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도예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오재경씨… 피나는 노력 끝에 ‘창무 점묘기법’ 개발
여주= 글 · 사진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혼을 담은 작품을 내놓고 싶지 않은 예술가가 있을까. 예술가라는 거창한 호칭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작품, 아니 ‘물건’을 만들다 할지라도 거기에 장인의 정신을 새기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도 조상의 얼을 지켜나가고 당대의 숨결을 심고 싶은 사람이라면 점 하나에라도 혼을 새기고 싶어할 게 당연하다. 무심하게 자동 물레를 돌리는 오재경(44·여주 창무도예방)씨도 그런 사람이다. 옛 ‘사기장’(도공은 일본식 표현)들이 그릇쟁이를 천직으로 알고 물레를 돌렸던 것처럼 그 역시 전승도예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전승도예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기법을 적용하는 데 골골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이겠다. 전통 그대로의 계승보다는 현대인이 전통적 감각에 공감할 만한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가업, 뒤늦게 이어받다
경기도 여주군 신륵사 부근에 자리잡은 창무도예방. 오재경씨가 작업을 하는 공간은 가마터에 대한 오랜 선입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도예방이라면 으레 산 아래에서 장작 가마를 피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예방은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있다 해도 주택가를 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허름한 공장처럼 보이는 도예방에 들어선 사람은 ‘가스 가마’ 두 기가 보란 듯이 버티고 있는 내부에서 또다시 충격을 경험할 수도 있다. 전승도예를 이어가는 도예가가 가스 가마를 이용한다는 생각에 빠지는 순간 오씨는 “장작 가마로 한번 구워내려면 2t가량 되는 소나무를 태워야 한다. 또 거기에서 나오는 그을음은 심각한 대기오염을 유발한다. 아무리 장작불에서 서서히 발색되는 ‘자연적 요변’이 있다 해도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다”며 가마의 변신은 무죄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도자기 예술은 조형과 색채의 균형 속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신석기 시대부터 도기(토기)를 만들어 일상생활에 이용한 우리 조상들은 고구려의 강건한 도기, 백제의 우아한 도기, 신라의 감각적인 도기 등 서로 다른 개성을 보이다가 고려 때 자연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비색청자를 지나, 조선 때의 순백의 백자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민족사적 수난으로 점철된 일제 때 도자기는 버려야 할 ‘민족혼의 잔재’로 취급받았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민족혼을 거세하려 해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건 있게 마련. 사기장의 맥은 오씨의 선친인 고 인석(仁石) 오대남 선생으로 이어졌다. 선친은 1981년 사망할 때까지 여주에 있는 10여 군데의 요장 가운데 하나를 오롯이 일궈냈다. 오씨가 태어나면서부터 흙과 물, 불과 더불어 지낸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다.
오재경씨는 사기장을 대물림하기까지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아무리 흙과 물, 불과 더불어 유년시절을 보냈다 해도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물려받고 싶진 않았다. 집안에서도 가업을 잇는 걸 강권하지 않았다. 사기장은 시쳇말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외톨이 장인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럽게 선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어머니 이순길씨가 숙련된 사기장으로서 요장을 이끌어야 했다. 요장은 함께 일하는 직원이 40여명이나 될 정도로 커졌지만 상업적으로 실패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거듭된 가마 실패와 재료비·인건비를 감당하느라 빚만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끝내 요장은 성업공사에 넘어갈 지경에 몰리고 말았다.
하루 3시간 자며 물레에 매달려
사실 오씨는 전국 대학생 바둑대회에서 우승까지 할 정도로 도예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가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사기장의 길에 들어선 탓에 기술적으로 모자람 투성이였다. 요장 관리 책임을 맡았지만 흙의 마력을 아는 그였기에 차츰 물레 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요장의 기본을 배워나갔다. 그에게 어머니만한 스승은 없었다. 어머니는 생활 도자기의 대중화를 이끈 주역으로 도예촌에서 손꼽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꼬박 이틀을 가마에 불을 지피시며 혼신을 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도예가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예술적으로 승화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전통에 충실했지만 현대적 감각을 지니지는 못했다. 부모님의 탁월한 기술에 나름의 예술성을 심고 싶었다.”
그렇다고 도예에 현대적 기법을 적용하는 게 하루아침에 이뤄질 리 없었다. 어린 시절 어버지의 어깨 너머로 익히고 어머니로부터 오감으로 체득한 조선시대 청화백자 기법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조차 그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처음엔 아버지 때부터 10여년 이상씩 요장에서 보낸 여러 사기장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낮에는 상업 도자기들을 수없이 만들고 밤에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한 수련의 나날을 보냈다. 하루에 3시간 넘게 자는 날이 드물 정도로 물레에 매달렸다. 88올림픽을 전후해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그에겐 자극제 구실을 했다. 여주도자기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으면서 청자·백자·분청·생활자기 등을 만드는 요장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1천여개를 헤아릴 정도였다. 문제는 천편일률적인 생활자기의 상업적 한계가 너무나 뚜렷하다는 것이었다.
오재경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여주 도예촌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묵산수 일색의 회화에 다양한 기법으로 추상화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화면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전통 산수화를 그래픽화하거나 기하학적 문양을 도예에 접목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구상·비구상을 넘나드는 그의 작업은 점묘기법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자신의 아호를 따 이름 붙인 ‘창무(蒼霧) 점묘기법’은 수많은 점을 이어 면을 만들어 가는 것으로 고도의 인내심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다. 조각칼을 바늘처럼 세밀하게 갈아 도자기의 표면을 쪼음으로써 도예의 회화성을 극대화했다. 상업 도자기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그의 예술적 집념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중국산 도자기가 쏟아져 도예촌이 ‘구조조정’되는 상황에서도 창무도예방을 꿋꿋하게 지켜내는 힘으로 작용했다.
세상이 인정하는 예술혼
오재경씨가 사기장의 길에 들어선 지 20여년. 이제 오씨는 삶과 죽음을 재생산하는 흙에 영원을 추구하는 예술성을 불어넣고 있다. 천생 흙과 물, 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예술혼을 가꿔 널리 인정받기도 했다. 현대미술대상전, 백제미술대전 등의 미술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것이다. 갈수록 그는 무심한 흙을 닮아가고 있었다. 상업적 성공을 포기하더라도 대를 잇는 도예 가문으로서 나름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요장도 단출하게 꾸렸다. 현재 그의 도예방에는 여동생 내외, 외삼촌 부부 그리고 어머니만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요즘 창무도예방 사람들은 오는 4월30일부터 5월16일까지 열리는 여주도자기박람회(http://yjceramic.or.kr)에 선보일 작품의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다. “요장에 진열된 ‘독도는 우리땅’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가업을 계승하는 사람으로서 ‘도예의 명가’를 이뤘으면 한다. 진품명품에 나오는 전통 도자기뿐만 아니라 현대 도자기의 놀라운 모습에도 관심을 기울여주기 바란다.”
[점묘기법 도자기 만들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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