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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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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흙탕물과 함께 흐르겠다던 당신!

등록 2004-05-20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maroon">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연꽃'을 피웠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기억함… 10주기 맞아 제자가 띄우는 글 </font>

윤형근/ ‘모심과 살림 연구소’ 사무국장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이 도발되고 지역자치에 역행하는 부안 핵폐기장 건설이 추진되며 논란이 되던 지난 한햇동안, 어설프게나마 생명운동에 몸담고 있는 나는 분노와 절망으로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았던 느낌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슴속 그 칼이 내 마음과 몸을 예리하게 찌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몰상식은 몰상식을 전이시키며 나를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원주에서 꽃핀 생명운동 ‘한살림 모임’

그 혼돈의 순간, 내가 무위당 선생님을 떠올린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남들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을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로운 분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유독 그분을 무서워했다. 맑고 커다란 눈으로 지긋이 나를 바라보시면 마치 모든 것을 꿰뚫고 짐작하시는 듯해 몸 둘 바를 몰랐다. 한살림생협과 보조를 같이하면서 무위당 선생님과 김지하·박재일·김민기 선생님들이 함께 참여해 우리 사회가 가야 할 방향을 찾고자 만들었던 한살림모임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구심력을 잃어 서서히 와해될 무렵, 와병 중에도 내 손을 꼬옥 잡으시며 모임을 지키라 하시던 부탁을 저버린 빚도 있었다. 10년 만에 한살림모임을 부활시킨 ‘모심과 살림 연구소’로 돌아와, 그때 선생님의 당부를 들었다면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이 우리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회한에 젖기도 했다.

내 맘속에 칼을 품게 했던 일련의 사태 배후에는 개발과 진보를 내세운 세계화의 논리가 작동되며,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에 근거해 있다. 이 끔찍한 현실을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사람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정성으로 대하셨던 무위당 선생님과 같은 마음과 태도밖에는 달리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선생님은 오늘의 현실보다 더 엄혹한 싸움의 현장에서도 늘 초심을 잃지 않으신 분이셨다.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를 전제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니까요.”

원주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가톨릭의 평신도운동을 일으키고, 정의구현사제단·가톨릭농민회·민청학련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하며, 강원도 일원의 지역사회개발운동·신용협동조합운동·유기농업운동·생협운동의 주춧돌을 놓고, 한살림운동에 앞장서셨다는 대략의 발자취만 따져도 다른 어떤 지식인이나 스승에 못지않지만, 무위당 선생님이 남달랐던 것은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내세운 일도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늘 뒤에서 어려운 이를 도우셨다는 많은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말씀이나 자주 인용하시던 노자(老子)의 “낳았으되 소유하지 않고(生而不有), 키웠으되 부리지 않는다(長而不宰)”는 구절을 몸소 실천하셨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사회운동의 당연한 요구처럼 된 현실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 아닐까 싶다.

내 것이 옳다고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틀을 갖고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들끼리만 판을 짠다거나 다수의 힘의 논리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도 늘 지적하시던 바였다.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선생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슴에 울림을 주었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늘 초심을 떠올리게 하고 근본을 놓치지 않도록 이끄셨기 때문이다. 김지하 시인, 이현주 목사를 비롯한 여러 후학과 제자들에게 늘 “기어라” “문을 활짝 열고 아래로 흘러라”(開門流河)고 하신 것도 밑바닥, 근본의 자리를 놓치지 말라는 당부였을 것이다. 하던 일이 벽에 부딪쳤을 때, 마음가짐이 혼란스러울 때 처음으로 돌아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오랜 군사독재 치하의 숨 막히던 시절, 원주는 반체제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숨을 돌리는 안식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위당 선생님의 너그럽고 넓은 품 때문이었고, 그 품에서 휴식을 취한 그분들은 위로와 용기를 얻어 다시 싸움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위당 선생님은 불의에 저항하는 에너지도 사람의 온기 속에서 나오며, 사회운동의 바탕에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도덕적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넘어지면서도 마음을 곧추세우는 닦음의 자세였고, 무슨 일을 하든 ‘정성’을 다하고 어떤 사물과 사람을 대하더라도 연민과 자애로 ‘공경’하면서 ‘믿음’을 잃지 않던 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명상과 사회혁명을 한 몸에 실현하셨고, 지금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명상적 깊이에서 나오는 사회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반체제 지식인 보듬은 넓은 품

이전에도 그 싹이 삶의 태도와 말씀 속에 담겨 있었지만, 평생의 사색과 실천을 선명하게 집약한 것이 우리 사회에 한살림운동으로 펼쳐진 생명사상이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현재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고 있는 탐욕과 오만을 버리고 자연과 인간, 생물과 무생물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 “하늘과 땅은 나와 한 뿌리요(天地與我同根), 만물은 나와 한 몸(萬物與我一體)”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찮아 보이는 풀, 벌레라도 거룩한 것으로 느끼며 모시고 공경해야 한다는 무위당 선생님의 생명사상은 경쟁의 논리나 화폐의 잣대가 아니라, 공생의 논리와 생명이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에 걸맞은 삶의 모습을 만드는 일이 우리 삶의 과제요, 우리 사회가 실천해가야 할 길임을 일러주신다.

찾는 사람은 누구라도 허투루 대하지 않고 지극함으로 따뜻하게 맞아 사람마다 그 서 있는 자리에 맞게 가야 할 길을 일러주곤 하셨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시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도록 말씀하셨다. 그래서 원주 봉산동 자택에 군 장성에서부터 장바닥 아주머니들까지 선생님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 아닐까? 선생님이 남기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자신만이 옳다는 배타적 주장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그 사람들의 온화한 마음이 짜나갈 세상이 우리의 미래일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지방자치가 부활된 1991년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힘을 보태셨던 모습도 꼭 새겨보아야 할 지점이다. 사람들의 자율적 참여에 바탕한 자치가 생명사상의 정치적 양식이며, 거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이상이 담겨 있다는 의미였으리라. 모든 것이 중앙만을 향하는 세상에서 평생 원주를 떠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모습도 같은 차원의 뜻을 담고 있었던 것이리라.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삶이라 말씀하시던 “자식새끼 데리고 이웃들과 친화하면서 사는 삶”은 아마도 권력과 돈, 중앙을 향한 오늘의 뒤틀린 삶을 교정하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심오한 가치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피운 연꽃들이 향기를 흩뿌린다

마지막으로 (도솔출판사 펴냄)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지금 원주의료생협 기획실장을 맡고 있는 최혁진이 대학생일 때였다. 하루는 장일순이 물었다.

“큰 비가 오는 바람에 강이 흙탕물이 되었어. 그 흙탕물을 다시 맑은 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최혁진이 대답을 못했다. “세 가지 부류가 있겠지. 한 부류는 강둑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둑을 쌓는 사람들이다. 둑을 쌓고 물이 맑아지기를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나라면 물 속에 들어가 물과 함께 흘러가겠어, 함께 가며 맑아지는 거지.”

그랬다. 무위당 선생님은 늘 문을 활짝 열고 밑으로 흘렀고, 그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진흙 속을 뒹굴며 곱디 고운 연꽃을 피웠다. 무위당 선생님이 피운 연꽃은 사람들 마음이었다. 선생님 가신 지 벌써 10년이 되었건만, 그렇게 활짝 핀 연꽃들이 또 다른 향기를 세상에 흩뿌리고 있는 것이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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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 color="#216B9C">
‘그의 뜻 거스르며’ 10주기 문화제</font>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한 사람의 삶이 가르침이 되고, 정신이 되고, 문화가 됐다. 그 사람을 기려 문화제가 열린다.
강원도 원주 시립박물관과 토지문화관 등에서 5월21~22일 열리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 10주기 기념문화제’는 장일순 선생이 뿌리고 간 뜻을 되새기는 자리다. ‘바람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이번 행사는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모임’을 비롯해 한살림, 밝음신협, 원주민예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 2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힘으로 펼쳐진다.
무위당 선생은 생전에 “후일 내 이름으로 하는 어떤 행사도 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10년 동안 5월22일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무위당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원주 근교의 묘소를 찾는 것으로만 뜻을 기려왔다. 무위당 선생의 유지를 거스르면서 이번 행사가 열리는 이유는, 그만큼 이 시대에 그의 사상과 삶이 긴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제의 첫 순서는 무위당에 대한 ‘말’로 열린다. 5월21일 오후 2시 토지문화관에서 김지하 시인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밤 10시까지 늦도록 무위당의 생명과 평화 사상에 대한 이야기마당이 벌어진다. 3시간 동안 유명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무위당식으로’ 한마디씩 나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엔 ‘지금 우리에게 생명사상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정치, 민중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생명사상이 뿌리를 내린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튿날인 22일 오전엔 횡성군 소초면 수암리 무위당 선생 묘소를 참배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문인화가’라고 불리던 장일순 선생을 기리는 곳에 노래와 춤, 그림이 빠질 리 없다. 22일 오후 5~10시 박물관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생명평화콘서트’엔 광대패 모두골, 원주민예총의 거리굿 ‘밥’과 재일동포 가수 이정미, 나팔꽃 동인 홍순관, 프리재즈 뮤지션 박재천·김미연씨가 출연해 자리를 빛낸다. 시립박물관 전시실에선 6월22일까지 무위당의 유작 15점과 함께 김지하(묵란), 신영복(글씨) 선생 등 그림·글씨·도자기·조각·나전칠기 등 갖가지 장르의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10주기를 맞아 귀한 책들도 이름을 얻었다. 무위당 선생의 가르침에 큰 깨달음을 얻어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는 최성현씨가 무위당의 작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한명씩 찾아 인터뷰한 글·그림집 (도솔출판사 펴냄), 무위당 소식지(2001년부터 시작해 현재 9호까지 나왔음)에 실린 글들을 중심으로 엮은 (녹색평론사 펴냄). 22일 오후 3시 시립박물관에선 이를 축하해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이 자리엔 리영희 선생을 초청해 기념강연을 듣는다. 문화제 외에도 무위당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녹색평론사 펴냄), (다산글방·삼인 펴냄)이 나와 있고, 무위당의 작품비평서(소명출판사 펴냄)도 올 가을께 출판될 예정이다. (행사 문의: 033-747-4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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