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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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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은 안기부보다 더했다

등록 2004-05-07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color="darkblue">80년대 ‘문제학생’ 지도 및 강제징집 협조 문건 단독입수… 20여개 대학 쉴 틈 없이 학생 감시 · 회유 · 보고 </font>

최혜정 기자 idun@hani.co.kr

대학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큰 배움’이라는 문자의 의미를 넘어 진리와 양심, 도덕 등 최고의 가치가 어우러져 있다.

누군가는 대학을 가리켜 “연구를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고, 교육을 통해 인간을 만들며, 전문가적 훈련을 병행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일을 하는 학문의 전당, 상아탑”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그랬다. 아는 놈이 더하다고.

의문사위가 문건 확보하며 밝혀져

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1980년대 초반의 강제징집 사건을 조사하면서 확보한 서울대, 고려대, 한국외국어대, 전남대 등 20여개 대학의 문건을 단독 입수해, 당시 대학이 정권에 어떻게 ‘부역’했는지를 확인했다.

강제징집은 각종 시국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정권 차원에서 이들을 강제 입대시킨 것을 의미한다. 의문사위의 조사결과, 당시 청와대와 안기부, 보안사, 내무부, 국방부 등의 고위인사들이 참여한 이른바 ‘5인 위원회’가 학원통제를 주도했고, 각 기관의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통해 문제학생들을 강제징집할 수 있었다. 의문사위 관계자는 “학생이 기소 상태인 경우에는 공소를 취하한 뒤 입대시키거나, 치안본부 대공분실과 안기부 등에 연행된 상태에서 입소되는 등 정상적인 절차 없이 이틀에서 일주일 사이에 강제징집이 결정됐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대학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의문사위 관계자는 “대학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공범”이라고 잘라 말한다. 대학이 이른바 ‘문제권’ 학생들이 강제징집되도록 곧바로 학사징계 조처를 내리고, 집회·시위에 연루된 학생들의 성향을 꼼꼼히 분류해 징계하는 등 탄압의 선봉에 섰다는 설명이다.

대학의 적극적인 협조는 신군부가 들어선 1980년 6월, 문교부에 학원통제를 전담하는 ‘교육정책실’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문교부는 당시 △학생처 강화 △‘문제학생’의 지도·평가 △집회·시위 차단 등을 뼈대로 하는 ‘학원대책사업추진계획서’를 각 대학에 내려보냈고, 특히 교수 면담이나 학부모 상담으로도 ‘선도’되지 않는 ‘지도불능 학생’에 대해서는 “휴학 또는 직권휴학 조처”를 취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또 ‘입영대상자는 휴학 즉시 입영 조치, 비입영대상자는 학교 관계인 협조지도’하도록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다.

수시로 “불법 유인물·게시물, 특히 국가원수 모독, 체제비판 불온내용 즉시 보고 요망” “문제학생 집중 지도, 지도 불가자는 보고 요망” 등 구체적인 방법을 내려보내는 것은 예사였다.

이러한 정부의 지침에 따라, 각 대학은 우선 학칙에 “학업을 정상적으로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는 총장이 직접 휴학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의 ‘직권휴학 조처’ 조항을 학칙에 포함시켰다. 본격적인 ‘탄압’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우선 대학들은 1년에 2차례씩 전국대학 총·학장회의를 열어 문제학생과 관련한 대학간 정보를 나누고, 정부 방침을 전달받았다. 회의 대부분은 “의식화된 고학년에 의한 학원질서 교란행위”를 걱정하면서 “교수·학부모·관계기관의 협조지도를 강화”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다.

또 학생처를 중심으로 일일 상황보고와 문제학생 동태파악 등이 이뤄졌다. 상황보고는 학내에서 발견되는 유인물이나 벽보의 내용, 각 단과대학의 동향, 경찰 등 관계기관에서 요청하는 정보 확인 등 정보경찰 뺨치는 활동이 구체적으로 전개됐다. 한 대학의 경우, 인근 대학의 학내 상황까지 파악하는가 하면 “임아무개 등 학생 100여명이 장터를 개설해 파전과 순대, 굴, 떡을 판매했다”는 자질구레한 내용까지 모두 문교부에 보고하고 있다.

이처럼 ‘항상 바빴던’ 학생처는 학내에서 대규모 집회나 행사라도 예정되는 날에는 곧바로 대비책 마련을 포함한 ‘비상체제’로 전환한다.

1985년 5월, 서울대가 작성한 ‘5월제 행사와 그 대비책’이라는 문건을 보면, 당시 학교쪽의 대응과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당시 학교쪽은 5월제 행사를 분석하면서 “학술행사 중 일부 비교육적이며 불건전한 내용과 예술행사 중 비판과 풍자성이 강한 자극적 행사는 내용을 순화·조정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대규모 행사 열리면 ‘비상체제’

학교는 이를 위해 30여개의 관련 행사를 △문제점 많음 △다소 문제점 △문제점 없음 등으로 나눴고, 특히 ‘한국 군부 엘리트 분석’과 ‘해방 후 민중항쟁과 광주’ 등을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과 ‘5·17 관련 혁명재판’ 등 반정부 색채가 짙은 행사는 ‘문제점 많은’ 행사로 지목해 ‘특별순화’에 나섰다. 여기에다 교수들에게 “수업 및 출석점검 철저, 과제물 부과, 휴강 금지, 학생 면담을 위한 전 교수 출근·연구실 대기” 등을 주문했고, 직원들에게는 “행사기간 중 전 교직원은 비상대기하며 행사에 참여·지도, 행사 완료 뒤 퇴근할 것, 국가원수 모독행위, 불온내용의 불법 유인물 등은 즉시 제거” 등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경찰과 안기부 등 ‘유관기관’을 통해 “외부 불순분자 차단” “문제성 인사 초청 차단” 등에 대해 협조를 구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대학쪽은 문교부의 지침에 따라 시국집회에 적극 참가하는 이른바 ‘문제권’ 학생의 ‘특별관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문교부는 지침을 통해 ‘관심지도 대상’ 학생명단 제출을 요구하며, 이를 위한 구체적인 선정기준까지 제시했다. A급 학생은 △학원 소요사태 상습적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 △학원 소요사태 관련 구속 뒤 기소, 선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자 △불법단체 관련자 △기타 학원 소요사태 관련자로서 문제가 있는 자 등으로 정해졌고, B급은 △학원 소요사태 관련 징계를 받은 자 △거리시위(공공건물 점거 기도 포함) 관련 구류 이상 형사처벌자 △학생회·학회 간부 △교외 문제행사 상습 참가자 등으로 정하고 있다. 이렇게 분류된 학생들을 집중 지도하는 동시에 대학쪽은 “학원 안정과 면학 분위기 정착을 위해” 시위주동자와 구속자, 연행 학생 등에 대한 징계를 신속하게 내렸다. 역시 문교부 지침에 따라, 대학쪽은 학생들이 구속되면 즉시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고, 형사처벌 정도에 따라 제적과 무기정학, 유기정학, 근신 등으로 징계했다. 한 교직원은 “당시에는 A급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 지도나 징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기 때문에, A급 학생의 수를 줄이기 위해 문교부나 경찰 등에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지도교수, 경찰서에서 학생 면담

또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문제학생들에 대해 전담 지도교수를 배정해 관리하게 했으며, 교무회의를 통해 공공연히 “지도 우수교수를 우대하겠다” “지도결과에 대한 ‘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며 교수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했다.

이 때문에 교수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문제학생들과 학부모를 만나기 위해 방학 때면 전국을 돌며 가정방문을 했고, 방문 뒤에는 지도결과 의견서를 작성해 학교쪽에 제출했다. 또 담당학생이 경찰에 잡혀가면, 경찰서까지 찾아가 경찰이 동석한 상태에서 면담을 하고 또다시 면담결과 의견서를 작성했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당시 작성한 의견서에서 “교수가 경찰서 안에 들어가서 경찰관들이 있는 주변에서 얘기하게 한다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학생들과의 대화 자체야 소중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학생들과 대화하도록 주선한 학교 당국에 대해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일부 교수들은 오히려 자신의 ‘인사고과’를 위해 학생 탄압에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1984년 ‘고려대 제적학생 복교대책위원회’는 ‘강제징집 실태보고서’를 통해 “아무개 교수는 학생들과 자유로운 토론을 한 뒤 그 대화를 녹음하여 학생들이 강제징집에 희생되는 증거물로 삼았다”고 폭로했다.

학교쪽은 또 안기부와 보안사, 경찰, 문교부 직원 등 ‘관련기관’에서 파견된 직원들을 위한 운영경비를 모두 부담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 한 대학의 ‘87년 2학기 학원대책’ 회의록을 보면, 학교쪽은 관계기관 직원들과 회의를 열면서 음식값은 물론 10만~20만원의 활동비까지 쥐어줬다.

한 교직원은 “기관원들은 수시로 회의를 열어 학내 정보를 교환하는 ‘공생’ 관계였지만, 또한 새로운 정보를 찾거나 사건을 ‘엮기’ 위해 물밑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과 6·29 선언을 거치면서, 서슬 퍼렇던 학원통제가 조금씩 약화되자 대학쪽도 죄었던 통제의 끈을 슬금슬금 풀기 시작했다. 1987년 7월 열린 전국 국립대학 학생처장 회의결과를 보면 “학생들의 농촌활동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고, “시국 관련 징계자에 대해 관용을 베풀며”, “학생회 임원에 대해 자격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지급하도록” 하는 등 큰 변화를 보였다.

여기에다 강제징집 피해자들은 대학쪽에 징계철회와 공개사과를 요구해 일정 부분의 보상을 받아내기도 했다. 1988년, 한국외대의 ‘강제징집 피해자 일동’은 “강제휴학, 징집 당사자 및 가족들이 당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학원의 자율성을 포기한 학교 당국의 자기 반성 및 대학 본연의 임무를 충실하겠다고 서약”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학교쪽은 그 당시 학사행정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뒤, “강제징집됐던 학생들에게 졸업시까지 매학기당 수업료에 상당하는 금액을 학비보조금으로 지급한다”고 합의했다.

자료 제출 · 사과로 과거 청산해야

그러나 대학들은 과거의 ‘치부’를 가리기에 급급할 뿐, 당시 피해학생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의문사위의 자료 요구를 거부하거나 회신조차 하지 않는 상황이다.

의문사위 관계자는 “대학들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엄혹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지만, 지금이라도 관련 자료를 제출하고 당사자들에게 사과하는 것이 오히려 ‘과거 청산’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며 “대학뿐 아니라 강제징집과 관련된 유관기관들은 이에 대한 불법성을 인정하고 존안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물론 공식적인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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