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아직도 “유전되고 전염된다”는 편견에 갇힌 한센인들
4천여명이 모여 신나는 ‘전국 한센 가족의 날’</font>
▣ 소록도 글=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소록도는 전남 고흥반도 남쪽 끝에 자리한 넓이 4.42㎢의 섬이다. 뭍과 섬은 배로 고작 5분 거리지만, 둘을 잇는 것은 돈을 받고 사람을 건네주는 97t급 배 ‘도양호’와 국립소록도 병원에서 운영하는 ‘소록호’ 등을 합쳐 고작 3척뿐이다. 이곳에서 36년 동안 배를 몰았다는 도양호 선장은 “거리는 짧지만 물살이 세 헤엄쳐 건널 수는 없다”고 말했다. 소록도 사람들의 ‘천형’은 그들의 몸에 갑작스레 덮친 병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저만치’ 떨어져 있는 뭍의 모습이었다.
1970년대까지 병을 발견한 한센병 환자들이 섬에 입원하려면 경전선이 잠시 쉬어가는 벌교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곳에서 환자와 가족들은 “문둥이를 태울 수 없다”는 버스 기사와 실랑이를 벌이다 지쳐, 하루와 반나절을 꼬박 걸어 섬으로 향했다. 지금은 벌교에서 녹동항까지 넓직한 4차선 도로가 뚫렸지만, 그때만 해도 이 125리(50km) 길은 가도 가도 끝없는 붉은 황톳길이었다.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한하운의 절창 <전라도길>은 한여름 그 지옥 같던 남도의 황톳길 위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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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끊긴 체육대회 부활…엄청난 승부욕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중략)//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북 익산 금호농장에서 올라온 윤세창(62)씨는 소록도를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에게 소록도는 제2의 고향이자, 부정하고 싶은 과거였다. 5월17일. 일년에 딱 하루,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전국 한센 가족의 날’을 맞아 전국 89개 정착촌에서 내려온 한센 가족 4천여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녹동항에서 앞다퉈 내렸다. 그들의 모습에서 더 이상 옛 그림자를 찾긴 어려웠다.
윤씨는 “1966년 5월17일 소록도 병원 개원 50주년 행사 때, 선수 대표 선서를 했다”고 말했다. 벌써 39년 전이다. 지금은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 수가 703명에 불과하지만, 그때만 해도 4천명이 넘는 대식구였다. 4천명 가운데서 선택된 그는 소록도가 낳은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윤씨는 “광주에서 열린 43회 전국체전에 전라남도 축구대표로 나가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때는 축구, 배구, 족구, 가마니 들기, 텀블링, 자전거 타기 등 종목도 다양했죠. 50주년 기념이라고 헬리콥터가 공중에 떠 꽃가루를 뿌리기도 했는걸요. 이젠 소록도도, 저도 많이 변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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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인들의 자치모임인 ‘한빛복지협회’ 임두성 회장은 “한센인들에게 소록도 체육대회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섬 밖 사람들에게 갖은 모멸을 당해야 했던 한센인들은 체육대회 우승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사고도 많았다. 특히 소록도 7개 마을 가운데 하나인 신생리는 체육대회가 열리면 강한 승부욕을 발휘해 ‘오기 많다 신생리’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병원쪽에서도 한센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체육활동을 적극 장려했다.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인 조창원 전 소록도 병원장은 “원장으로 지내면서 가장 자랑스러웠을 때가 소록도 대표팀이 전라남도 축구대회에 나가 첫 골을 넣었을 때고, 제일 슬펐을 때가 역전골을 먹었을 때다”고 회고했다.
유전 안 되는 것 알면서도 강제 단종수술
그동안에는 소록도에서 병원 개원기념일인 5월17일을 맞춰 전국 89개 한센인 정착촌에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모아 해마다 체육대회를 열었지만 80주년 기념식 이후로 체육대회의 맥이 끊겼다. 이를 안타까워한 임 회장이 지난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전국 한센인의 날’이란 이름으로 체육대회를 부활시켰다.
경기에 참여한 선수들은 저마다 우승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다. 경기 일산 고운농장에서 올라온 김아무개(62)씨는 “이번 대회 우승을 위해 최강의 배구팀을 구성했다”며 “우승은 우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뭍 사람들은 ‘소록도 올림픽’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인간 승리’를 위해 애쓰는 장애인 올림픽 정도로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병으로 오른손을 제대로 못 쓰는 최광현(45) 한빛복지협회 과장은 왼손 리시브와 스파이크로 전북 남원 신생농원팀에 우승기를 안겼다. 이날 열린 종목은 배구, 족구, 가마니 오래 들기 등 3종목으로, 경기 수준은 여느 직장인 체육대회보다 높았다. 우홍선 한빛복지협회 본부장은 “한센인들의 경기 수준을 얕잡아 보는 것도 우리들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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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주년 대회가 열리던 1966년에서 지금까지 소록도는 얼마나 변했을까? 소록도 녹생리 이장 이남철(57)씨의 별명은 ‘소록도 지킴이’다. 그는 소록도 개원 50주년 행사가 열리기 하루 전인 1966년 5월16일 소록도에 처음 왔다. 그때 이씨는 열일곱살이었다. 그 뒤로 39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소록도를 오갔지만, 이씨만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물일곱 한창 나이에 결혼을 전제로 단종수술(정관수술)을 받았다”고 말했다. “수술을 안 하면 강제 퇴원인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어야지. 팍팍한 이곳 생활에 모아둔 돈도 없었고. 난들 수술을 받고 싶어서 받았겠나.” 한센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병원쪽이 모를 리 없었지만 단종수술 관행은 1980년대까지 계속됐다. 그 전에는 환자 지대와 직원 지대 사이에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고, 환자들과 배를 같이 탈 수 없다는 직원들의 주장으로 환자 전용 ‘제비선창’이 설치되기도 했다. 이 시설이 없어진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 두달 전인 1984년 3월이다. 그는 “우리를 죽이는 것은 병이 아닌 바깥 사람들의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의학적 병 아닌 사회적인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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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사정은 달라졌을까? 한센인들의 자치모임인 한빛복지협회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서치플러스에 맡긴 조사 결과를 보면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조사 대상인 일반인 700명 가운데 35.7%는 “한센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고, 34.3%는 “병이 유전된다”, 35.1%는 “전염성이 강하다”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모르겠다”고 응답한 사람까지 합치면 각각의 질문에 대해 절반 정도가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셈이다. 한빛복지협회는 “세 항목 모두에서 ‘그렇지 않다’고 정확하게 답한 이는 18.0%에 그쳤다”고 밝혔다. 한센병을 일으키는 ‘나균’은 ‘결핵균’과 비슷해 유전이 되지 않고, 리팜피신이라는 치료약 4알만 먹으면 전염력이 99% 사라진다. 지난해 1월 현재 등록된 한센인 수는 1만6801명이지만, 환자라고 부를 수 있는 활동성 환자는 3%인 518명뿐이다. 최규태 가톨릭대학교 한센병연구소장은 “한센병은 이제 의학적인 병이 아닌 사회적인 병”이라고 말했다.
한센인들의 마지막 바람은 사회의 편견 속에서 궁핍한 삶을 이어가는 한센인들의 생활비 보조와 정부와 사회가 그들을 상대로 벌인 인권 침해에 대한 피해 보상 규정을 담은 ‘한센인 특별법’(가칭) 제정이다. “이제 우리도 옛날처럼 당하고만 살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에 우리의 목소리를 정확히 전달해 예전과 같은 피해를 막아야죠.” 전북 익산에서 올라온 조아무개(69)씨가 말했다. 저마다 한 아름씩 사연을 간직한 한센인 4천명이 즐겁게 웃고 떠들며 타고 온 관광버스를 타고 89개 정착촌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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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는 만행을 증언한다</font>
소록도와 한센인들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1916년이다. 1910년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전국 곳곳을 배회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한곳에 묶어 강제 수용할 방침을 정하고, 대상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국립소록도병원이 1996년 펴낸 <사진으로 보는 소록도 80년>을 보면 “날씨가 좋고 직원 지대와 환자 지대를 나누기 쉬운 소록도가 병원 터로 뽑혔다”고 적혀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용 시설이 1916년 5월17일 문을 연 ‘도립 소록도 자혜병원’이다. 이때 강제 송치된 환자 100여명과 함께 89년에 걸친 한센인들과 소록도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됐다.
해방 이후 60년 동안 개발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뭍과 달리 섬에는 일제 시대 잔재들이 온전히 보존돼 있다. 문화재청이 근대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2001년 만든 ‘등록문화재’ 제도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된 소록도 건물은 신사·감금실·식량창고 등을 포함해 모두 10개다. 소록도 병원이 1996년 펴낸 <소록도 80년사>를 보면 “일제가 1938년 태평양 전쟁 이후 환자들을 동원해 해마다 6천kg의 송진, 3만포의 숯, 30만장의 가마니와 1500장의 토끼 가죽을 생산했다”고 적혀 있다(표 참조).
이 가운데 신사는 1935년 5월28일 소록도 병원의 4대 병원장이었던 수호 마사토가 일본의 천조대신 아마테라스오오카미에게 참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소록도에 신사는 2곳이 있었는데, 환자 지대에 있는 신사는 해방 이후 환자들이 불태웠고, 직원 지대에 있는 신사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일제는 전국에 1천개가 넘는 신사를 만들었지만, 소재가 파악되는 것은 소록도를 포함해 3개뿐이다.
한빛복지협회는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시민공모 중인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행사에 소록도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들의 자료를 모아 일제가 한센인들에게 행했던 만행을 고발하는 자료로 활용하도록 제안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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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95%가 특별법에 공감”</font>
도쿄 재판소에는 한국 한센인 117명 피해배상 소송 제기
임두성(57) 한빛복지협회장의 인생 역정은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하다. 전남 해남 섬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열일곱살에 소록도에 보내져, 2년 만에 섬을 탈출했다. 이후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한센인이라는 사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서울역과 영등포 등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폭’ 세계에 몸을 담기도 했다. 그렇지만 곧 손을 씻고 한센인 정착촌에 뿌리를 내려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무사히 길러냈다. 그는 ‘한센인임을 더 이상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으로 다른 한센인들을 설득해가며 한센인 특별법 제정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중이다. 그의 둘째딸은 아버지가 한센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파혼’ 위기를 겪기도 했다.
<font color="663300">한센인 특별법에 담기는 내용은.</font>
극빈 한센인들을 위한 생활지원과 과거 국가가 저지르거나 방조한 한센인을 대상으로 한 인권 유린에 대한 배상이다. 특히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 △오마도 간척사업 △비토섬 학살 사건 등은 그 실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상 조사가 필요하다.
<font color="663300">한센인 격리는 일제 유산인데, 일본쪽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나.</font>
1998년 한센인 요양소 일본인 입소자 12명이 일본 구마모토 지방재판소에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2001년 5월11일 환자들의 손을 들어줘 한 사람당 800만~1400만엔씩을 지급했다. 한국 한센인들도 이에 자극받아 1945년 이전에 소록도 병원에 강제 입원한 117명을 모아 일본 도쿄 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을 기다리는 와중에 6명이 죽었다. 9월께 선고가 예정돼 있다. 무관심한 한국 정부와 달리 일본쪽 변호사들의 도움으로 소송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다.
<font color="663300">법 제정에 대한 전망은.</font>
낙관적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동안 한센인들이 받아온 피해를 공감하는 분위기다. 설문조사 결과 국민의 95% 이상이 특별법 제정에 공감을 표시했다. 내년이 소록도 병원 개원 90주년인데, 여러모로 도움을 준 재일동포 한센인들을 초청해 위문공연을 갖고 싶다. 현재 한센인들은 “한국 유명 가수들의 위문 공연을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한다.</font></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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