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카메라 들고 직접 영상물 제작한 충남 부여군의 아줌마 4인
‘촌스럽다, 무식하다, 보조자다’라는 주류 언론들의 왜곡을 깨고 싶다네
▣ 부여= 글 이혜온 인턴기자 eon2222@hanmail.net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농업·농민 문제가 주요한 사회적 의제에서 밀려난 지 오래된 상황에서 ‘여성’ 농민을 주류 미디어에서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농민 시위 보도에서 인터뷰 대상은 주로 남성 농민이다. 남성 농민이 농민 문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으리라는 편견이 은근히 작용한 결과다. 농촌이 배경인 드라마에서 농촌 여성의 전형적 캐릭터는 ‘마을의 소문이 초미의 관심사인 촌스러운 수다쟁이’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농민은 이중의 소외를 경험한다. 아예 드러나지 않거나, ‘남성 농민의 보조자’ 또는 ‘촌스럽고 무식한 아줌마’로 정형화되기 십상이다. 무관심하거나 편견에 찬 시선으로 여성 농민을 묘사하는 신문·방송을 보던 여성 농민들이 ‘우리가 직접 우리 얘기를 해야겠다’며 일을 저질렀다. 충남 부여군 여성 농민 4명이 직접 카메라를 들었다.
‘소 400마리 키우기’를 디졸브 효과로!
이들은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대표 김명준)가 진행하는 ‘찾아가는 미디어 교육’ 수료생들. 주류 미디어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사회적 소수자들, 즉 이주노동자·장애인·여성·지역주민 등을 대상으로 미디어 비판 및 제작·교육을 진행하는 ‘찾아가는 미디어 교육’이 이번엔 충남 부여군 여성 농민회와 함께 ‘여성 농민! 일 저지르다!’라는 여성 농민 미디어 교육을 진행한 것이다. 처음엔 디지털카메라를 잡는 것조차 어색했던 이들은 7월 한달 동안 주말을 이용한 8번의 교육 끝에 각자의 작품을 직접 기획·촬영·편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7월23일 오후 5시, 부여농업기술센터 정보화교육실에서는 마지막 편집 작업이 한창이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리라던 귀농의 환상은 한달 만에 깨지고,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 집안일, 농사일, 자녀 교육의 삼중고에 시달리는 일상에 회의를 느끼던 중 여성 농민회 활동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귀농 뒤 여성 농민회 활동을 해온 자신의 이야기를 영상물에 담기 위해 박은희(41)씨가 내레이션 녹음 작업을 하는 동안 지켜보는 두 딸 유경(10)이와 백두(9)가 옆에서 계속 키득거려 자꾸만 NG가 발생한다.
조은(5)이와 세희(2)를 키우랴, 농사일 하랴, 집안일 하랴 하루하루가 너무 힘에 부쳐 남편과 다투기도 했다는 김은심(28)씨는 남편과 하루 역할 바꾸기를 하면서 그 모습을 화면에 담았다. 그는 촬영한 영상 중 필요한 부분을 골라내는 캡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화면 속 그가 “하루 종일 고추 따기, 비료 주기, 농약 치기를 남편 대신 해보았는데요, 제 하루에 비해 그렇게 힘들진 않네요”라며 웃는다.
‘읍내 미용실 원장’으로 보이는 세련된 스타일과 달리 400여 마리의 소를 키우는 농사꾼 전영희(41)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상을 담아 ‘나! 바빠!’라는 영상물을 만들었다. 힘든 하루하루지만 즐겁게 살고 싶다는 전씨는 다양한 ‘디졸브 효과’(앞 화면이 사라짐과 동시에 다른 화면이 점차로 나타나게 하는 효과)로 자신의 발랄함을 표현하려 고심 중이다.
“과격데모꾼도 전업주부도 아니지요"
조운정(31)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모습을 담아 ‘자명골의 7월’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풍경 위주의 모습들은 농촌의 한가로운 겉모습만을 보여주는 것 같아” 평생 농사로 자식들을 키우고 이제 혼자 살고 계시는 옆집 김준예 할머니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구성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힌 조씨는 기자가 다가온 줄도 모르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오디오 편집에 여념이 없었다. 이날 작업은 밤을 꼬박 지새우고 다음날 새벽 6시에야 끝났다.
다음날 오후 2시 농민회 활동가와 마을 주민 등 40여명의 관객이 모인 부여군 농민회관에서는 따끈따끈하게 갓 구워진 이들 작품의 시사회가 열렸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네 작품은 여느 농촌 드라마보다 현실적이고 훈훈했다.
처음에는 ‘이걸 배워 뭐하나’ 싶은 마음에 시큰둥했다는 조씨는 “만들어놓고 보니 꽤 그럴듯해서 나도 놀랐다”며 웃는다. 성공적으로 일을 저지른 이들에게 앞으로 더욱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다. 찾아가는 미디어 교육의 목표가 ‘시혜적이고 일회적인’ 교육이 아니라 부문 운동과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데 있는 만큼 여성 농민 미디어 교육도 이후 여성 농민이 적극적인 미디어 생산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육을 담당한 미디액트의 김진열(32)씨는 “농한기에 일정을 끝내느라 다른 미디어 교육에 비해 기간이 촉박했는데 좋은 결과물이 나와 놀랐다”며 “앞으로 영상물 제작 활동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비 대여가 어려운 비디오카메라보다 지속적인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디지털카메라를 활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은희씨는 “여성 농민회가 활동은 많이 하는데도 남겨진 기록이 없는 게 문제였다”며 “12월11일 홍콩에서 열리는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을 영상물로 제작하는 것이 현재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박씨는 앞으로 찍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부여 여성 농민회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농민운동’뿐 아니라 ‘여성’ 농민운동가로서 느끼는 애환도 다루고 싶다고 했다. 2002년 부여에서 여성 농민회를 조직할 때 ‘집안에서 부부가 둘 다 운동을 하면 집안 말아먹는다’는 노골적 불만에서부터 ‘같은 길인데 조직을 따로 둘 필요가 있느냐. 농민회의 여성분과위원회로 남아 있으라’는 점잖은 만류까지 농민회 남성 활동가들의 반발이 심했다. 실제 바쁜 부인의 활동을 이해 못하는 남편 때문에 부부간에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자녀 교육 문제도 여성 농민운동을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박씨의 큰딸 유경(11)이도 “다른 엄마들은 활동하지 않는데 우리 엄마만 늘 바빠서 집을 비우는 게 싫다”며 “농민회 음악이 나오면 괜히 창피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TV에서 과격 데모꾼으로 농민들을 묘사하고, 엄마들은 전업주부로 그리니까 우리 딸도 영향을 받는 거 아니겠냐”며 “여성 농민이 더더욱 미디어의 주체로 나설 필요를 느낀다”고 말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씨가 독자적 여성 농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는 까닭은 ‘여성’ 농민이 처한 현실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농림부 통계를 보면 농업 주종사자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28.3%에서 2002년 52.5%로 두배 가까이 늘었지만, 그 지위는 여전히 ‘생산 보조자’에 머물러 있다. 여성 농업인의 하루 노동시간은 9.7시간(농한기)~13.4시간(농번기)에 이른다. 한국 여성 평균 노동시간인 7.5시간을 훨씬 웃돈다. 여성들이 주로 맡는 밭농사는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여성 농민의 모성보호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농가 도우미 제도’(출산 전후 180일 중 최대 30일까지 여성 농민 대신 일을 할 영농 도우미 일당 3만원 중 80%를 지원하는 제도)는 지원 예산이 지방으로 이양돼 예산 편성과 집행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을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여성농민회 활약상과 애환 담을 예정
노동·건강·모성권 등 여성 농민들의 문제는 복잡하지만 사회적 관심은 무척 낮다. 이경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정책국장은 “여성 농민 정책은 계획만 보도될 뿐 실제 적용 여부는 언론의 관심 밖”이라며 “사실 농가 도우미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되물었다.
‘여성 농민! 일 저지르다!’ 제작으로 부여에서 시작된 여성 농민 미디어 교육이 중대한 변화를 이끌 작은 변화였으면 하는 게 교육 참가자 4명의 바람이다. 여성 농민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더 많이 들릴 수 있도록, 여성 농민들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더 많은 여성 농민들이 일을 저질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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