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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센인에 사죄드린다”

등록 2005-07-20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제 강점기 소록도 피해 보상’ 소송 진행하는 일본인 변호사 도쿠다 야스유키…일본 한센인 살린 ‘구마모토 판결’의 주인공, 일본 정부 상대로 다시 싸운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동그란 얼굴에 안경을 쓴 그의 첫인상은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였다. 그는 자신을 “평범한 시골 변호사”라고 소개했다. 일본 변호사 도쿠다 야스유키(61)씨. 그는 지난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를 한센인들 앞에 무릎 꿇린 ‘구마모토 판결’을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그는 이제 일본 정부가 해방 이전 한국 한센인들에게 입힌 피해 보상을 청구하는 ‘일제 강점기 소록도 재원자 보상 청구소송’을 이끌고 있다.

“침묵은 지지이며, 지지는 가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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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2일 오후 1시30분 국가인권위원회가 연 ‘한센인 인권보호 증진 방안을 위한 한-일 양국 토론회’에 참여한 그를 만났다. 독도 파문과 일본 정치가들의 망언이 잇따를 때마다 한-일 관계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들이 높지만, 두 나라의 미래에 기대를 거는 것은 그와 같은 살아 있는 양심이 두 나라 모두에 넘쳐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센병 소송에 처음 뛰어들게 된 계기는.

나는 오이타현 벳푸시에 근무하는 평범한 시골 변호사다. 변호사 생활을 해온 게 올해로 37년째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실적은 없다. 내가 한센인 국가 배상 소송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시마 히로시라는 한 작가의 편지를 받아들면서부터였다. 그는 국립한센요양소 호시즈카 경애원에 반세기가 넘도록 격리돼 있던 한센인이다. 그는 편지에서 “‘나예방법’ 같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악법에 대해 인권을 지키는 변호사가 가만히 침묵해도 좋은가”라고 묻고 있었다. 그는 “침묵은 지지이며, 지지는 가담과 같다”고 나를 질책했다. 그때 받은 충격을 평생 잊을 수 없다. 전신을 얻어맞은 듯 서서 움직이질 못했다.

이후 ‘구마모토 판결’이라는 역사적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1년 5월11일로 기억된다. 구마모토 지방법원에서는 “국가의 한센인 격리정책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의 길이만 해도 400쪽이 넘었다.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는 “한센병 환자들이 그동안 받아온 고통을 생각해 감히 항소를 하지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원고들은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고 감격했다. 이후 ‘한센병 요양소 입소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 등에 관한 법률’이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피해자들은 작게는 200만엔에서 많게는 1400만엔까지 보상금을 받았다.

다시 소록도 환자들을 위한 소송을 이끌고 있는데.

구마모토 판결 이후 나는 다시 한번 엄한 비판과 맞서게 됐다. 오랫동안 한국 한센인 격리 정책의 역사를 연구해온 일본 역사연구가 타키오 에이지의 비판이었다. 그는 “당신은 국내 요양소만 생각하고 있지만, 한국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 한센병 격리 정책의 피해를 밝히지 않는 것은 분명한 자국민 중심주의다. 한 고비를 넘기고 안도감에 젖어 있던 나는, 자신의 좁은 시야와 다시 한번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깊은 책임을 느끼게 됐다. 대한변협과 의논해 소록도 보상 소송에 뛰어들었다. (원고는 소록도 재원자 장기진(81)씨 등 117명으로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공판이 진행 중이다. 소송 진행 과정에서 벌써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록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한눈에 일본의 요양소보다 여건이 나쁘고 지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록도는 한센인 격리 정책과 식민지 정책 등이 중첩돼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소록도 사람들은 일본과 같이 강제 노동에 종사했으며, 단종·낙태를 감수했다. 이에 더해 일본에서는 없는 폭력이 만연해 있었다. 환자들은 목표량을 정해두고 노동을 했으며, ‘규칙’을 어길 때는 직원들에게 몰매를 맞아야 했다. 그런 인권 침해는 구마모토 지방재판소 판결에 의해 헌법 위반이라고 단죄된 국내 요양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다. 또 대부분 기독교 신자들이었던 소록도 사람들에게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는 징벌을 가했다. (이 가운데 소록도 환자 이춘상이 1940년 6월20일 수호 마사토 당시 원장을 살해하는 이른바 ‘이춘상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이춘상은 “원장의 학정이 너무 심해 일을 저질렀다”고 항변했지만, 사형 판결을 피할 수 없었다.)

이중의 고통, 일본엔 없는 소록도의 폭력

소록도 한센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입소자들의 인상은 매우 상냥하고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처음 재판에서 이기면 뭘 하고 싶냐는 물음에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얘기를 듣고 환자들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사죄’와 ‘평등’이다. 일본의 피해자들과 같은 수준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 아주 조심스럽고 작은 요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소송 승리를 위해) 전력을 다해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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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재판에 대한 일본 내의 반향은.

올해 가을에 판결이 날 예정이다. 일본 내에서도 일본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판결이 나올 때는 구마모토 재판 때와 같이 큰 반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국민 전체가 관심을 갖는 이슈는 아니다.

승소 가능성은 얼마나 있다고 보나.

낙관한다. 반드시 이긴다. (일본 법원은 한국인 피해자와 유가족들의 소송에 대해 일본 정부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메이지 헌법에는 국가 위법 행위에 대한 배상 의무가 없다는 ‘국가 무책임론’ △한-일 협정으로 인한 청구권 소멸 △보상을 해줄 수 있는 법률 부재 등의 이유를 들어 소를 기각해왔다.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 법원에서 승소한 유일한 사례는 원폭 피해와 관련된 소송뿐이다. 동료 변호사들은 “그가 다른 변호사들과 달리 ‘이긴다’는 낙관적인 표현을 잘 쓴다”며 웃었다.)

한국 한센인 차별은 일본 식민지배 탓

한·일 양국의 한센인 차별에 대한 소회는.

한센 병력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2가지다. 한센 병력자들이 그동안 편견과 차별을 받게 된 원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 때문이다. 그동안 전혀 보상 없이 이 문제를 방치해온 것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사죄드린다. 차별과 편견을 이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국 피해자들이 끈기 있게 싸워줬으면 좋겠다.



한센인 보상, 한-일 차이 감안해야


소록도 재원자는 환자 중 소수… 대다수가 병 감추고 살아

일본에서 한센인들의 격리가 시작된 것은 1907년 ‘나예방의 건’이라는 법률이 시행되면서부터다. 1996년 3월31일 ‘나예방법’이 폐지될 때까지 무려 89년 동안 격리정책이 이어졌다. 대부분의 한센인들이 국가 요양시설에 격리돼 있었기 때문에, ‘구마모토 판결’ 이후 보상금과 생활 보조금 지급 등의 대책을 세우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우리나라에서 한센인 강제격리 제도가 폐지된 것은 1963년이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사회학)는 “일본보다 먼저 강제격리 정책이 폐지된 것은 일견 긍정적이지만, 환자 관리를 책임질 수 없었던 국가가 책임을 사회에 떠넘겼다는 점을 생각할 때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다. 2003년 현재 한국의 한센병 환자 1만6801명 가운데, 소록도 재원자는 723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국 89곳에 흩어진 정착촌(5873명)과 자신이 한센인임을 감춘 채 사람들과 같이 섞여(9280명) 산다. 또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 △비토리섬 학살사건 등 대규모 학살이 잇따른 것도 한국만의 특징이다. 정 교수는 “보상 대책을 세울 때 한센인들의 존재 형태와 차이를 고려한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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