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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계 교수들도 ‘삥땅’치나

등록 2004-01-16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darkblue">ㅇ대 강사가 실명으로 인터넷에 폭로 … 연구소 지원 ‘간접연구비’상납 요구 충격 </font>

국내 명문 사립대학의 한 시간강사가 인터넷에 교수들의 연구비 횡령 비리를 고발하는 글을 실명으로 올려 파문이 일고 있다. 이번 사건은 아직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교수 사회에 만연된 ‘비리 불감증’의 단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충격을 주고 있다.

ㅇ대 독문과 김아무개 강사는 지난 1월8일 학교 인터넷 홈페이지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글 4편을 실명으로 올렸다. 김 강사는 이 글에서 독문과 몇몇 교수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들이 학술진흥재단의 연구용역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연구원에게 지급해야 할 용역비를 가로챘다”고 폭로했다. 김 강사의 주장은 대학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이 파장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학술진흥재단에 해당 교수들 고발

김 강사가 주장한 교수들의 비리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교수들의 연구비 가로채기는 그동안 대기업 발주의 연구용역이 많이 몰리는 이·공계 학과에 만연된 현상으로 알려졌으나, 이번에 인문·사회 분야도 예외가 아님이 드러났다. 특히 연구 참가자가 많은 것처럼 서류를 꾸며 연구비를 부풀리는 ‘전통적 수법’과 달리, 이번에는 교수가 연구원에게 직접 ‘상납’을 요구하는 과감한 수법이 소개돼 충격을 준다.

김 강사의 주장에 따르면 ㅇ대 독문과의 연구비 비리는 이 대학의 한 연구소를 통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연구소가 학술진흥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용역을 수행하는 강사들에게 불법적인 ‘간접연구비’(오버헤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간접연구비란 학술진흥재단이 연구용역을 따낸 연구소에 주는 공식적인 지원금(전체 연구비의 10%)이다. 이 돈은 문구류 구입 등 각종 연구 관련 비용을 충당하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이 연구소는 공식적인 간접연구비와는 별도로 연구원들한테서 ‘오버헤드’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김 강사는 “독문과의 한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이 연구소를 통해 몇몇 교수들이 연구에 참가한 강사들한테서 오버헤드를 뜯어냈다”고 밝혔다. 김 강사는 “독문과 학과장인 ㅈ교수가 지난 2001∼2002년 진행된 연구용역에서 강사에게 연구비를 똑같이 나누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연구소에 오버헤드를 선불로 내라’고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학술진흥재단은 책임연구원으로 등록된 교수에게 별도의 연구비를 지급하고 있다.

김 강사는 또 “또다른 교수는 자신이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한 한 연구용역에서 학술진흥재단이 규정한 300만원만 받아야 하는데, 다른 연구원들의 인건비를 가로채 이들과 똑같이 1천만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어떤 교수는 연구소와 관련 없는 연구용역에서도 연구원들에게 10%의 오버헤드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 강사는 “지난 2000∼2001년 진행된 한 연구용역은 내가 주도한 것으로, 연구소와 전혀 무관한데도 ㄱ교수가 10%의 오버헤드를 요구했다”며 “내가 ‘다른 연구원들과 상의해서 5%를 바치겠다’고 하자, ㄱ교수가 내게 폭언을 퍼부었다”고 주장했다. 김 강사는 학술진흥재단에 해당 교수들을 고발했고, 학술진흥재단은 특별 조사팀을 꾸려 1월12일 ㅇ대학에서 현장 실사를 벌이는 등 강도 높은 조사에 들어갔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고발 내용이 사실이라면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우리도 긴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ㅇ대학 독문과 교수의 양심선언

그러나 해당 교수들은 김 강사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독문과 학과장인 ㅈ교수는 지난 1월10일 과의 전화통화에서 “연구비는 모두 영수증 처리를 했기 때문에 조사를 해보면 진실이 가려질 것”이라며 “하늘을 우러러 단 한점의 부끄럼도 없다”고 항변했다. 또다른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오버헤드는 연구원들이 연구소 운영을 위해 자발적으로 낸 돈”이라며 “교수들이 이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당 교수들의 부인에도 그동안 교수들이 연구비를 불투명하게 운영해온 것은 이미 대학가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ㅇ대학의 한 교수는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는 과거 정확한 원칙도 없이 마구잡이로 써왔던 게 사실”이라며 “지금도 그 관행에 젖어 있는 교수들이 많다”고 밝혔다. 연구원들의 연구활동에 ‘조언’을 해주면서도 연구원보다 적은 연구비를 받는 것을 교수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연구비를 지원하는 기관이 관리 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데서도 기인한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연구비 관리는 해당 대학에 전적으로 위임하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정기적으로 실사를 하지만 모든 대학을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번 사건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진위 여부에 관계없이 교수 사회의 자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대학 사회에서 ‘절대 약자’인 강사들을 착취하는 구조를 교수들이 나서서 깨뜨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ㅇ대 독문과의 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양심선언’을 했다. “강사 생활을 10년 이상 하면 가슴에 맺히는 게 많다. 대학이나 사회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교수들인데, 그들은 임용되는 순간부터 강사 시절의 애환을 싹 잊는다. 자신이 걸어온 고난의 길을 따르려는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는가. 이번 일은 김 강사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내 대학 사회 전체의 문제다. 김 강사는 전체 강사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글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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