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한인사회를 기록했던 행동주의 작가 박경주씨,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 추진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시각예술가 박경주씨의 작업실은 따로 없다. 그가 머무는 곳은 예술 행위의 공간이 되고, 만나는 사람은 예술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일과는 주로 사람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 다시 그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까지 적게는 몇개월이 많게는 몇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이주’라는 틀로 묶을 수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문화행동’ 속에서 이뤄진다. “삶의 현장에 다가서지 않는 예술가의 창작 행위는 허구”라는 말을 기억하며 “직접 부닥쳐 얻은 경험”만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일궈나가고 있다.
유고 침공 목격… 국경과 경계를 고민하다
아무리 박씨의 일상을 좇더라도 예술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는 문화 활동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 탁월한 재주를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으로 ‘차이’를 뛰어넘고 ‘구별’을 해소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예술과 비예술, 일상의 경계가 옅어지는 작품이 탄생한다. 알게 모르게 그의 예술가적 상상력이 곳곳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문화운동 구실을 하는 행동주의 미학이라 하겠지요. 그것은 사회적 금기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예술로 세상을 바라보며 바꿔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지난 4월13일 오전 박씨는 서울시 영등포구 청과물시장 주변에 있는 한국노동네트워크(노동넷·www.nodong.net) 사무실을 찾았다. 노동넷이 스트리밍 서버 운영을 지원하는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www.migrantsinkorea.net)의 개국을 준비하는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여름 대안매체에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기고하는 전민성씨를 만나 ‘열린 채널’을 만들기로 뜻을 모았다. 방송국 개국(5월18일)이 한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채널의 주요 메뉴를 확정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하지만 75개국에서 들어온 45만여명의 이주노동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프로그램을 구성하기엔 모자란 게 많다. 당장 각국의 언어로 방송을 하려고 해도 시간을 할애할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금으로선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모르는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 하지만 머지않아 대구 성서공단에서 준비하는 FM라디오 방송과 함께 이주노동자의 벗이 될 게 틀림없다. 여기엔 박씨가 이주노동자와 함께한 6년여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애당초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지난 1993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영화와 사진, 순수 미술 등을 전공했다.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이 유별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9년 유럽연합군이 유고를 침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경’과 ‘경계’ 곁에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역시 대학을 마친 뒤라 이주노동자에 관한 것은 남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 사회는 이주노동자의 역사가 오래됐지만 법률적 한계가 많았어요. 무엇을 하나 하려 해도 헌법을 바꿔야만 해결되는 상황이었죠. 이때부터 이국 땅에서 ‘섬’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베를린 한인들의 삶을 알게 됐어요.” 곧바로 박씨는 베를린 한인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내면에 깊숙이 새겨진 ‘슬픔’을 그만의 방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한인회 송년회 모습을 렌즈에 담아 사진 연작으로 보여줬고, 독일에서 가져온 석탄으로 전시장 바닥을 채운 파독 광부에 관한 오브제 설치 작품 <독일의 기억>을 ‘젊은 모색’전에 선보이기도 했다.
선거 유세 퍼포먼스 ‘이주노동자를 국회로’
그리고 2001년 3월 9년 동안의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한 박씨는 잠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독일에서 ‘이방인’으로 느꼈던 이주와 국경의 문제를 자국에서 ‘내국인’으로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작은 혼란을 ‘수습’하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자원활동을 시작했다. 곧바로 ‘이주노동자 뮤직 프로젝트’를 기획해 문화행동의 돌파구를 찾았다. 처음에는 이주노동자의 삶을 표현할 영상작품에 사용할 배경음악을 찾으려는 정도로 출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밴드가 여럿 있었는데 모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존 곡을 부르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버마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 ‘유레카’의 음반을 내는 작업을 했어요.”
국내 최초의 이주노동자 밴드 음반 ‘왓 이즈 라이프’는 1년6개월의 산고 끝에 2002년 12월에 모습을 드러냈다. 노래의 작곡은 한국인이 맡았지만, 가사는 모두 이주노동자들이 쓴 것이었다. 당시 발표한 “매일 같은 일 작은 공간 새로운 것이 뭔지 모르겠어/ 힘들고 지칠 때 나를 기다리는 건 어두운 작은 방 형광등뿐…’(덤벌 수바 작사, 김종관 작곡)이라는 노랫말의 <장애>는 지금껏 불리고 있다. 이때 발매된 2천개의 CD는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지만 국내 이주노동자 역사에 의미있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전까지 이주노동자의 인권에만 초점을 맞추던 언론이나 시민단체의 관심이 이주노동자의 문화에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박씨의 행동주의적 예술활동은 정치 영역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초까지 ‘이주노동자를 국회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선거 유세 퍼포먼스를 실시했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여성과 노동, 농민, 장애인 등 소수자들이 비례대표로 선거 벽보에 오르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이주노동자 비례대표가 탄생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을 예술 프로젝트로 마련한 것이었다. 퍼포먼스는 안양에서 시작해 대구와 대전, 창원, 광주 등지로 이어졌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정치 성향을 보여줬지만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으로 낯설게 여기던 이주노동자들을 주변의 존재로 느끼는 듯했다.”
앞으로 박씨는 작가의 삶을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에 3년 동안 온전히 맡길 작정이다. 거기엔 웹사이트 구축(이용근·양아치·김연오·이승아), 아트디렉터(문승영), 구성작가(윤혜숙) 등도 힘을 보탠다. 최근에는 이주노동자들이 현장 기자로 속속 합류해 인터넷 방송국 ‘접수’를 예약하고 있다. 예컨대 국내에서 블랙코미디 단편 영화 <복수의 길>을 찍고 있는 마붑(방글라데시)은 영상 리포터로, 민중가수 박향미씨의 매니저를 맡고 있는 민수(네팔)는 월드뮤직 DJ로 나서려고 한다. 민수는 “당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는 힘들지만,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한다.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채팅룸’을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소통, 블로그를 중심으로
여전히 강제 추방을 두려워하며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적지 않다. 지금 대한민국의 1%를 차지하는 이주노동자 수는 갈수록 늘어날 것이다.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은 이들에 대한 낯섦을 해소하는 유력한 창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열린 채널을 표방하며 자유로운 소통이 가능하도록 블로그 중심으로 방송국을 운영하려는 데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미디어 정치를 꿈꾸는 행동주의 작가 박경주씨의 예술 세계는 이주노동자를 내세운 영화로도 확장될 예정이다. “인터넷 방송국이라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은 저와 준비하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에요.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며 우리의 것을 풍요롭게 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몫이 돼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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