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역사가 점묘화로 그려진다면,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삶은 작은 점일 것이다. 그 자잘한 점들이 모일 때 역사는 비로소 포효하는 파도, 바람에 선들거리는 초원, 소리 없이 흘러가는 강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소설가 이경자(56)씨는 최근 이런 점묘화를 그리는 경험을 했다. 공공문화센터 유알아트센터가 기획한 ‘노인이라는 현자들의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진행자’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시민여성사’라는 부제를 단 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50대 이상의 평범한 여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무명에 붉은 색깔의 소목염색을 직접 들인 뒤 이를 바느질하고 수를 놓아 국화향주머니를 만든다. 마지막엔 자신을 그림과 글로 표현하는 시화 작품을 완성한다. 이처럼 일감을 쥐고 부지런히 손을 놀리면서 한편으론 이경자씨가 두런두런 건네는 이야기를 실마리 삼아 자신의 역사를 풀어내는 것이다.
“첫날은 가슴이 울렁거렸어요. 딸이라고 학교를 안 보내 공부가 평생 한이 된 할머니,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나 설움당한 일, 애 못 낳는다고 구박당한 이야기. 차츰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껍질이 깨어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저는 그분들의 삶의 동굴을 들여다본 느낌이었지요.” 하루 3시간씩 두 차례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가자들은 인상적인 시화 작품들을 남겼다. 회색빛으로 탄생했던 자신이 점점 밝은 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그리거나 아내·며느리·딸 등 여러 역할이 그려진 물방울 밑에 자신의 참모습을 새겨놓기도 했다. 이경자씨는 이번에 ‘시민 현자’들로부터 두 가지를 배웠다고 했다. 하나는 학력·외모·지위에 관계없이 모든 여자들은 ‘같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래서 겸손해져야겠다는 것이다. 이번 경험은 이경자씨의 신간(()에 ‘붉은 물의 샘을 가진 사람이야기’라는 에세이로 기록돼 있다. 참가자들의 시화 작품은 양성평등을 위한 문화 프로그램 ‘징검다리’의 참가작들과 함께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여성사전시관에서 선보인다. 2006년 2월27일까지. 02-824-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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