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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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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영민] ‘인공생명체’ 만드는 상상놀이

등록 2004-08-13 00:00 수정 2020-05-03 04:23

뇌성마비 IT 연구자 지영민씨의 야심찬 꿈… 생각하는 기계 ‘에코나스’ 개발 향해 장기 프로젝트 박차 가해

▣ 울산= 글 · 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울산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30여km 떨어진 간절곶(艮絶串) 아래의 조그만 어촌마을에 지영민(33)씨가 살고 있다. 잠시 대문 밖으로 나가면 바다 냄새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겐 바다를 보는 것조차 간단한 일이 아니다. 겨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바다를 느낄 뿐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엔 혼자 힘으로 1m만 이동하려 해도 굵은 땀방울이 얼굴에 맺히고 속옷엔 물기가 가득해진다. 그는 선천성 뇌성마비로 33년을 지냈다. 영일만의 호미곶보다 1분가량 일찍 해가 뜨는 간절곶을 곁에 두고도 해돋이의 장관을 맘껏 즐기지 못했다. 대신 끊임없이 ‘상상놀이’를 하면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연구 · 교육 등으로 어촌마을 경계 넘어

그를 만나기 위해 울산으로 내려가기 직전, 인스턴트 메신저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있는 곳까지 가는 길 안내를 받았다. 그가 타이핑하는 속도는 그다지 느리지 않았다. 충분히 원하는 내용을 곧바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해질 녘 울주군 서생면에서 만난 그는 생각보다 훨씬 불편해 보였다. 두 발과 한 손은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오른손 하나로 세상과 접속하고 있었다. 한달 정도는 꼬박 누워 지낸 뒤에야 오른손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내 오른손이 강직돼 휴식을 취해야만 한다. 그를 만났을 때는 오른손도 ‘제어’가 힘들어 악수조차 나누지 못했다.

현재 내로라 하는 컴퓨터 전문가로 ‘인공생명체’를 연구한다는 누군가의 ‘귀띔’을 의심하기도 했다. 도무지 혼자 힘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있는 ‘하얀새 소프트웨어 연구모임’ 홈페이지(www.hayansae.com)에서 그의 모습을 언뜻 봤지만 그렇게 불편한 몸일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그는 숨어 있는 ‘고수’가 아니었다. 미래 사회가 원하는 최정예 인재들을 발굴하고 훈련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10여년 동안의 연구활동을 토대로 100년 앞을 내다보며 추진한다는 ‘숙묵미래정보재단’을 만들었다. 이는 낯가림이 심한 괴팍한 성격의 장애인이 치기 어린 만용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믿거나 말거나’쯤으로 여겨질 100년 프로젝트. 그는 이미 프로젝트의 얼개를 짜놓은 상태다. 그것은 하얀새 연구그룹을 10여년 동안 일구는 과정에서 체득한 ‘노하우’와 33년 동안 계속될 수밖에 없었던 상상놀이의 결과물이 집대성된 것이었다. 그가 추진하는 연구 프로젝트는 기존의 인공지능 개념을 단박에 뛰어넘는다. 지능뿐만 아니라 감정과 도덕성까지 갖춘 새로운 개념의 인공생명체를 탄생시키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국가기관도 엄두를 내기 힘든 일을 준비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할 수 있다.”

그의 목표는 발달 가능한 의식(양심)을 지닌 인공체계라는 의미를 지닌 ‘에코나스’(ECONAS)로 귀결된다. 즉, 고도로 복잡한 의식체계를 가지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인공생명체를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공지능이나 휴먼로봇 등과는 동서고금의 인문학적 지식을 융합하겠다는 데서 확연히 구별된다. 그는 인간보다 뛰어난 감각을 소유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 동서양의 고전을 ‘기계적 언어’로 재해석하고 있다. 불경과 도덕경, 사서삼경 그리고 셰익스피어 작품 등을 기계적 시스템에 구현해 인류의 의식 수준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읽은 책들을 누워 지내는 동안 재해석한 뒤 앉아서 입력하고 있다.

그가 추진하는 숙묵미래연구재단의 100년 프로젝트가 에코나스 개발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에코나스 개발 과정은 한국어 정보처리와 더불어 진행할 계획이다. 그는 우리말이 생각을 따라가는 언어로서 감정 표현에 놀라운 장점이 있다고 본다. 이것을 정보공학 관점에서 재발견해 번역 시스템이나 인간과 기계의 소통 등에 활용하려고 한다. 그는 에코나스 개발과 한국어 정보처리가 이뤄지면 인류가 이룩한 지식과 정신문화를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는 직관적 상상이라는 뼈대에 논리적 학습이라는 살을 붙이고 있다. 누구도 떠올리지 못한 것들이기에 어설퍼 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동서양 고전을 ‘기계적 언어’로 재해석

도대체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애당초 그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다. 그것은 부산의 장애아동 특수학교인 혜성학교 고등부 1학년(1987)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교직에 첫발을 내딛은 기술담당 정도건 교사(현재 부산 기계공고 재직)를 만난 게 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정 교사는 80년대 중반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애플컴퓨터를 4개월 동안 만져봤을 뿐이다. “교과 과목 성적이 괜찮은 편이었는데 학교 공부보다는 SF영화나 만화를 좋아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컴퓨터라는 걸 권하셨다. 일주일 만에 구구단 연산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컴퓨터는 나를 매혹시켰다.”

그리고 2개월가량 지났을 때 정 교사는 컴퓨터 관련 책 두권을 주는 것으로 가르침을 마감했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었던 것이다. 컴퓨터 서적조차 흔치 않은 당시 그가 받았던 것은 요즘의 ‘컴퓨터 매뉴얼’이었다. 그는 컴퓨터가 없는 집에서 노트에 코딩을 하고 학교에서 입력하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미친 듯 매달렸던 컴퓨터를 가까이 하지 않던 방황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컴퓨터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그는 컴퓨터를 켜지 않은 채 1200쪽이나 되는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C언어 서적을 읽고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책이 통째로 머리에 들어오는 황홀한 경험을 했다. 그것은 국내 최초의 셰어웨어로 꼽히는 ‘디스켓 관리 프로그램’ 개발로 이어졌다.

곧바로 그는 부산 지역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컴퓨터 전문가로 꼽혔다. 공업계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프로그래밍 교육도 이뤄졌다. 누구나 그의 ‘일 대 일 교육’ 수강생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컴퓨터 실력은 백지장 차이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의식의 공유’라며, 이 독특한 기준에 따라 수강생들을 뽑았다. 현재 수강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직접적인 프로그래머로 활약하고 있다. 온라인 게임 개발업체 위플라이 엔터테인먼트 대표인 주영흠(28)씨도 수강생으로 만났다. 주씨는 그로부터 소프트웨어 개발 이론과 실무를 터득해 고교 시절에 ‘타키온’이라는 공개 백신을 개발했고, 컴퓨터 백신업체 ‘하우리’를 공동 창업해 ‘바이로봇’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문하생’으로 두면서 그의 상상놀이는 차츰 연구 단계로 진입했다. 새롭고 좋은 세상을 만들려는 꿈이 차츰 영글어갔다. 그는 만물의 생성·작동 원리를 밝혀 예술로 승화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따라 배우려 한다. 어쩌면 그는 ‘21세기의 마법사’가 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뤄질 것들을 미리 생각하는 게 그의 몫이다. 에코나스라는 생각하는 기계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오래전에는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컴퓨터나 인터넷을 차지하고 전등이나 시계, 선풍기 등만 해도 역사의 눈으로 보면 마법처럼 등장한 신비로운 것들이었다.

지금은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 100년 프로젝트. 미국 제록스사의 팔로알토리서치센터나 일본 혼다사의 로봇연구소 등보다 훨씬 거대한 숙묵미래정보재단을 세우려면 충분한 자금이 뒷받침돼야 한다. 에코나스 프로젝트는 온갖 파괴를 일삼은 인류가 미래의 후손에 전할 ‘선물’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는 연구는 소비적인 활동으로 미래 가치를 생각하며 투자해야 한다고 믿는다. “수천번의 실패 속에서 우연한 하나의 발견이 인류를 풍요롭게 했다. 눈앞의 수익을 좇는 사람들에 기대지 않을 작정이다. 요즘 세계적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에게 에코나스에 관한 비전을 알리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는 투자를 제안하는 것이다.”

오늘의 상상력… 21세기의 다빈치 꿈꾼다

언젠가 에코나스가 우리 앞에 다가올 수 있을까. 그로서는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실생활에 응용될지도 모른다. 도스 기반의 컴퓨터에 한글을 구현하거나 소프트웨어의 속도와 용량을 최적화하는 데 그의 아이디어가 뒷받침됐듯이 컴퓨터 사용자들을 위해 보이지 않게 활약하는 것이다. 요즘 그의 활동에서 외부에 드러나는 것은 데이터 복구 전문가라는 것뿐이다. 기업이나 연구자의 컴퓨터에서 사라진 각종 데이터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생계에 보탬이 되더라도 드러난 활동에만 매진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오늘의 상상력을 극대화해 미래를 밝히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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