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티베트의 몸부림, 600km!

등록 2005-01-06 00:00 수정 2020-05-03 04:23

잠양과 빼마는 왜 겨울 찬바람을 뚫고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임진각까지 걸었을까

▣ 천안·임진각=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걸은 게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들을 향한 연대의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거창하게 무엇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한국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겨울 찬바람을 뚫고 전남 해남의 땅끝마을에서 임진각까지 600km를 걸어온 티베트 남자 텐진 잠양(28)은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유의 다리 철조망 너머로 당장에라도 넘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더 이상 걸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2004년 12월10일부터 시작된 잠양과 한국인 아내 빼마(27·한국이름 남현주)의 남한 국토종단 대장정은 티베트 국기를 철조망에 꽂는 것으로 19일 만에 막을 내렸다.

지난 12월24일 충남 천안 부근에서 잠양과 빼마를 처음 만났다. 이들이 걸어온 1번 국도에는 속도감을 만끽하는 차량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처음 이틀을 동행한 잠양의 친구가 떠난 뒤 두 사람은 천안까지 외로운 행군을 계속했다. 전날 잠양의 생일을 맞아 두 사람의 벗들이 찾아와 대열이 여섯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두 사람은 잠양의 한국인 친구였다. 잠양은 히말라야 트레킹의 고수였다. 열여섯 나이에 트레킹 포터로 시작해 헬퍼, 가이드로 성장하면서 한국인 여행객을 안내한 인연으로 만난 친구들이 두 사람의 대장정에 일시 합류한 것이었다.

트레킹 가이드로 일하며 한국과 인연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버스로 12시간을 북서쪽으로 올라간 히말라야 산속의 다람살라(매클레오드 간즈)의 청년 잠양.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가 들어선 다람살라는 ‘자유 티베트’를 꿈꾸는 사람들의 안식처다. 그는 티베트 귀족 ‘펜젠창’ 가문의 후손이지만 10대 중반부터 일터에 나가야 했다. 중국군에 의해 부모와 누이, 형제들이 총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아버지는 가까스로 감옥을 빠져나온 뒤 탈출 대열에 합류해 다람살라에 정착했다. 지금이야 여행자의 발길을 붙드는 다람살라이지만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고립지였다. 그곳에서 잠양은 뇌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어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함께 가족을 부양했다.

어쩌면 청소년 시절의 노동이 잠양의 한반도 남쪽 종단 기행에 나서게 했는지도 모른다. 히말라야 트레킹 가이드로 일하면서 한국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그만두고 인도로 유학을 떠난 빼마는 잠양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마음의 거처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10대 중반에 마약에 빠져 주삿바늘을 꽂을 자리도 없던 잠양은 달라이 라마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빼마와 사랑을 키우면서 여럿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국내에서 수녀를 꿈꾸던 빼마 역시 노인과 장애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희망이 닮았다고 느낀 티베트 총각과 한국 처녀는 미래를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은 2002년 4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잠양은 1년8개월 동안 이주노동자로 지냈다. 가구공장에서는 상사의 차별에 맞서다 잘리고, 정비소에서는 손님의 푸대접을 못 견뎌 관두고, 홍익대 앞 노점은 한국인 동료의 ‘배신’으로 자리를 내줘야 했다. 3개월 만에 웬만한 대화를 할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탁월해 일자리를 얼마든지 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티베트 사람들을 생각하면 혼자만의 삶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결국 2003년 겨울 다람살라로 돌아가 카페 ‘리’를 지어서 관광객들에게 차와 한국 음식을 팔고 있다. 카페 리는 나라를 잃고 인도로 넘어온 망명 1세대 노인들을 위한 공동체와 맞벌이 부부의 아기들을 위한 탁아소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점심을 굶으며 하루 9시간을 걷다

이렇게 다람살라에서 티베트의 미래를 준비하는 잠양과 빼마가 카페 리의 문을 닫고 한반도 남쪽 땅을 걸었다. 그것도 비행기삯과 경비로 전재산을 ‘올인’하면서. 다람살라의 티베트인 단체에서 조직적으로 파견한 것도 아니다. ‘자유 티베트’라는 구호를 가슴에 새기고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초청을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내세워 거부하고 있다. 그렇게 한국 사회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티베트의 현실을 유인물 한장에 담아서라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해마다 수천명의 티베트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찾아 히말라야를 넘습니다. 더러는 동상에 걸려 죽기도 하는데 끊임없이 탈출하려는 이유를 생각해달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루에 8, 9시간을 걸으면서도 점심은 먹지 않았다. 하루에 최소한 30km를 기본으로 걸으려면 시간이 빠듯하기도 했고 대충 빵으로 때우면 밥값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번 국도 주변에 찜질방이라도 있으면 숙박비를 줄일 수 있기에 쾌재를 불렀다. 애당초 민가에 신세를 질 생각은 없었다는 잠양이 “여름이면 몰라도 한겨울엔 장소를 내주며 난방도 해줘야 할 텐데 부담이 되잖아요”라고 말하자 빼마는 아쉬운 순간을 떠올린 듯 “천안 아래쪽의 주유소에 있는 분이 잠자리를 제공해주겠다고 했는데 천안에서 일행을 만나야 했어요”라고 거든다. 한달 예정으로 100만원을 준비했다. 다행히 일정이 당겨지면서 ‘여윳돈’을 지니게 됐다.

처음 며칠은 자동차에서 내뿜는 매연에 혼쭐이 나기도 했다. 다리보다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줄곧 영하의 날씨가 지속됐지만 추위를 느끼지도 않았다. 두툼한 외투와 방한모와 장갑 등으로 온몸을 가렸어도 파고드는 찬바람은 설산을 넘는 티베트 사람들을 생각하면 산들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히말라야 산길을 하루에 25km 안팎 걸었던 잠양도 아스팔트 길에는 익숙지 않았지만 앞에서 발바닥 물집에도 힘들어하는 기색 한번 보이지 않는 빼마를 생각하면 통증이 이내 사라졌다. 더구나 한나절을 꼬박 보낸 독립기념관에서 티베트의 미래를 발견하지 않았던가. “언젠가는 티베트도 자유의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임진각을 향하는 길에 들어섰을 때 군부대가 눈에 들어오자 잠양은 “미움은 미움을 부르잖아요. 나는 중국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미워하면 그들도 나를 미워하잖아요”라며 미움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티베트 독립’을 내세우지 않는 달라이 라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가 나를 거짓말쟁이, 승려의 옷을 걸친 늑대, 분리주의자라고 욕하지만 그들의 욕은 전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중국 정부가 나를 욕하라 하면 욕하고, 사진에 침을 뱉으라 하면 침을 뱉으십시오”라는 말로 티베트인들에게 ‘자비’를 호소했다.

“나는 중국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했던가. 임진각에서 잠양과 빼마가 친구들과 함께 국토 종단의 기쁨을 만끽하는 동안 고양시 관산동에서는 장인 남시열(56)씨가 약속한 ‘삼겹살 파티’가 준비돼 있었다. 그런데 장모 오옥선(49)씨가 축하 케이크에 등심과 꽃게탕까지 더해 잔칫상을 차렸던 것이다. 잠양은 얼굴 한번 보지 않고도 딸을 믿고 사위로 삼아준 빼마의 부모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더구나 장애인 단체를 초대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올린 것을 생각하면 잠양에게 처가댁은 삶의 배움터였다. 이제 잠양과 빼마는 한국의 1번 국도에서 느낀 것들을 다람살라에서 자유 티베트 커뮤니티 ‘록빠’(www.rogpa.com)에 넉넉하게 풀어놓으려고 한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