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문화기업 ‘티팟’ 만든 문화계 일꾼들… 정부 · 지자체 · 기업에게 필요한 ‘몸통’과 ‘손발’ 여기 있다
▣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1999년 어느 날 당시 고건 서울시장은 술 대신 콜라 같은 무알콜 음료수를 마시면서 춤추고 노는 콜라텍이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장 지시가 떨어졌다. 서울시는 한달도 지나지 않아 6억원의 예산을 들여 9곳의 콜라텍을 만드는 사업계획서를 짰다. 하지만 ‘시영 콜라텍’이 외면받기까지는 1년도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공간에서 현란한 조명 아래 자신들만의 몸짓을 즐기던 아이들은, 휑하니 넓기만 한 체육관 같은 곳에 높다랗게 달려 있는 썰렁한 사이키 조명 아래선 도무지 흥이 안 났던 것이다. 아무리 솜씨 좋은 DJ를 파견하고 성능 좋은 노래방 시설과 드럼기기를 들여놓는다 해도 날이 갈수록 손님은 줄었다. 언론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하루 이용 청소년 수 30명 안팎’ ‘외면받는 콜라텍’ ‘전시행정의 전형’ 등의 기사를 뽑아냈다. 그렇다고 거리에 돌아다니는 애들을 잡아 콜라텍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는 일. 결국 건전한 놀이공간을 만들겠다는 ‘관료적 선의’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콜라텍 · 하자센터… 올가미 같은 관의 입김
지방자치제 10년. 어느 지자체든 콜라텍 사업 같은 크고 작은 실수를 한두번은 겪었을 것이다. 웬만한 도시면 그럴듯해 보이는 예술센터가 있고, 종합운동장이 있고, 지역축제가 있지만 이런 시설이나 행사가 과연 주민들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있는지 따져보면 자신 있게 나설 곳은 많지 않다. 일년 내내 겨우 서너번 문을 여는 예술회관이 주민들의 일상적인 문화생활을 고양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전효관(41) 티팟(Tea-pot) 대표이사는 그동안 이런 사례를 지켜보며 ‘문화’의 결핍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느꼈다고 말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뭔가 잘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더라도 이를 적절하게 풀어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도 정책적 제안 같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은 갖고 있지 않고요. 결국 욕망이나 의지는 있어도 이를 받아안을 실행력이 없으니 하드웨어 따로, 소프트웨어 따로 겉돌 수밖에요.”
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와 함께 5년 동안 청소년 공간 ‘하자센터’를 이끌었던 그는 올해 초 하자센터 부소장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서울시가 투자한 청소년 기관이자 대안교육 작업장으로서 하자센터의 명망이 높아질수록, 그 스스로 마음 한쪽이 무거워짐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자센터를 시작할 땐 처음 몇년 동안만 잘 해내면 민간 부문의 힘이 높아져 관으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관은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 했고, 이런저런 사업을 진행할 때 벽에 부닥치는 느낌을 받았지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많이 했다.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고심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기업을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그것도 전문가들의 네트워크로 구성된 시민문화기업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정부·지자체, 기업 등이 주도하는 여러 가지 사업에 연구·조사, 프로그램 기획, 인프라 마련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을 꾸려보자.”
기업에 몸담고 있는 친구들은 펄쩍 뛰었다. “이윤을 내는 일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책임자 몇명이 일을 맡아 딱 정해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끼리의 느슨한 네트워크망으로 어쩌겠다는 거냐.”
하지만 시민단체·문화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반겼다. “이젠 그런 거 할 때가 됐다. 망하지 않을 거다. 힘내라.”
지금종(문화연대 사무총장), 정기용(기용건축 대표), 이섭(아트컨설팅인서울 전시기획자), 유석연(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안이영노(문화기확자), 박찬국(밀머리 미술학교 대표), 이동연(문화사회연구소 소장), 박신의(경희대 미술관경영 교수), 이원재(문화연대 공동사무처장) 등 문화계 일꾼 20여명이 뭉쳤다. 저마다 십시일반 낸 돈으로 자본금 5천만원을 모았다. 주식회사가 만들어졌다. 상근자들은 대표이사니 팀장이니 할 것 없이 똑같이 150만원씩 받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7월23일, 서울 정동 민주화기념사업회 1층 교육장에서 사업설명회가 열렸다.
건축가 · 미술가 · 문화기획가, 자본금 모아
‘책 읽는 사회’의 공동대표로서 어린이도서관 운동을 하고 있는 도정일 교수(경희대 영문학과)는 이날 사업설명회에서 애정 어린 축사를 띄웠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입만 열면 문화를 이야기하는 시대입니다. 정부는 막대한 공공자원을 가지고 있지만 지역의 문화환경을 어떻게 바꾸어나갈지 아이디어가 없는 형편입니다. 건물을 지어놓고 직원을 배치한 뒤 파리를 날리고 있는 꼴이지요. 작은 도서관 하나 만드는 것만 해도, 정부는 돈을 내고 기획·운영은 민간인이 맡는 시스템이 정착되기까지 몇 단계 어려운 고비를 건너야 합니다. 실력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 후배들이 이런 기업을 만들어 우리 사회에 긴요하고 절실한 부분을 해결하고자 하는 모습에 찬사를 보냅니다. 우리 늙은 선배들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이어진 인사말에서 이섭씨는 “회사 이름인 ‘티팟’처럼, 따뜻한 차 한잔 함께 나눌 만큼의 실행력을 가지면 좋겠다”며 “열심히 회사를 일궈서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더 큰 기업을 만들고 주식도 상장하는 회사를 만들자”고 화답했다.
시민문화기업 ‘티팟’은 세 단위로 구성된다. 연구-프로그램-실행 네트워크. 실제로 시민들이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역을 일궈나갈 문화적 키워드는 무엇인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정책은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제안하는 연구 네트워크를 몸통에 비유한다면, 지역사회에 필요한 건축·조경·인테리·시각디자인 등 인프라를 만들고 여기에서 이뤄질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실행 네트워크·프로그램 네트워크는 손발이랄 수 있다. 프로젝트의 초기 기획 단계부터 완료 때까지 매 단계에서 몸통과 손발이 호흡을 맞춰 공공사업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것이 티팟의 목표다.
티팟이 관심을 두는 영역은 넓다. 대학로·인사동처럼 문화의 거리로 지정된 곳을 어떻게 가꿔나갈지, 주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도서관들은 어떤 방향으로 리모델링해야 할지, 뜨내기 상인들만 들끓는 지역축제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차게 즐길 수 있는지, 지역마다 특색 있는 문화 프로그램은 어떤 것이 있는지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기업에서 벌이는 각종 사회공헌사업에서도 더욱 파급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낸다. 가령 페인트 회사가 병원에 벽화를 그려준다고 하면 어떤 그림들을 그릴 것인지, 소외지역을 찾아가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문화버스의 디자인과 메뉴는 어떻게 정할지, 통신회사가 청소년 축제를 기획할 경우 어떻게 하면 더욱 재미있고 유익한 행사로 만들 수 있을지, 외딴 산골이나 섬마을의 분교에 장비나 시설을 지원할 때는 어떤 것을 우선으로 해야 할지 등등. 곳곳에서 일어나는 시민들의 자발적 지역활동에도 전문적 힘을 보탠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선 어떤 예술교육이 이뤄져야 하는지, 소년소녀 가장을 위한 공동체 집짓기는 어떤 디자인이 좋을지, 동네 놀이터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파트 내 소극장을 만들 땐 어떤 프로그램이 적당할지 등을 기획한다.
도서관 리모델링 · 지역축제 고민하신다면
물론, 열거된 이 많은 사업들을 티팟이 다하겠다는 건 아니다. 단지, 보이는/보이지 않는 할 일이 무지 많다는 거다. 회사 이름이 소심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면서도, 전효관 대표는 소박했다. “우린 큰 욕심은 안 내요. 이슈를 보글보글 끓여 맛있고 향기로운 차를 나누겠다는 거죠.”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이 칼이라도 들라고…” 경호처 수뇌부, 제보자 색출 혈안
“꺾는 노래는 내 것” 나훈아, 좌우로 너무 꺾어버린 고별 무대
소방청장 “이상민, 계엄 때 한겨레 단전·단수 지시” [영상]
법조계 “경호처 지휘부, 윤석열 영장 막다 부상자 나오면 최고 35년”
“북한군 ‘우크라 사람들 좋나요’”…젤렌스키, 한국어로 포로 교환 제안
언제까지 들어줄 것인가 [그림판]
한덕수 “계엄 말렸다”…헌재 재판부 “그날 행적 제출하라”
”윤석열 체포 협조하면 선처”…경호처 설득 나선 공수처·경찰
내란 여파 어디까지…한 달 만에 ‘긴급 유동성’ 62조 풀었다
“경호처분들 시늉만 하거나, 거부하세요”...가로막힌 법학교수의 외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