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영화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 데뷔한 은혜양… 함바집 아줌마와의 우정과 부당한 일상 씩씩하게 연기
▣ 글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만화가 엄마와 씩씩하게 살아가는 다운증후군 소녀 은혜(15)가 영화배우가 됐다. 4월30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는 옴니버스 인권영화 <다섯개의 시선> 가운데 한편인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의 주인공이다. 박경희 감독이 각본·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서 은혜는 학교 친구들에게 ‘뚱보메기’라고 놀림받고, 동네 함바집 아줌마에게 정을 붙여 쫓아다니고, 가상의 친구를 만들어서 대화하고, 식당에 가면 “왜 저런 애를 밖으로 내돌리냐”며 쑤근대는 소리를 듣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다.
박경희 감독, 아줌마 원피스 입은 아이에 꽂혀
지난해 여름 은혜를 처음 만난 날 박 감독은 은혜가 발산하는 카리스마에 놀랐다고 한다.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길 원하는 무대기질과 답답하고 수틀리면 쏟아내는 터프한 태도 말이다. 1천명 가운데 1명꼴로 태어난다지만 박 감독은 ‘다운아’를 겪어본 일이 없었다. 대부분 집 안이나 시설에 꽁꽁 감춰져 지내기 때문이다. 은혜를 만났을 때 박 감독은 딱히 은혜를 내세워 영화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은혜는 그날 생뚱맞게도 아줌마들이 집에서 입는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은혜가 좋아하는 함바집 아줌마가 벗어두고 간 옷이었다. 아줌마가 그리워 냄새를 맡다가 아예 입고 있었던 것이다. 밥 먹고 차 마시는 자리에서 은혜는 대화에 끼지 못하는 걸 답답해하다가 귀신 얘기를 해주겠다며 시선을 모았다. 이야기가 지루해지고 사람들의 호응이 없자, 이번엔 가상의 친구를 상대로 혼잣말을 시작했다. 은혜에게는 이지영, 백지영, 김하늘, 곽언니 등의 상상 속 친구들이 있다. 그러다 은혜는 문득 “어떤 애가 있는데요, 나쁜 애가 아니거든요?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유독 은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일행 중 한명에게 하는 말이었다. ‘어떤 애’는 은혜 자신이고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는 ‘나의 표현 미숙과 다름을 받아들여달라’는 호소였다. 그 말은 그대로 박 감독의 가슴에 와서 꽂혔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됐다.
박 감독은 열흘 넘도록 은혜를 따라다니며 관찰했다. 학교에 가서 몰래 창밖에서 수업받는 모습을 봤다. 길을 걸으며 혼잣말하는 것도 엿들었다. 여름 캠프에서 홀로 숙소에 방치되는 모습도 봤다.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에 “내내내 앞에서 자자장애인 얘기 그그그만 하세욧!”라고 항변하는 것도 들었다. 그 과정에서 박 감독은 은혜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장담하진 못하지만, 은혜가 받는 부당한 대접에는 은혜 못지않게 억울해하고 분노하게 됐다. 그러고 나니 은혜의 소소한 태도와 습관의 맥락이 잡혔다.
시나리오는 은혜의 생활 동선에서 ‘엑기스’를 뽑아내 썼다. 은혜가 평소 쓰는 말과 실제 경험을 살렸다. 하지만 비장애인의 처지에서 장애인의 얘기를 ‘목소리 높이지 않고’ 온전히 그려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분노를 거르고 누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더 큰 걱정이 있었다. 과연 은혜가 대본을 외울 수 있을까. ‘두 여자’의 믿음이 일을 밀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됐다. 은혜 엄마 장차현실씨의 “은혜는 할 수 있을 거다”란 말, 그리고 은혜 본인의 “하고 싶다”는 말. 은혜가 사는 집과 경기 양평 청계리 마을은 그대로 영화의 배경이 됐다. 은혜가 좋아하는 함바집 ‘이쁜이 아줌마’ 신인숙씨는 남편과 함께 영화에 등장했고, 학교 장면은 동네 대아초등학교에서 그 학교 학생들과 함께 찍었다. 장차현실씨 역은 배우 서주희씨가 맡았다. 서씨는 장차현실씨보다 훨씬 더 ‘장차현실스럽다’는 평을 들었다. 은혜는 대본을 완벽하게 소화했고 거듭되는 촬영에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은혜와 박 감독이 서로 깊이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 감독은 영화를 끝낸 뒤 아예 은혜네 집 강 건너편에 땅을 구해 집을 지었다. 박 감독은 “은혜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은혜는 박 감독을 두고 “우리 사귀어요”라고 말했다. 4월21일 인터뷰 중에도 박 감독을 쓰다듬고 볼에 입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취재진을 향해 은혜는 이렇게 말했다. “부럽죠? 원래 여배우랑 감독은 친한 거예요.”
“자자장애인 얘기 그그그만 하세욧!”
5년 전 <한겨레21>(311호)에서 독신모 엄마와 지지고 볶으며 사는 사연 ‘낙원을 가꾸는 모녀의 기쁨’이 소개될 때만 해도 ‘어린이’였던 은혜는 이제 가슴이 봉긋해진 ‘소녀’가 됐다. 그사이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은혜는 통합교육을 한다는 일반학교를 세 군데 넘게 전전하다 대안학교로 옮겨 6학년 과정에 다니고 있다. 가족도 불었다. 엄마의 남자친구는 ‘아빠’가 됐고 다음달이면 동생 ‘똘이’도 세상에 나온다. 지난해 영화 촬영 때만 해도 엄마의 남자친구였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서동일(34)씨는 은혜에겐 계속 오빠였다. 동생이 생긴 뒤에도 은혜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빠라고 부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이랬다. “응, 오빠가 그동안 다 커서.”
은혜는 5월 초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본선 경쟁작으로 출품된 다큐멘터리 <핑크 팰리스>(서동일 감독)에도 등장한다. 장애인의 성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서 은혜는 ‘섹시한 춤솜씨’와 ‘밝히는 태도’를 솔직하게 커밍아웃한다.
2003년 <여섯개의 시선>에 이은 국가인권위원회의 인권영화 기획 두 번째인 <다섯개의 시선>은 일반 상영도 할 예정이다. 박 감독의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와 함께 남자들의 ‘갇힌 세계’를 꼬집은 <남자니까 아시잖아요?>(류승완 감독), 탈북 청소년들의 삶을 그린 <배낭을 맨 소년>(정지우 감독), 고문수사관을 통해 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기발하게 까발린 <고마운 사람>(장진 감독),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얼어죽은 중국동포의 상황을 1인칭으로 따라간 <종로, 겨울>(김동원 감독)이 올해의 ‘시선’이다. 인권 애니메이션 영화 묶음 <별별 이야기>(이성강·권오성·박재동·유진희·이애림·박윤경 감독 외)도 5월1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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