씨앗이 튼실하지 못해 이내 자취를 감췄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사이언스 올제>가 5년을 버틴 것은 커다란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다시 5년을 준비하는 박 교수의 마음은 초발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 문화가 꽃피우길 기대한다. 여기에 <사이언스 올제>가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다. 조금은 어렵더라도 몇 번 읽으면 과학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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