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남부 지역에선 팽나무를 ‘포구나무’라 부른다. 해송(곰솔)만큼 짠 바닷물을 견디는 힘이 강해 포구(항구) 앞에 많이 자란다. 큰 파도를 맞아 잎이 모조리 떨어졌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성해지곤 한단다.
키 20m, 가슴높이 둘레는 7.5m, 나이 537±50살(2020년 한국임업진흥원 측정). 전북 군산시 옥서면 하제마을의 팽나무 고목도 포구 앞 나무였다. 특유의 매끈하고 밝은 회색 수피(껍질)는 여느 팽나무와 같지만, 좌우로 깊은 주름이 올올이 새겨 있다. 누가 언제 심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풍파를 견딘 세월은 분명하고 선명했다.
“옛 지도를 보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하제마을은 섬이었어요. 썰물 때 바닷물이 ‘하제 팽나무’ 앞에까지 찼던 거예요. 어선 여러 척의 뱃줄이 이 팽나무에 묶여 있었을 겁니다. 배들이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오랜 시간 수피가 뱃줄에 쓸려 이렇게 깊은 주름이 생긴 거죠.”
2023년 3월8일 ‘하제 팽나무’ 앞에서 군산 지역 역사·생태를 연구하는 양광희(54)씨가 눈앞에 철렁이는 파도를 떠올리듯 이렇게 설명했다. 양씨는 1년가량 고지도와 역사기록을 연구해 2021년 3월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를 냈다. 이 책은 그해 6월 ‘하제 팽나무’가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는 중요 근거가 됐다.
그런데 이런 거목과 함께 살았던 마을은 황량했다. ‘하제 팽나무’ 앞 공회당(마을회관, 이후 옥봉초등학교 선연분교)을 비롯해 가옥은 대부분 철거됐다. 포장된 빈 골목길만 덩그러니 남았다. 잡목과 잡초가 우거졌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의인도’라는 섬이던 하제가 육지에 편입된 건 1919년. 불이흥업(주)이 옥구군(나중에 군산시로 통합) 해안 지역에서 간척·개간 사업을 벌이면서다. 이 회사는 일본 자본으로 세워졌다. 이 사업은 1923년까지 이뤄졌다. 이렇게 조성된 2500정보(약 2479만㎡) 규모의 ‘불이옥구농장’은 죽도록 일만 하고 약속받은 임금은 제대로 못 받은 조선인 노동자 수천 명의 한이 서린 땅이다.
“어른들 얘기를 들었어요. 여기 하제항에서 나는 조개껍데기를 한 짐 짊어지고 날라서 바닥에 층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또 한 짐 날라다 덮은 뒤 여러 번 물을 뿌려 짠 기운을 뺐다고요. 죽도록 고생하면서 간척했던 땅이라고요.” 2023년 3월8일 하제마을 들머리의 지금은 폐쇄된 ‘하제 버스 종점’에서 만난 김중권(73)·최이분(73) 부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부부는 하제마을에서 나서 함께 자라 결혼했다.
하제의 전성시대는 1970년대였다. 개량조개, 명주조개로도 불리는 노랑조개 생산이 크게 늘었다. 전국 유일의 어패류 위판장이 하제에 설치되기도 했다. 조개가 얼마나 많았는지 당시 언론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매일 320여 척이 조업, 연간 9200여 톤의 노랑조개를 받아들이고 있다. (…) 조개껍데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포구가 메워지고 있어 조개잡이 어선들의 입출항이 점점 어렵게 됐다.”(<조선일보> 1977년 8월3일치) 최이분씨는 “그때 우리 마을 버스 종점 주변에 제과점, 다방, 당구장이 있었고 술집도 세 곳이나 있었어요. 개도 만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그랬어요”라고 돌이켰다.
1970년대 하제마을 이장을 지낸 최기권(79)씨는 “노랑조개를 해방조개라고 불렀지요. 해방되면서 갑자기 나타났다고요. 전남·충남 등지에서 일꾼이 몰려와 집집이 방 두세 칸을 세낼 정도로 사람이 많았어요. 마을 인구가 3천 명이 넘어서 면 단위 인구와 비슷했어요”라고 말했다. “팽나무와 그 뒤에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앞에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도 지내고 차례도 지냈어요. 매년 정월 대보름 전후로 풍물을 치면서 집집을 방문해 곡물과 돈을 걷는 걸궁굿을 지냈어요. 이 돈으로 마을 대소사를 치렀죠.”
상황은 급변했다. 2000년 하제 북쪽 군산 미군기지(공군)의 탄약고가 확장됐다. 안전거리 확보 문제로 2002년 하제마을에 대한 정부(국방부)의 수용이 결정됐다. 2006년엔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됐다. 바다와 멀어져버린 하제항의 ‘어항 지정’이 해제됐다. 생업을 잃은 주민들은 2009년부터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664가구가 터전을 떠났다. 김중권·최이분 부부도 2017년 떠났다. 현재 하제마을에는 2가구가 철거되지 않고 남았지만, 항시 사람이 살고 있진 않다.
공동체가 무너진 빈 마을로 사람들을 다시 끌어모은 건 ‘하제 팽나무’였다. 2018년 11월 ‘군산미군기지 우리땅찾기 시민모임’(군산시민모임)이 개최한 ‘안녕하제 전시회’에 이재각 사진작가의 ‘하제 팽나무’ 사진이 큰 관심을 불러모았다. “2008년 하제마을에 처음 갔을 땐 집이 빼곡해서 팽나무가 상대적으로 눈에 덜 띄었던 것 같아요. 10년 만인 2018년에 다시 찾았는데, 마을 자체가 황량하게 사라졌고, 오랫동안 주민들과 공존해온 팽나무만 우뚝 서 있었는데 존재 자체가 달라 보이더라고요.”(이재각 사진작가)
1997년 군산~제주 민항기 활주로 사용료 인상 반대 운동에서 시작해 전투기 소음, 기름 유출 등 미군기지 감시 운동으로 이어진 군산 지역 평화운동에서, ‘하제 팽나무 보존’이 새 이슈로 떠올랐다. 구중서 군산시민모임 사무국장이 말했다. “20여 년 미군기지 시민감시 활동을 평가하는 성격의 전시회를 진행했어요. 이재각 작가의 ‘하제 팽나무’ 작품을 전시하면서 그간 몰랐던 팽나무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군산시민모임 상임대표인) 문정현 신부님이 팽나무를 보러 가자고 하셨어요. 가시더니 ‘팽나무 할아버지가 동네를 이렇게 다 빼앗기고 난리가 났는데 어디 가서 뭐 했느냐며 혼내시더라. 한참을 서서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2020년 ‘국방부 쪽에서 하제를 미군에 공여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어요. ‘하제 팽나무’가 사라질 상황이었죠. 2020년 10월 팽나무를 중심으로 한 ‘팽팽문화제’를 열었어요. 2023년 2월까지 문화제를 스물아홉 번 진행했습니다. ‘하제 팽나무’가 하나의 평화적 아이덴티티가 된 거죠.”
2022년 2월 군산시는 문화재청에 ‘하제 팽나무’를 천연기념물로 추천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지낸 목재조직학 권위자인 박상진 경북대 명예교수는 ‘하제 팽나무’에 대해 “나이로 보나 서 있는 위치로 보나 천연기념물로 값어치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지금은 쇠말뚝을 주로 쓰지만, 남부 지역 해안가에선 팽나무를 계선주(배를 묶는 기둥)로 많이 활용했어요. 나무 밑동이 꼬이고 비틀리고 울룩불룩한 건 팽나무가 고목이 되면서 곁뿌리가 굵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더 심하게 깊은 주름이 잡혔어요. 일제강점기 간척지로 매립되기 전 바닷물이 나무 아래까지 들어올 때 (줄기가) 밧줄에 시달리다 상처가 생기고 딱지가 앉은 아픔을 수백 년 반복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죠.” 최기권씨도 “어른들로부터 팽나무에 배를 묶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전국에 천연기념물 팽나무는 모두 세 그루인데, 전북 고창군 부안면 수동리 팽나무도 간척지 매립 전 배를 묶어두던 계선주 구실을 했다.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됐고, 천연기념물 지정이 추진되고 있다. ‘하제 팽나무’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나병호 군산시 문화예술과 학예연구사는 “‘하제 팽나무’가 유명해지면서 주한미군 쪽이 ‘설사 하제마을이 공여되더라도 팽나무가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연락했다”며 “팽나무 반경 300m를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2년 전부터 국방부 쪽과 협의 중인데, 공문을 수차례 보내도 답변이 없어 조만간 군산시 조례에 따라 독자적으로 보존지역 선포를 할 예정이다. 팽나무 수관(나무의 잎과 가지가 달린 부분)과 뿌리가 뻗은 부분까지만이라도 공여되지 않고, 시민들이 언제든 가서 감상할 수 있도록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군산시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날 만난 ‘하제 팽나무’는 이른 봄이라 아직 잎사귀는 없었지만 하늘로 높이 뻗은 가지들이 촘촘했다. 팽나무는 오래 살고 키 큰 나무라는 점에서 흔히 느티나무와 비교된다. 느티나무와 친척으로 오해해서 느릅나무과로 분류됐다. 하지만 달콤한 육질을 가진 팽나무 열매(핵과)와 바짝 말라 씨앗 주변에 날개 모양의 얇은 막이 있는 느티나무 열매(시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실제 2003년 디엔에이(DNA) 염기서열 분석에 따른 분류체계(APG)에 따라 팽나무 열매는 삼과로 분류됐다. 대마초나 맥주의 원료인 홉과 친척이라는 의미다.
“과거엔 인위적으로 형태를 보고 느릅나무과·뽕나무과·팽나무과 등으로 분류했지만 최근에 팽나무가 적응한 방식이 삼과의 계통을 따른 것으로 그룹핑됐어요. 팽나무에는 수꽃과 양성화가 함께 피는 등 여러 특징이 있지만 가장 독보적인 매력은 씨앗을 싼 내과피가 달팽이 껍데기 같은 ‘아라고나이트’라는 광물질이라는 점이에요. 이 광물질 때문에 팽나무 씨가 동물의 소화기관에서 살아남고 발아력은 더 높아져요. 살구·자두 같은 식물의 내과피는 보통 목질, 즉 리그닌이에요. ‘팽나무가 지구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갖은 방법을 쓰다가 이렇게까지 적응해왔을까’라고 생각하면 정말 대단해요. 팽나무는 나비를 키우는 나무이기도 해요. 왕오색나비 애벌레에게 잎을 내주면서 공생하는 관계로 진화했어요. 멸종위기종인 비단벌레도 팽나무에 기대 살지요.”(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
<600년 팽나무를 통해 본 하제마을 이야기>를 쓴 양광희씨는 좀더 전문적으로 생태 공부를 하려고 다니던 공공기관을 2022년 말 그만뒀다. “‘하제 팽나무’가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미군에) 공여되고 길이 폐쇄되면 하제마을의 역사는 완전히 사라지는 겁니다. 그럼 이곳은 알 수 없는 유령 공간이 되는 거예요. 유령이 되는 것만은 막아야 하잖아요.”
군산=글·사진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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