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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생태가 아니라 사기다

등록 2026-03-27 12:49 수정 2026-04-02 14:22
2026년 3월23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키가 약 60m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안은주 나무를 죽이지 마라’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다. 김양진 기자

2026년 3월23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키가 약 60m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안은주 나무를 죽이지 마라’라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다. 김양진 기자


2026년 3월23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에는 ‘생태 기후 환경숲 조성사업 시행 중입니다’라는 펼침막이 내걸려 있었다. 그 아래로, 둘레 1m가 넘는 아름드리나무들이 밑동만 남긴 채 베어져 있었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밑동이 생전 팔팔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했다. 이날 현장을 함께 둘러본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말했다. “큰 나무들로 숲이 우거졌던 곳을 엎어버리고 꽃밭을 만든다면서 생태·기후·환경이라고 이름 붙여놓은 거죠. 예산을 따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에 저런 말을 붙였을까요. 이건 언어도단이라는 말로도 부족해요. 사기죠.”

2025년 11월~2026년 1월, 최 소장은 센터 길 맞은편 경희궁 앞 잔디밭에서 석면 조각을 발견한 뒤 조사하는 과정에서 은행나무·플라타너스·감나무·잣나무 등 수십 살 된 거목 134그루가 전기톱에 쓰러지고 있는 현장을 확인했다. 이 현장이 언론 보도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려지자 서울시는 “이미 죽었거나 병든 나무, 수형 불량 외래 수종을 적법하게 제거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건강한 나무가 대부분이었다. 1월15일 보고서를 발표하고 ‘나무껴안기’ 행사를 진행했다. 서울시가 대화에 응했고 세 차례 협의 끝에 3월19일 추가 벌목 예정이던 67그루 가운데 62그루는 살리기로 했다.

—경희궁을 자주 다니시나요.

“서울 5대 궁궐 중 하나인 경희궁은 주변이 공원으로 조성됐어요. 일제강점기 때 궁궐 건물들이 철거됐고, 그 자리에 들어선 서울고등학교가 1980년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이렇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죠. 저뿐 아니라 여기 주변 직장인들이 정서적 교감을 느꼈을 겁니다. (2025년 11월 사진을 보여주며) 얼마나 훌륭하고 예쁩니까. 그런데 이렇게 싹 베어진 겁니다. 서울시에 항의하니 거리 정비 등으로 갈 곳이 없는 나무들이 여기에 ‘두서없이’ 심어졌던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두서없으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아름드리로 자랐는데. 서울시 주장대로 고사목이면 나무 속이 뻥뻥 뚫려 있어야 하잖아요. 멀쩡한 나무가 대부분이었어요.”

—플라타너스·은행나무같이 큰 넓은잎나무들은 녹음, 열섬 완화 등 역할이 커서 도시에 꼭 필요한 나무라고 합니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서울에 나무 한 그루의 의미와 소중함을 서울시는 모르는 것 같아요. 가로수는 그야말로 시민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살아가는데, 서울시의 자세와 마음이 아쉽습니다. 서울시와 만나보니 다섯 그루는 추가로 베야 한다면서 그중 한 그루를 두고 나무 한쪽이 부러져서 모양이 보기 싫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대요. 꼭 사회적으로 무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악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 서서 수십 년 동안 자기 삶을 산 존재들이잖아요.”

—추가 벌목을 막고자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1월15일 베어질 예정이던 60m 거목 플라타너스 두 그루에 ‘우리도 서울시민입니다’ ‘우리를 자르지 마세요’라고 쓰인 ‘옷’을 입힌 뒤, 두 사람이 팔을 쭉 뻗어야 겨우 닿는 줄기를 꼭 안아줬어요. 2월26일엔 센터 회원들과 함께 ‘나무야 나무야’ 행사를 열었습니다. 옥시싹싹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폐가 망가져 세상을 떠난 배구선수 출신 안은주님이 생전에 ‘나를 위해 나무 한 그루를 심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어요. 이에 벌목 예정인 나무 한 그루를 ‘안은주 나무’로 명명하고 안아줬습니다. 또 다른 나무는 ‘이성진 나무’로 이름 붙였습니다. 18살 때 석면암 진단을 받고 16년째 투병 중인 이성진님의 이름을 땄습니다. 향린교회, 서울환경연합 등과 함께 베어진 나무를 기리는 행사도 준비 중입니다.”

—한겨레21 등 언론에 바라는 점은요.

“대단한 이슈와 투쟁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환경과 기후 문제, 그 마음과 감각을 더 많이 다뤄줬으면 합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2026년 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벌목 예정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026년 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벌목 예정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026년 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18살 때 석면암 진단을 받고 16년째 투병 중인 이성진씨가 벌목 예정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2026년 2월26일 서울 종로구 경희궁 서쪽, 18살 때 석면암 진단을 받고 16년째 투병 중인 이성진씨가 벌목 예정인 플라타너스 옆에서 펼침막을 들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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