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의 독설… “국가가 생계비 안 주면 범죄를 해서라도 먹고 살 것” </font>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지난 2002년 영국 런던의 한 빈민가에 50대 초반의 여성이 혼자 입주했다. 가난에 찌들어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빈민층의 동네 이웃이 된 이 여성은 영국의 진보적 신문 의 이름난 여성 칼럼니스트인 폴리 토인비. 빈곤의 악순환에 빠진 영국 절대빈곤층의 실태와 정부 복지정책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해 위장 전입한 것이다. 그는 몇달간 빌딩 청소원, 병원 잡역부 등 낯선 삶을 전전하면서 밑바닥 삶을 체험한 뒤, 그 기록인 이란 책을 통해 복지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최저생계비 한국 꼴찌” 도발적 문제제기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55·소비자학 박사) 소장은 폴리 토인비와 여러모로 닮았다. 중년의 늦은(?) 나이에 절대빈곤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것도 그렇고, 현장에 직접 발을 딛고 복지정책의 ‘빈곤’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류 소장은 외환위기 직후 1999년 1분기 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25%(약 1천만명)라고 주장해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최저생계비(2004년 4인가구 기준 월 105만5090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가 중 최하위라고 발표해 최저생계비 산정을 둘러싼 논란을 촉발했다. 이처럼 빈곤 문제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빈민 운동가가 류 소장이다.
7월1일, 서울시 강남구 도곡동 초호화 타워팰리스와 달동네 구룡마을 사이에 있는 네댓평짜리 빈곤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우리 연구소는 (단순한 연구공간이 아니라) ‘운동’을 위한 곳”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는 중립적인 연구기관이 아닙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권자들한테 도움이 되는 증빙자료들을 만드는 등 운동에 필요한 연구만 하는 곳이죠.”
그는 일부 언론이 최근 빈곤 문제를 심층 조명하는 보도를 하고 있지만, 대부분 개인 차원의 불우이웃돕기에 머물고 국가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와 관련해 가장 먼저 꼽히는 게 최저생계비다. “우리나라 최저생계비는 근로자 평균 가구소득의 33.4%에 불과해요. 식탁, 휴대전화, 전자레인지 등은 하위 30% 소득 가구의 절반 이상이 보유한 생필품인데도 최저생계비를 계측하는 시장 바구니에서 빠져 있어요.” 생활수준이 향상돼 최하위 빈곤층도, 비록 낡아빠진 것이라도 웬만한 가전제품을 다 갖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가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대로 그저 물가상승률만 반영해 최저생계비를 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1급 장애인이 구걸 행위를 하고 있기에 뒤따라가 물어봤어요. 세 식구가 장애수당 등을 합쳐 한달에 73만8천원을 받고 있더군요. 그런데 왜 구걸까지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이 교육비 대려고 그런다’더군요. 이게 현실이에요.” 최저생계비가 ‘끼니를 굶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수준에 갇혀 있는 한 가난의 대물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초생활보장비 수급자는 2000년 148만명에서 올해는 138만명으로 줄었어요. 빈부격차가 심해지는데도 수급자 수는 줄어들고 있는 겁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시행 전에 전 인구의 4%이던 생계비 수급자가 지금은 2.8%밖에 안 돼요.” 그에 따르면 2002년 1분기에 빈곤 인구는 800만명(평균소득의 40%를 빈곤선으로 계측)에 달했고, 최저생계 이하의 빈곤선에서 생활하는 인구는 480∼320만명으로 추산된다. 특히 신용불량자가 급증하면서 빈곤은 훨씬 더 악화되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경제성장에 따라 절대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보고, 상대적 박탈감이란 말과 사실상 동의어로 쓰이는 ‘상대 빈곤’을 더 강조한다. 이런 시각은 차상위계층(소득이 최저생계비는 웃돌지만 120%에 달하지 못하는 층)에 대한 보호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류 소장은 우리나라 빈곤 문제의 당면 과제는 여전히 ‘절대 빈곤’이라고 말한다. “차하위 빈곤층조차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나라 복지정책입니다. 상대적 빈곤이니 박탈감이니 하는 말 이전에 인간 존엄성조차 유지하기 힘든 절대 빈곤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노숙자는 빈곤층 통계에도 안 잡히고 있어요. 당장 먹고살기 힘들어 자살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절박한 사람들부터 지원해야 할 것 아닙니까?”
“노무현 정부는 서민층 복지에만 관심”
류 소장은 38살에 공부를 다시 시작한 늦깎이 빈민 활동가다. 70년대 서울대 가정대 학생회장 시절에는 데모에 앞장섰지만 졸업한 뒤에는 “밥쟁이 아줌마”로 살았다. 이처럼 “집에서 처박혀 살다가” 남편이 미국에 주재원으로 갈 때 따라가 경영학을 공부했다. 본인의 말마따나 류 소장은 “신자유주의 경쟁체제를 가르치는” 경영학석사(MBA) 출신이다. ‘빈곤의 세계화’ ‘20 대 80 사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영학을 공부한 그가 어떻게 정반대의 길에 들어서게 됐을까?
“국내에 돌아와서 동국대 대학원 가정학과에 들어갔어요. 가정학이라고 하면 시집 잘 가기 위해 신부수업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하지만 부엌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가정학입니다. 가정이 얼마나 벌어야 먹고살 수 있는가를 보고, 소외된 가정이 사회와 국가에 대해 요구하는 것을 정리하는 작업이 가정학이죠.” 그는 소비시장에서 소외돼 소비자 범위에도 들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최저생계비 계측’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잡았다. 이를 계기로 지난 97년 참여연대에 들어가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운동 작업에 뛰어들었다. 전국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 권리찾기운동본부도 꾸렸다.
“2000년 10월에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될 무렵 초조하게 수능 성적을 기다리는 입시생들처럼 빈민들이 모두 나한테 달려왔어요. 수급 자격이 되는지 상담하러 온 겁니다. 당시 밤이고 새벽이고 가리지 않고 우리 집으로 상담전화가 빗발쳤는데, 밤잠 못 잔 가족들이 나더러 ‘공해 덩어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바깥에 나가 사무실을 하나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사재를 털어 2001년에 빈곤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초창기에는 “내 친구와 남편 친구들 호주머니를 털어서” 운영했다. 지금은 소액 후원자 200여명이 연구소를 돕고 있다.
개인사 얘기가 끝나자 그가 대뜸 빈곤 문제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무관심을 거침없이 질타하고 나섰다. “꼭 하고 싶은 얘기”라고 거듭 강조하기까지 했다. “(탄핵 정국에서) 노무현 살려줄 때 모든 시민단체가 촛불 들고 길거리로 나왔잖아요. 그런데 빈곤층에 대한 기초생활보장에 대해서는 별 관심도 없고 정부한테 해야 할 비판도 제대로 못하고 있어요.” 그는 시민단체마다 저소득층 자활사업과 노숙인 쉼터사업 등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과거에 수억원씩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로부터 “독약을 먹어서” 말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빈민은 불만과 저항을 조직화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사람들이 필요한데 시민사회단체들은 조용히 있고….”
‘사회 통합’을 내세우는 노무현 정부의 복지정책에 대해 그는 ‘서민층’의 삶에만 초점을 맞출 뿐 절대빈곤층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고 비판했다. “아무리 없이 살아도 죽지 않고 살고 있다면, 또 화장대에 파운데이션만 있어도 어디선가 소득이 있을 것으로 보고 ‘추정 소득’을 매겨서 기초생활보장비에서 그만큼을 깎는다는 게 정부의 방침입니다. 서민층 주거복지쪽에만 관심을 보일 뿐 기초생활보장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복지예산이 늘었다고 하지만 시장 불평등에 따라 계속 떨어지는 소득을 국가가 복지제도로 받아주고 있는 부분은 코끼리 비스킷에 불과해요. 조세 및 사회부조를 통한 소득 재분배 효과를 봐도 우리나라는 소득 격차를 7.9%를 줄이는 데 그치고 있어요. 소득 재분배를 통해 격차를 40∼50% 줄이고 있는 다른 OECD 국가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입니다.”
적당히 뺏어먹게 놔둘 것인가
그는 “일자리가 없어서 빈곤의 늪에 빠진, 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은 범죄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줄곧 강조했다. “세금으로 복지를 확대하자고 하면 50년대 한국전쟁 때처럼 죽창 들고 뺏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우리 사회의 질서가 강자한테 모두 몰아주기 형태로 가고 있어요. 먹고살 게 없다고 빈곤층이 입에 거미줄 치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국가가 생계비를 안 주면 무슨 짓을 해서든지 먹고살 겁니다. 그렇게 각자 알아서 적당히 뺏어먹게 놔둘 겁니까?”(한국빈곤문제연구소 후원신청 및 빈민상담전화 080-333-9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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