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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용] 남북 화해는 상이군경들부터

등록 2005-12-29 00:00 수정 2020-05-02 04:24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대한민국상이군경회(회장 강달신)가 북쪽의 상이군경과 교류를 추진한다고? 북쪽과 총칼을 겨누다 부상을 입은 상이군경 회원들은 반공을 국시로 받든 박정희 군사정권의 행동대원을 자처했다. 광화문에서 ‘반핵 반김’을 외치며 인공기를 불태운 낯익은 보수단체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좌든 우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이군경회의 남북 교류와 화해 제안은 단체의 최병용(78) 부회장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다. 그는 일찍이 1988년부터 생각하고 준비해왔다. “87년 6·29 이후 총칼을 들고 설치던 군사정권이 백담사로 유배가는 몰락을 지켜보면서 우리 단체의 존립 방향을 새롭게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즈음 남북 화해와 협력만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혔다. 그래서 단체의 설립 목적에 ‘조국통일 성업 달성’을 끼워넣었다. 내부의 반발을 의식해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그는 93~94년에서야 당시 윤재철 회장(현 민화협 상임의장단)을 설득해 물밑에서 방북을 추진했다. 성사를 코앞에 뒀지만 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이듬해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그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최 부회장은 “총 들고 서로 죽이고 싸운 남북 상이군경끼리 서로 협력하고 화해하자고 나서야 남북의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2001년 윤재철 회장의 입을 통해 나온 <국방백서>의 주적 표현 삭제 주장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그 사람들이 무릎을 끓고 사과 못한다. 우리가 아량을 갖고 화해 협력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한다. 조직 내부의 반발이 있다는 게 그가 안타까워 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지도부의 공감 아래 나온 제안이기는 하지만 12월28일 이사회 통과를 100% 자신할 순 없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시(현 김책시)다. 그곳에서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현지 주민을 중심으로 창립된 3사단 특별공격대대에 들어갔다. 고향을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그는 전쟁터에서 양쪽 다리를 다쳤다. 고향땅에 의약품을 지원하거나 보훈병원을 지어 자신의 총부리에 다친 북쪽의 상이군경을 보듬고 싶은 게 노구인 그의 마지막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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