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된 구조조정과 고용불안이 지배하는 사회
직무스트레스에 의한 돌연사가 당신을 노린다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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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4일 기업은행 서울시내 한 점포에서 차장으로 근무하던 유아무개(42)씨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유씨는 퇴근 뒤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갑자기 고통을 호소했고, 부인은 급히 먹다 체한 것이라고 생각해 바늘로 손가락을 따줬다. 잠시 안정을 되찾아 잠자리에 든 유씨는 두어 시간 뒤 다시 온몸을 뒹굴며 발작적 쇼크를 일으킨 뒤 정신을 잃었다. 응급처치를 하고 앰뷸런스로 이송하는 도중 유씨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매월 한명씩 죽어나갔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대학 졸업 뒤 15년간 은행에서 근무한 그는 오랫동안 은행 본점에서 일하다 1년 전 영업점포로 발령받아 나갔다고 한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기 일쑤였는데, 평소에 별다른 지병도 잔병치레도 없었다. 가족들은 지금 과로·스트레스에 의한 산업재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용카드·방카슈랑스·펀드상품 판매 등 날마다 실적에 쪼이면서 심한 압박을 받아 결국 과도한 ‘직무스트레스’로 숨졌다는 것이다. 기업은행 노조 관계자는 “머릿속에 늘 실적 고민이 쌓이고 새벽같이 나가면서 점포 실적을 신경써야 했다. 1년 넘게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가 누적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금융노조 관계자는 “카드판촉 등 외환위기 이후 은행원들이 해야 하는 캠페인이 한두개가 아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실적이 평가와 연봉에 직접 관련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늘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돌연사하는 직원이 거의 없었는데, 경제위기를 겪고 난 뒤 각 은행별로 해마다 몇명씩 과로사로 죽는 사람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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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행에서도 지난해 6명의 직원이 잇따라 숨졌다. 대부분 돌연사 또는 과로사로 추정된다. 실적 과당경쟁이 부른 죽음이라는 것이다. 국민은행노조 장영두 실장은 “인원 감축으로 업무량이 늘고, 실적을 늘 강요받고 퇴근시간이 늦어지면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매월 한명씩 죽어나간 것으로 보인다”며 “일부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 인정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심혈관 질환 촉발
“숨이 막힌다. 헉 하고 목이 조여오는 느낌, 뒷골이 땡긴다. 두통하고 피곤한 몸, 머리가 지끈거리고 모든 게 복잡하다. 답답하고 해결해야 될 게 너무 많고, 막막하고….” 공기업에 근무하는 김아무개(33·해외사업부) 과장은 “기업이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에 회사원도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지 않고 그냥 직장 내 관계로만 먹고사는 건 이제 안 먹혀든다. 여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제일 크다”고 말했다. 외국계 중소기업에 다니는 정아무개(33·여) 차장은 “(숨가쁜 경쟁으로) 한 시간 안에 보고서를 기안해서 완성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가끔 있다. 일의 성패가 그런 것에 달려 있는데, 그럴 때 피가 역류한다고 할까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들면서 땀이 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상시 구조조정으로 이제는 위고 아래고 어디든지 편하고 보장된 곳은 없는 것 같다. 위로 올라갈수록 아이디어 싸움이기 때문에 더 피곤하고 스트레스가 크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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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이후 거대한 불황을 겪어보지 않고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달성해온 우리나라에서 외환위기의 충격은 갈수록 ‘직무 스트레스’의 급증과 확산을 낳고 있다. 구조조정 일상화, 고용불안 등 극도의 불안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하면서 우울증을 수반하는 충격적 경험이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할 일이 없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공기업에서 일하는 김 과장은 “이걸 내일 아침까지 밤새워 해야 하나, 할 수 있을까. 이런 걸 고민하고 그랬는데, 요즘 몇달 사이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어요. 그래서 거꾸로 바쁘게 일하는 척, 일이 없는데 일하는 것처럼 하는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죠.”
연세대 원주의대 장세진 교수(예방의학교실)는 “기업들이 죄다 비정규직 쓰고, 모든 사람한테 실적 압박이 강하게 가해지고 이런 사회구조적 변화에서 개인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직무 스트레스가 갑자기 증폭되고 있다. 40대에서 과로사·뇌심혈관 질환자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외환위기를 거친 이후 직장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졌고, 감원 공포가 맴돌면서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있다는 얘기다. 인제대 백병원 우종민 교수(스트레스센터)는 “세계화 속에서 끊임없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에 먹고살기 힘들 때보다 성과 압박에 따른 시간경쟁이 훨씬 큰 스트레스를 발생시키고 있다”며 “구조조정, 합병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조직 내 전환배치도 빠르게 일어나고 평생고용도 무너지면서 이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5일제로 스트레스는 더 커져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병은 생명의 엔진인 ‘심장’쪽에서 주로 증상이 나타난다. 가슴이 뻐근하다, 가슴이 저리다고 호소할 때는 직무 스트레스인지를 의심해봐야 한다. 일에서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심혈관계 질환과 뚜렷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직무스트레스학회 박정선 회장은 “직무 스트레스 자체가 심장병을 일으키는 건 아니지만,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을 그대로 방치하면 심혈관 질환(고혈압·협심증·심근경색 등)을 촉발시킬 수 있고 심하면 과로사로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 심장질환인 심근경색 등 관상동맥질환(허혈성 심장질환)은 1992년에 인구 10만명당 12.5명에서 2002년 25.2명으로 2배 이상 급증했다. 40대 한국인 사망률 1위를 차지하는 돌연사의 주범도 협심증과 심근경색으로 대표되는 관상동맥 질환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협심증과 심근경색은 전체 심장병 환자의 10~20%에 불과했으나, 요즘은 80~90%를 차지할 만큼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과연 주5일제로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작업장에서의 스트레스는 줄어들었을까? 신한은행 신아무개 차장은 “주5일제 도입 이후 금요일까지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훨씬 더 노동 강도가 높아졌다”며 “1주일에 이틀을 쉬긴 하지만 주중에 매일같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주5일제에 따라 오히려 직무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는 얘기다. “결재 받아야 하는데 사장이나 이사는 토요일에 회사에 안 나와요. 그런 상황이면 금요일까지 결재를 다 받아야 하는데, 목요일에는 반드시 오늘 완성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고… 그런 압박감이 있어요.” 공기업에서 일하는 김 과장의 말이다.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스트레스도 화이트칼라에 못지않게 증가하고 있다. 자동차완성사의 경우 컨베이어벨트 작업 속도가 빨라지면서 노동자들은 더욱 일에 집중해야 하고, 그만큼 스트레스는 커진다. 전 현대자동차노조 윤복근 산업안전부장은 “컨베이어벨트를 타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노가다는 아니지만, 작업 피치가 빨라지고 주야간 교대근무가 늘어나면서 스트레스가 커지고 있다”며 “2002년에 돌연사로 산재 승인을 받은 노동자가 무려 7∼8명에 달했다. 대부분 집에서 잘 자다가 새벽에 흔들어보니 죽어 있었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건강하고 일 잘하던 사람들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현대자동차에는 “언제든 자동차 수출길이 막히면 노조고 뭐고 아무도 방패막이가 돼줄 수 없고 곧 정리해고가 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다. 아무리 주 40시간 근무가 좋다 해도 ‘회사에 붙어 있을 때’ 최대한 벌어먹으려면 특근과 야간을 밥먹듯 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여성개발원 정진주 박사(산업안전보건)가 지난해 자동차완성사 노동자 5300여명을 대상으로 직무 스트레스를 조사한 것을 보자. 조사결과 긴장 정도가 낮은 집단은 전체의 78.5%, 고긴장 집단은 21.5%로 자동차완성사 노동자 3명 중 1명은 고긴장 집단에 속해 스트레스에 많이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근무시간이 주당 70시간 이상인 노동자 중에서 고긴장 집단이 많았고(23.1%) △실직 경험이 있을수록(27.6%·실직 경험 없을 경우 20.5%) △구조조정 경험이 있을수록(22.9%·구조조정 경험이 없을 경우 18.8%) 고긴장 집단의 빈도가 높았다.
흥미로운 건 2001년 조사와 2004년 조사를 비교한 것인데, 사회적 지지(회사 내 상사 및 동료간 도움이나 지지)가 2001년 20.11에서 지난해 19.16으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정진주 박사는 “실직과 구조조정이 직무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드러났다”며 “회사에서 동료들간의 지지와 이해 부족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만 따져보면, 한국 평균치는 40인데 자동차완성사에서는 43으로 동료간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윤복근씨는 “정리해고 이후 동료들간의 경쟁이 심해지고, 같이 술 한잔 먹고 스트레스를 풀거나 의지할 동료가 없어지고 오직 경쟁만 판치고 있다”고 말했다. 또 2001년에 고긴장 집단은 30∼39살(24.4%)이 가장 많았는데 2004년에는 40∼49살(23.2%)이 가장 많았다. 50살 이상 노동자 중에서 고긴장 집단은 2001년 13%에서 지난해 18.2%로 늘었다. 나이 들수록 구조조정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를 더 심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건강 검진하듯 매년 조사해야
급증하고 있는 비정규직·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함께 저임금에 시달리면서 스트레스에 훨씬 더 노출되기 십상이다. 인제대 백병원 우종민 교수는 “상담해보면 비정규직은 더 괴롭고 정규직보다 스트레스를 70∼80% 더 많이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윤복근씨는 “물론 임금 격차도 서럽지만, 작업현장에서 비정규직들은 인간적으로 보이지 않는 벽을 엄청나게 느끼고 있다. 모욕감 같은 것인데, 비정규직들은 직영 노동자들과 함께 생산라인을 타지만 힘든 일은 다 자기들한테 떨어지고 회사가 어려워지면 자신들부터 해고당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고 말했다.
물론 회사에서 심하게 죄어도 스트레스에 끄떡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금방 떨어져나가는 사람도 있다. 또 ‘직무 스트레스’와 ‘생활 스트레스’를 딱 부러지게 선 긋기도 힘들고, 가볍고 적당한 스트레스는 상쾌한 자극이 되는 ‘좋은 스트레스’(Eustress)가 되기도 한다. 한국직무스트레스학회 박정선 회장은 “스트레스는 워낙 개인차가 커서 툴툴 털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같은 상황이라도 도저히 못 배겨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고통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직무 스트레스를 인정하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주 박사는 “일본에서는 과로사·돌연사가 늘어나면서 노동당국이 5년마다 노동자 건강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 우리도 곧 건강검진하듯 직무 스트레스를 조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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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을 전후로 한 ‘실업 스트레스’는 어떤 변화 과정을 보일까? 실업에 빠져들면서 겪는 심리적 변화는 ‘모면심리 → 불안·공포 → 분노·배신감 → 실직후 이완감 → 실업 지속에 따른 절망·자포자기’의 단계를 거친다. 좌절이 깊어지면서 분노는 점차 자기 자신을 향해 내면화한다. 그리고 자살로 이어진다. 경기침체기 초기에는 ‘우리 회사는 괜찮겠지. 설마 내가 잘리지는 않겠지’ 하는 모면심리가 강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어떻게 되겠지 하고 바라는 안주심리다. LG커뮤니카토피아연구소가 외환위기 직후 실직위기자·실직임박자·실직자 등 총 18명을 심층면접한 사례를 보자.
①실직위기자: “직장에서 눈치를 주는 것 같다. 그만두라는 말을 들으면 무척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그만두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다른 직장을 알아보고 나오려고 한다.”(여성·42살·광고대행업체) “가장 큰 스트레스원은 본인의 무능에 있다.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고 하지만 그대로 잘 살아남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왜 그런 대열에 끼지 못하는가에 대한 자책감이 크다.”(남성·34살·학원강사)
②실직임박자: 회사가 임금 삭감을 넘어 구조조정을 단행하면 언제든 자신이 감원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트레스가 급상승한다. 겉으로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불안심리를 안으로 삭이면서 우울증이 커진다. “곧 2차 감원계획이 발표될 텐데 1차 때는 사실 불안감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불안하다. 계속 감원이 이어질 것이므로 감원 대상이나 남은 사람이나 별 차이는 없다. 불안하지만 실직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는 돼 있다. 그래도 실직하면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 클 것 같다. 그동안 직장에 모든 생활을 투자했는데 허탈하고 열받을 것 같다.”(남성·38살·증권사) “추가 감원에 의한 실직이 임박한 것을 느낀다. 생산성은 떨어지고 몸은 피곤하다. 정리해고되면 자존심이 무지 상할 것 같고, 창피함으로 괴로울 것 같다.”(남성·37살·자동차회사)
③실직: 충격과 분노 속에 실직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불안·공포를 지나 막상 실직을 당하면 선정 결과나 해고 기준에 대한 불만으로 배신감과 분노가 커지고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실직을 자신의 책임이라기보다 국가·재벌·기업인·사용자들의 책임이라고 비난하면서 배신감이 더 커진다. “예전에 직장 일로 스트레스 받았던 것은 실직 스트레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애들에게 신경질도 많이 내고 두통도 심하고 가슴이 답답하다.”(시중은행에서 권고사직당한 기혼여성)
④실직장기화: 비슷한 처지의 불특정인들과 대화로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스트레스를 달랜다. 하지만 재취업 실패가 반복되면서 초조·불안해지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2차 좌절을 겪게 돼 스트레스가 급상승한다. 2차 좌절 때는 재기 불능에 대한 책임을 자신한테 돌리고 자포자기에 빠진다. “실직 초기에는 친구나 동료들과 자주 만났으나 자격지심으로 점차 기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등산에서 만난 사람들과 교류와 대화도 했다. 그러나 점차 시국 문제나 퇴직 회사에 대해 서로 한탄만 하게 돼 이제는 잘 만나지 않는다.”(호텔에서 권고사직당한 남성·5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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