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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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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라 쇼트] ‘삼팔선’은 드레스덴에도 있었다

등록 2004-05-13 00:00 수정 2020-05-03 04:23

북한의 생부 찾아 방한한 동독 출신 마누엘라 쇼트씨… 북-독 경계인의 삶에도 그리움 지울 수 없어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이산가족 하면 두 가지의 이미지가 겹쳐 떠오른다. 고단했던 삶의 흔적인 깊은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으로 갈라진, 우리 말과 글을 쓰는 우리네 사람들만 떠올린다. 일제시대에 고향을 등지고 중국과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이들까지 범위를 넓히더라도 이산가족이라는 테두리에 생김새가 다른 이들을 포함시키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40대 초반의 한 독일인 여성이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임진각에서 아버지를 목놓아 불렀다. 단 한번도 본 적 없고, 저 철조망 너머 어딘가에 살아 있는지 혹은 죽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면서…. 동독 출신의 마누엘라 쇼트(43)가 이 소설 같은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다.

동독 처녀와 북한 유학생의 사랑

마누엘라가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첫 출발점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교육을 받던 18살 때까지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다. 자라는 동안 까만 눈동자, 검은 머리가 주변의 다른 아이들과 확연히 달라 어머니에게 묻곤 했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누엘라가 어머니의 옷장에서 발견한 노트 한권을 집어들자 빛바랜 사진 몇장과 편지가 떨어졌다.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그는 사진을 보는 순간 직감으로 알았다. ‘또 다른 내가 여기 있구나.’ 출생의 비밀이 풀린 순간이었다.

일기장에는 호기심 많았던 동독 처녀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되살리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던 북한 유학생이, 서로 첫눈에 반했던 날부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사랑을 키워간 과정까지 애틋한 사연이 띄엄띄엄 담겨 있었다. 그 유학생이 북한에서 인편을 통해 전해온 몇통의 편지는,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더 이상 편지를 보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임을 알렸다.

어머니의 일기장과 아버지의 편지, 그리고 사진 몇장은, 수년간 굶주려온 마누엘라의 호기심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동양인 혼혈아를 낳아 한동안 혼자 키웠던 어머니는 젊은 날을 그저 세월 속에 묻어두고 싶어했다. 1960년대 폐쇄적인 동독 사회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어머니는 수근덕거림 속에서 마누엘라를 키웠다. 심지어 부모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었다. 마누엘라는 어머니가 새 가정을 꾸리고 공업도시인 드레스덴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안정을 되찾기 시작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이후에도 친아버지에 관한 풀스토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마누엘라는 일기장과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위에 조금씩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덧붙여 조각맞추기를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함경남도 리원 출신의 림병룡, 동독 프라이베르크 소재 대학에서 7년가량 국비유학생으로 공부하던 중 어머니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동거를 하다 마누엘라를 낳았으며 생후 4개월째인 1961년 무렵 중-소 분쟁 당시 유학생 귀국조치가 내려지면서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으로 돌아갔다는 것 등이 꿰맞춰졌다. 아버지가 다녔던 대학을 찾아 귀국 전 제철공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마누엘라의 관심은 온통 동양의 자그마한 나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서 ‘KOREA’와 관련된 자료를 뒤졌지만 같은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선전물밖에 찾을 수 없었다. 1981년께 자신의 사연을 담아 아버지를 찾아달라는 편지를 베를린에 있는 북한대사관에 보냈다. 답이 없었다. 이번엔 국제적십자사 문을 두드렸다. 그에 관한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북한에 아무 연고도 없고 방문지역이 제한적인 현지사정 등을 감안할 때 무작정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마누엘라의 삶도 격변기에 휘말렸다. 그는 1989년 갑작스럽게 닥친 통일 독일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대학에서 환경공학을 전공한 마누엘라는 드레스덴 시청 환경과에 취직을 했고 자신의 가정을 꾸렸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져갔다. 통일은 혼돈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기회이기도 했다.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고 항상 목말라했던, 한반도에 관한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던 중 박경리 소설인 의 독일어 번역본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누가 번역했을까? 헬가 피히트 교수?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만나봐야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01년 드레스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찻집에 들렀다가 손님 중에 최근 북한을 다녀온 독일인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개받았다. 그 사람은 자신은 잘 모르고 혹시 이 사람이면 알 수도 있다고 다른 사람을 소개했다. 이름과 연락처를 받고 보니 익숙한 이름이었다. 피히트 교수(그는 동독 훔볼트 대학에서 한국학과를 개설한 독일 학계의 대표적인 ‘지한파’로, 북한작가 김기영의 소설을 독일어로 번역했고 현재는 박경리의 를 번역하고 있다)였던 것이다.

마누엘라는 그와의 만남을 재촉했다. 피히트 교수는 1970, 80년대 동독 호네커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와 김일성 주석이 동베를린을 방문했을 당시 통역을 했고,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피히트 교수는 일단 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 다시 편지를 보내보라고 권했다. 따로 전화를 걸어 알아보겠다는 약속과 함께.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피히트 교수의 노력도 성과가 없었다.

피히트 교수와의 인연은 다시 한국의 학자들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통일 독일의 내적 갈등에 관해 현지조사를 벌이던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 연구진을 알게 됐고, 이 연구소의 초청으로 마누엘라는 ‘이중의 분단’이라는 주제로 중앙대에서 5월6일 특별강연을 하기에 이르렀다. 담담하게 자신과 부모의 가정사와 통일 독일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갔던 마누엘라는 강연 끝 무렵,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의 눈에서 2시간가량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음날 그는 대한적십자사를 찾았다.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외국인 신청도 받아줄까? 이런 케이스가 없어서 당황하지 않을까? 외국으로 이민간 사람들도 신청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변에서 논란이 일었다. 신청을 거부당할 수도 있었다. 마누엘라는 그래도 도전해보기로 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한번도 버리지 않았던 그였기에 여기까지 와서 그냥 발길을 돌리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적십자사를 찾아 컴퓨터에 아버지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와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어 넣었다. 그동안 대답 없는 메아리만 경험했던 그는, 현재는 외국 국적 소유자는 이산가족 상봉자에 해당사항이 없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올 수도 있다는 실무자의 답변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응답’에 감격했다. 그리고 ‘팁’을 얻었다. 외국인인 만큼 북한적십자사를 직접 접촉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정보였다. 그 실무자는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 귀띔해줬다.

적십자사에서 나온 마누엘라는 ‘아버지의 나라’ 가까이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임진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거뒀다. 아버지의 고향인 리원시 부근 라흥이라는 곳의 작은 마을까지 또렷이 박혀 있는 지도를 구할 수 있었다. 경의선 최북단역인 도라선역도 둘러봤다. 살아 있다면 올해 일흔인 아버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더 깊어졌다.

“아버지가 무얼 할 수 있었겠나”

마누엘라는 낙천적으로 살아온 것 같았다. 보통 독일인과 다른 모습이 그의 어머니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테지만, 마누엘라는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글로벌한’ 특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감수성이 민감했을 시기에 정체성 혼란, 새 가정에서의 어려움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마누엘라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한장도 없었다. 4개월 된 아이를 두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원망해본 적이 없는지 물었다. 단 한번도 없다고 했다.

“시대와 역사의 그물망에 갇힌 아버지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내가 이른바 ‘문제아’이면서도 아주 이성적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덕분인 것 같다. 또 나의 역사에 대해 알면서 사회 정의에 대해 좀더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자라는 동안 아버지를 몰랐던 점, 자그마한 인형이라도 그를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민족시인 김남주는 “삼팔선은 삼팔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미8군 병사의 군화에, 입산금지의 붉은 팻말에, 죄 안 짓고 혼쭐나는 억울한 넋들에, 농부의 졸라맨 허리와 노동자의 휘어진 등에, 부자들이 담벼락과 감옥의 담, 그대 가슴에도 있다고 노래했다. 맞다. 삼팔선은 여기저기 널려 있고 분단의 아픔도 그렇다. 삼팔선은 드레스덴이라는 낯선 도시에서 온 이방인의 가슴에도 있었다.



북의 연락을 기다리며…


중앙대 한독문화연구소를 통해 마누엘라의 사연을 접했을 때의 첫 느낌은 솔직히 ‘기사가 된다’였다. 동독에 유학을 간 북한 청년과 독일 처녀의 사랑, 역사가 갈라놓은 두 사람과 그 사이에 낳은 딸이 아버지를 찾는 애틋한 사연까지. 잘 만들어진 한편의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했다.
스토리만이었다면 마누엘라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5월6일 그의 강연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흑백사진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그는 밝고 환했지만, 말 사이에서는 그늘이 느껴졌다. 동양인 아기가 독일인으로 자라기까지 말로 옮기지 못한, 혹은 옮기고 싶지 않았을 수많은 굴곡이 있었을 터다.
고민이 됐다. 마누엘라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 열정이 드레스덴 찻집→헬가 피히터 교수→한독문화연구소를 따라 서울까지 오게 만들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의 기막힌 사연은 분명히 기사 가치가 충분했다. 그런데 그의 사연이 기사화되면 아버지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될까, 혹시 문제를 푸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또 한편으론 북한 어딘가에 살아 있거나 또 다른 가족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을지도 모를 마누엘라 아버지의 신상에 관해 공개하는 것이 적정한지를 두고도 여러 생각이 겹쳤다. 마누엘라의 어머니처럼 새로 가정을 꾸렸을 가능성이 크고, 젊은 날의 추억 정도로 가둬두고 싶을지도 몰랐다. 림씨 또는 그의 가족에게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럼에도 기자와 한독문화연구소쪽은 마누엘라가 강연에서 자신과 부모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고 적십자사에서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기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쪽이 낫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북쪽의 호응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기자는 림씨가 1950년대 동독 유학을 갔던 점으로 미뤄 귀국 이후 기술관료로 성장했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겨레 통일문화연구소의 도움을 얻어 북한 고위인사 인명록을 검색해봤다. 별 소득은 없었다.
북쪽이 마누엘라의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독 유학생이 많지 않았을 테고 동독에 아이를 남겨두고 귀국한 사연 역시 흔치 않았을 것이다. 더 시간이 흘러 영영 보지 못하기 전에 마누엘라의 꿈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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