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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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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정 취해 있는가

등록 2005-06-10 00:00 수정 2020-05-03 04:24

15~20년 노동조합 경력의 활동가들이 진단하는 노동운동의 위기와 시련
권력화 비리 극소수 일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고 자정능력 발휘해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남편이 노동조합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으면, 이 사실을 아는 아파트단지 주부들이 요즘 ‘당신 남편 이런저런 돈 많이 생길 텐데, 뭐 그런 중고차 타고 다니냐?’고 말한답니다.” “일부 활동가는 ‘너 (맛이 간) 그 판에 아직도 있냐?’는 투의 냉소를 친구들한테서 듣는 형편입니다.” 어느 노동계 관계자의 탄식 섞인 얘기다. 기아차 채용비리·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한국노총 지도부 비리사건·현대자동차 노조 채용비리…. 잇따라 터진 노동운동 내부의 부패·비리를 접하면서 노동조합을 보는 ‘대중의 눈’은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다. 어느 곳이 됐든 노동조합에서 일하는 수많은 활동가들로서는 견디기 힘든 어려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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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화·관료화·사회적 고립화’로 불리는 최근의 노동운동 위기와 시련을 노조 활동가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과연 노동조합 간부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 적당히 타협해 떡고물이나 얻어먹거나, 위세 부리면서 또 다른 권력을 탐하는 등 알량한 권력에 취해 있었는가? <한겨레21>은 6월1일, 젊은 시절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15∼20년간 노동조합 활동을 해온 40대 초·중반의 활동가 3명(임준택 한국노총 화학연맹 정책실장 겸 서울경기인천 화학일반노조 위원장·이주호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정책기획실장·나상윤 민주노총 공공연맹 정책위원장)한테서 심경을 들어보았다.

이들은 “비리·부패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반성하고 철저하게 성찰해야 한다”며 “하지만 다수의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 다른 어떤 곳보다 건강성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세상을 바꾸자는 노동조합의 외침은 여전히 소중한 우리 사회의 힘”이라며 ‘희망의 근거’를 노동조합에서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구호로만 부르짖는 평등·연대·인간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실천과 노력이 뒷받침될 때 노동조합운동이 ‘진정성’을 되찾을 수 있고, 국민들한테 신뢰받는 사회적 주체로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사회 오랫동안 노동조합 운동을 해온 사람으로서 요즘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심경은?

요즘은 “너도 돈 좀 내라”

이주호(이하 이) 그전에는 친구들과 만나 밥 먹으면 나는 대체로 돈 안 내는 쪽으로 분류됐는데, 요즘에는 농담으로 “너도 돈 좀 내라”고 하더라. 몇몇 비리 사건이 터진 뒤의 우스갯소리다. 물론 불미스런 사태가 드러났지만, 전체 노동조합 운동에서 보면 일부분이고 예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는다고 할지 모르지만, 대다수 우리나라 노동조합은 여전히 건강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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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택(이하 임) 내 주위 사람들을 보면 “노동조합 활동하는 너도 욕 많이 듣고 고민되겠다. 걱정된다”는 전화를 심심찮게 받는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노동조합의 중요한 덕목인 민주성·도덕성을 심각하게 반성하고 짚어봐야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니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돼왔는지에 대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많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자긍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자긍심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상윤(이하 나) 시기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의 역사에서 중간중간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1987년 대투쟁 이후 주로 정권이나 사용자의 탄압 같은 외부적 요인이 주요 원인이었다. 지금은 대체로 내부 비리·갈등으로 위기감이 조성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사회 노조 간부들의 도덕적 불감증이 몇몇 사업장에 국한된 게 아니라고 보거나, 조합 내부에서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쉬쉬하고 감싸준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동안 문제 제기가 내부에서 없었는가?

노동조합이 기업별 체제라는 틀로 돼 있어서 상호 견제하기 어려운 구조다. 그동안 내부에서 은폐돼온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두들 일이 터진 뒤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전에 알기 어려운 구조가 있다. 재정·회계 감사를 집행부에 우호적인 사람으로 구성하려는 오랜 관행들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 노동조합 내부의 견제·감시 장치가 취약하구나, 느낀다.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연봉 3천만원 받는 중소 병원 출신이다. 판공비도 30만원이다. 보건의료노조는 4만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조직인데, 내부에서도 위원장 월급과 판공비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적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최근의 부패·비리 형태는 병원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간부와 조합원이 대부분 여성인데 여성 조합원들한테 술을 먹일 수가 있나, 룸살롱에 데려갈 수가 있나?

이견 있으면 위원장과 붙어 싸운다

사회 주변부 비정규직 노동자나 개별 조합원들도 스스로 집행부를 불신하는 건 아닌가? 우리 노조 간부들도 뒷돈 받았거나 얼마 해먹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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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아줌마 노조지부장이 돈 받고 그럴 거라는 의심조차 할 수 없다. 혹시 지도부에 대한 조합원들의 불신이 있다면 “왜 만날 총파업만 하느냐”는 불만이 있을 수는 있겠다. 예외적인 일부 노조를 뺀다면 그리고 최소한 상식적인 수준에서 견줘보면 노동조합은 다른 집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큰 권력이든 작은 권력이든 의심과 의혹의 대상이 될 수는 있고 외부 검증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전체가 다 그런 것처럼 과도하게 매도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워낙 상징적인 사업장에서 비리가 터져나와 일반적으로 다 그럴 것이라고 보는 모양인데, 내가 있는 공공사업장의 경우 노동조합이 투쟁성·연대성 같은 운동의 원칙을 제대로 지켜왔는지를 놓고 비판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부정·비리가 접근할 여지가 없다.

사회 일부 노조위원장이나 간부들이 자리나 탐하고 기득권 또는 권력에 눈멀어 있었던 건 아닌가? 통제장치도 없고….

한국노총 조직을 보면 대체로 선출직 대표자들, 그러니까 위원장이나 상급단체 임원들은 권한이 막강하고 권위주의적이다. 노조 대표자 혹은 특정인에게 권한이 너무 집중돼 있다. 노조 내부에서 비리를 막아내지 못한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법상 노조 대표자의 권한이 크긴 하지만 위원장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건 아니다. 의견이 다르면 누구든 위원장과 붙어 싸우는 곳이 노조다. 나의 일주일 생활시간표를 보면 약 40%가 회의다. 바깥에서는 “너희는 만날 회의만 하냐”고 그러는데, 우리처럼 회의를 거쳐서 모든 의사를 결정하는 수평적 네트워크 집단은 많지 않다. 비효율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회의가 많다. 회의를 통해 결정하고 집행하지 않으면 조직 자체가 안 굴러간다.

국민들이 노동조합한테서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건 그만큼 기대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을 전환기라고 본다. 노동운동이 지난 20년 동안 많이 성장해왔고, 정부와 자본에 맞서 조직을 지키는 싸움에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다 보니 노조 내부를 잘 들여다보지 못했고, 변화를 꾀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몇 가지 비리 사건이 터지자 이 틈을 타서 노조를 손보겠다고 사용자들이 공공연히 그러는데, 노동의 힘을 약화하는 구실로 삼고 “해볼 테면 해봐라” 식으로 나오고 있다. 이런 사용자들과 그동안 맞서 싸우느라고 시간을 다 보냈다.

사회 노동조합 간부들의 의식이 ‘초심’에서 벗어나 차츰 부패하고 있는 건 아닌가? 노조활동을 하면서 사장들과 대등하게 만나 교섭하다 보니 갑자기 우쭐해지고, 작은 술자리에서부터 시작해 나중에 돈거래까지 이뤄지고…. 자본과 권력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노조 간부가 몇명이나 될까?

노조 권력은 ‘파생 권력’일 뿐

노조가 점차 파워를 갖고 사회적으로 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측면은 있다. 그러나 커진 사회적 영향력은 사회에 순기능으로 작용한다. 특수한 몇 사례들을 갖고 노조가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고 노동귀족으로 연결짓기도 하지만, 나는 달리 본다. 보건의료노조 산별 총파업을 벌이면서 느낀 것인데 협약안이 조합원들은 물론 비조직 노동자한테도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책임 있는 주체로서 발언하고 실천해야겠구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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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일정한 권력을 갖고 있다고는 본다. 그러나 정책적 결정을 좌우하는 권력은 아니고 집단적 수, 즉 양적 규모에 의해 ‘파생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문제를 넘어서 볼 필요도 있다. 단순히 비리 때문에 여론이 따가운 건 아니고, 정규직 중심의 노조가 비정규직을 같이 끌고 가겠다고 말만 던져놓고 제대로 투쟁을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이 있는 것 같다. 무상의료·무상교육·사회공공성을 말로만 외치거나, 말은 좋은데 현실에서 가능할까, 라고 생각하는 현실 타협적 모습을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노조 관료화 얘기도 나오는 것이다.

사회 동지라는 생각은 간데없고 니 편 내 편 가르고 정파끼리 밤새워가며 살벌하게 핏대 올리는 설전을 벌이지만, 정작 나중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는 경향도 있다. 이 때문에 노동조합 운동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는데….

기풍의 문제다. 엄혹한 시절에 가졌던 노동조합의 기풍이 상당 부분 사라지고 있다. 결정 따로 실천 따로 노는 식이다. 노조 간부는 쉬운 길을 택하고 현장 조합원은 참여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조직문화 혁신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더 높은 민주주의 제도와 구조를 고민했어야 하는데, 이 부분이 빠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다른 집단에 비해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어서 그런 건 같다. 전투적 조합주의가 비판받지만, 끊임없는 공세와 탄압 속에서 버티고 싸워나가기도 버거웠던 것이 현실이다. 노조 비리 문제는 내부에서 대응할 수 있는 지점이 있었을 텐데, 놓쳤던 것 같다.

기풍과 관련해, 현장 중심으로 조직해나가는 기풍이 크게 약화됐다. 노동조합 운동이 현장의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이제 간부의 힘으로 하는 운동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갈수록 활동가들이 자기 조직과 사업장 권익 지키기에 안주하는 양상을 보인다.

솔직히 노동조합 운동이 이제야 우리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정파도 그저 나쁜 것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고, 새가 좌우로 날 듯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아무튼 이런저런 입장들이 역사적 평가를 받으면서 갈 수밖에 없다. 지금을 ‘진정성의 위기’라고 하는데, “그렇게 떠들고 주장하는 것만큼 당신 개인이나 조직이 제대로 실천하느냐”는 물음에 우리 내부에서 진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 운동을 시작할 때의 초심을 되짚어보면서 활동해야 할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최근 사태는 노동운동의 성장통[%%IMAGE5%%]

사회 사태의 원인을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찾기도 하는데, 기업별 틀로 묶어놓은 것을 꼭 자본과 정부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지금의 위기는 탄압·회유 공작·신자유주의 공세를 넘어 근본적으로 노조 내부에서 야기된 것이다. 노조의 활로는 무엇인가?

1990년대 중반에 친구들을 만나면 “너 아직도 그거(노동운동) 하고 있냐”는 말을 곧잘 들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총선 끝나고 민주노동당의 의회 진출을 축하한다고 친구들이 그러더라. 세상도 달라지고 사회가 많이 바뀌었구나, 느꼈다. 최근의 사태는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통이라고 할 수 있다. 노조 내부에서 그동안 무뎌지고 적당히 넘어갔던, 자신들을 향한 비판의 칼날을 더 엄하게 세워야 한다. 그런데 당장 공공성 확보 투쟁 등 해야 할 업무도 너무 많고, 운동전략도 고민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 활동가들의 현실이고 고민이다.

공공의료 확충을 요구하는 노조의 싸움에 국민들의 관심이 크다. 의제를 잘 만들고 투쟁을 제대로 하면 광범위한 대중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신뢰받는 운동을 할 수 있다. 현재는 솔직히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놓고 아니다, 라고 말하는 세력 집단이 노조 외에 어디가 있는가? 학생은 힘이 없고 시민단체도 성명서 단체에 불과하다. 다 때려부수고 노동조합 운동을 재건축하는 건 맞지 않다. 리모델링으로 기본 골격은 유지하면서 가는 편이 낫다. 조직률도 낮고 대공장·정규직 중심이지만 이를 뛰어넘으려는 노력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2002년 한국노총 위원장 선거 당시 노총 투명성 문제가 제기됐으나 2003년에 개혁특위 보고서 하나 내는 것으로 끝나고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수많은 대의원들이 집행부가 내놓은 안(임원선거제도 개혁 및 외부감사제도 도입)보다 더욱 강화된 안을 통과시켰다. 현장의 변화와 개혁 의지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조합은 위기 속에서 자정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집단이구나, 다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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