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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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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가 살려낸 거북선

등록 2005-02-17 00:00 수정 2020-05-03 04:24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김정진씨, 특출한 ‘손재주’를 바탕으로 구국의 전함을 복원하다

▣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은 미술사의 부록에 해당하는 장르쯤으로 인식된다. 여기에 작가들마저 마이너 미술 형식으로 설명을 보충하는 도해, 글에 종속된 삽화 등의 작업을 한다는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출판물의 시각적 주목도를 높이려는 ‘장치’로서 소모품 신세를 면치 못한다. 차라리 그림책 작가라면 비어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처럼 탄생 100년 뒤에 생일상을 받는 것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색깔’의 작가들이 그림책에만 몰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저마다의 색깔로 문화사의 틈새를 메우며 독립적인 예술 형식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10대 시절부터 놀라운 상상력 발휘

얼마 전 ‘신화에서 역사로’라는 부제가 달린 <거북선>을 펴낸 일러스트레이션 작가 김정진(42)씨. 그는 1988년 한불카툰공모전 입상을 시작으로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일러스트레이션 공모전(1989), 스포츠신문 카툰대회(1991·1992) 등 다양한 국내외 공모전에서 주요 상을 휩쓸었다. 여러 차례 그룹전이나 개인전 등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미술 형식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화두’를 부여잡았던 그는 리얼리즘 미학의 모델로 일러스트레이션을 지향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 신문·잡지의 ‘비주얼’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일간지에 몸담아 저널 일러스트레이션의 전형을 보여줬다.

당시 일간지나 시사주간지 등지에 등장한 김정진씨의 작품은 정밀한 그림으로 정평이 났다. 세필을 이용해 정치사회적 상황에 웃음을 남아내고, 인물 카툰에 시대적 통찰을 새겼기 때문이다. 만일 김정진씨가 ‘손그림’에만 특출난 재주가 있었다면 전문 일러스트레이션 작가로 ‘독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거북선 복원’도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월급쟁이 작가 생활을 마감한 것은 순전히 ‘손재주’ 덕분이었다. 그림을 그리던 손으로 사진이나 동영상 등의 시각물을 매만지면 순식간에 ‘작품’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장난 삼아 손재주를 부렸는데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독립 작가로 나섰다.

김정진씨의 재주가 손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10대 시절에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상상력을 인정받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고 있었다. “서울 상계동에 우리 가족이 살 단독주택을 짓기로 했는데, 3층 집을 짓는다는데 1층에서도 하늘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상상으로나 가능한 허무맹랑한 생각으로 여길 법한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꿈을 그대로 지어올렸다. “거실을 3층까지 뚫고 각층은 다락방식으로 얹어 조그만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특이한 집으로 소문나 부동산업자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상상이 현실이 되었던 놀라운 체험은 공업계 고교 진학으로 이어졌다. 생각하는 것을 만들고 싶었기에 전공으로 기계과를 선택했다. 이때 상상력에 과학으로 윤기를 입히며 웬만한 기계는 익힐 수 있었다. 그것이 거북선 복원 과정에서 당시 조선술의 역학적 원리를 파악해 돛의 위치를 잡는 등의 작업에 도움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에 군대 시절의 경험까지 거북선 복원에 쓰였다. 그는 1980년대 중반 군부대에서 화포 수리병으로 지냈다. 임진왜란 때 사용한 불랑기나 비격진천뢰 등의 무기들이 실감나게 묘사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다양한 경험이 신화의 비밀을 푸는 데 기여한 셈이다.

역사 자료를 찾아 헤매던 날들

사실 우리에게 거북선은 익숙하다. 박정희 시대의 전통 복원 과정에서 이순신 장군이 역사에서 깨어나면서 거북선은 다양한 형태로 복원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거북선의 제원이나 설계 방법 등에 관한 실체는 오리무중이다. 그동안 거북선의 내부에 대해서도 2층이냐 3층이냐를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심지어 거북선이 철갑선이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돛의 위치에 대해서도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장만 내세우기에 학자 수만큼 가설이 있는 듯하다. 육중한 돛의 구조만 해도 기록을 제대로 살펴보면 형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국내에서 거북선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놀랍게도 연세대학교를 설립한 언더우드 가문의 원한경 박사였다. 그는 70여년 전에 거북선 선체 삼판에 노 구멍을 뚫고 서양식 노를 젖는 방식의 거북선 복원도를 제시했다. 흔히 보는 거북선 모형은 대게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 조선사의 개척자로 꼽히는 고 김재근 박사(전 서울대 조선공학과 교수)는 상장과 선체 사이에 조선식 노를 걸어 노역을 했다며 노와 포가 한 층에 있는 2층 구조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남천우 박사(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와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 장학근 박사 등은 순간의 기동력을 위해 노와 포가 다른 층에 있는 3층 구조설을 제시했다.

이같은 거북선의 외형에 관한 논란 속에서 김정진씨는 400여년 전에 활약한 구국의 전함 속으로 들어갔다. 청소년 시절부터 머리 속에서 떠올린 거북선의 안과 밖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지난해 9월의 일이다. 마침 19세기 중반 일본 니가타현 부근의 성벽을 허물 때 발견된 거북선 관련 그림이 미국에서 공개돼 상세 이미지를 떠올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 당시 화려한 색채와 일본식 깃발 등으로 인해 거북선 진위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는 그림이 비록 조선의 화풍은 아니었지만 거북선의 실체에 근접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일본인이 조선의 거북선에 대한 질투심으로 일본식으로 그렸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오랜 기간 상상력으로 거북선을 떠올렸어도 그림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구체적인 역사 자료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거북선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녀야 했다. 거북선 전문 연구자가 아니기에 관련 기관의 자료 협조가 원활하게 이뤄질 리 없었다. 재야 연구자일 뿐이기에 디지털 카메라 셔터를 한번 누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때로는 조선조 판옥선을 토대로 진화를 거듭한 거북선의 내부를 복원해도 상상력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럴수록 하루에 18시간 안팎을 거북선에 매달려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증 어려운 부분은 예술적 상상력으로

그야말로 과학적 상상력의 집대성으로 거북선 복원이 이뤄졌다. 거북선의 공격력은 어디에서 나왔으며(무기와 노·돛 구조 등), 100명 이상의 생활 공간으로서 거북선에는 무엇이 필요하며(방과 화장실·조리실 등), 돌격선으로서 무적 신화를 어떻게 이루었는지(도깨비머리, 등 구조 등) 등에 대해 하나씩 베일을 벗겨나간 결과였다. 주위 사람들을 만나면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화장실은 두곳으로 정했는데 병사 수를 생각하면 네곳쯤 됐을 것이라 제안해서 이를 반영했다. 그가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복원한 거북선은 지금으로선 검증이 불가능하다. 누구도 거북선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았고 관련 사료도 없기 때문이다.

“이제 문화재 복원의 시작일 뿐이다. 세계인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말하면서 보여줄 게 없는 게 안타까웠다.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역사를 복원하고 싶다. 역사적 문화재들은 창조적 유물로서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역사 복원자로 변신한 김정진씨는 거북선에 이어 조선 과학의 백미 자격루(물시계)와 조선 신무기의 진수 ‘쇠뇌’ 등을 실감나는 그림으로 복원하려고 한다. 아쉬운 것은 나홀로 복원이기에 시기를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에 대해 거북선 연구가인 순천향대학교 손풍상 부총장은 “학문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메웠다.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업이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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