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제1393호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표지 이미지.
망치로 머리를 가격하고, 흉기로 화장실에서 주검을 토막 내고… 검사는 낮은 목소리로 몇 시간째 공소사실을 건조하게 읽어 내려갔다. A, B, C, D… 피해자를 부르는 호칭만 11번째 바꿔가면서.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구매자를 만나러 갔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마사지사 등 여성 11명.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그들이 죽어가는 순간으로 강제소환당해 법정에서 기록했다. 유영철은 “여자들이 함부로 몸을 놀리거나 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유영철은 그저 ‘연쇄살인범’으로만 불렸다. ‘여성혐오’라는 말조차 아예 들어본 적 없던 2004년 가을, 한겨레신문 사회부에서 법원을 출입할 때였다.
‘우리는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포스트잇에 쓰인 이 문장을 보고는 머리를 망치에 맞은 듯 멍해졌다. 그래, 맞다. 한밤중 인적이 드문 곳을 혼자 걸어갈 때도,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 때도 항상 공포에 떨거나 불안해했다. 막연한 공포였다. 그러다가 그날에야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공포의 실체를 깨달았다. 인파가 북적이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도 한순간 살해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자는 상가 공용화장실에서 공격하기 쉬운 여성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20대 여성 피해자를 무참히 살해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모인 사람들은 2016년 봄, ‘묻지마 살인’ 대신 ‘여성혐오 살해’라고 이 사건을 불렀다. 비로소 ‘페미사이드’(여성을 일컫는 라틴어 ‘femina’와 살인을 뜻하는 영어 ‘homicide’의 합성어)라는 개념이 국내에도 알려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 뒤 한국의 ‘페미사이드’를 심층 취재해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을 깊이 품게 됐다. 언론은 강남역 살인사건, 아내살해, 스토킹살해 사건 등을 경쟁적으로, 선정적으로 그때그때 보도하지만 그 죽음의 실체를 깊이 들여다보고,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죽음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국내 학계에서도 관련 연구는 많지 않고, 경찰청 범죄통계를 포함한 공식 통계조차 누가, 어떤 관계의 여성을 죽이는지 따로 기록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통계도 연구도 보도도 없으니, 페미사이드는 항상 “여성혐오 살해가 아니라 그냥 살해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몬다” 등 소모적인 논쟁, 첨예한 젠더갈등의 단골 소재밖에 되지 못한다.
광고
나는 그저 마음에만 품고 있던 심층기획 취재를 <한겨레21> 엄지원·박다해·고한솔·이정규 기자가 실제로 해냈다. 아내살해, 교제살해, 성매매 여성 살해, 여성노인 살해 등 페미사이드의 대부분 유형을 모두 포괄해 종합적으로 취합·기록한 국내 첫 보도다. 이를 위해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1심 판결이 선고된 427건의 판결문을 모으고 3500쪽 분량의 기록을 분석했다. 같은 기간 언론보도를 검색해 남성이 여성을 죽이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73건도 취합했다. 페미사이드로 엄마를 잃거나 딸을 먼저 떠나보낸 피해자 유족들도 만났다. 이렇게 <한겨레21> 기자들이 두 달 가까이 매일 야근하고 주말도 반납하며 분석한 결과물이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으로 모였다. 살릴 수 있었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죽음을 막지 못한 이유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번호에 이어 다음호에선 형사사법통계시스템에 기록되지도 못하는 ‘들리지 않는 비명’ 편이 실린다.
이번호 표지에 그려진 ‘빨간 신발’은 살해당한 여성들을 상징한다. 빨간색은 살해당한 여성이 흘린 피, 신발은 그들의 부재를 뜻한다. 페미사이드에 대한 비폭력 항의로 멕시코 등에서는 수백 켤레의 빨간 신발을 전시하는 퍼포먼스가 해마다 진행된다. 페미사이드 심층기획의 일환으로, 지난주 ‘살아남은 당신의 이야기’를 모으는 특별 웹페이지(speakup.hani.co.kr)에 이어 이번주에는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고 나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지가 무엇인지를 독자와 함께 경험하는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도 문을 연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이로서 잊지 않고 계속 기록하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광고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한겨레21 페미사이드 특별웹페이지 stop-femicide.hani.co.kr
※여성폭력으로 긴급한 구조·보호 또는 상담이 필요한 경우 여성긴급전화 ☎️1366 에 전화하면 365일 24시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트럼프, 한국에 25% 상호관세…중국 34%, 일본 24%
윤석열 파면되면 방 뺄 준비해야 하는데…“김성훈이 말도 못 꺼내게 해”
[속보] 도이치 주가조작 유죄 확정…김건희 재수사는
한국 상호관세 25%…‘FTA 비체결’ 일본 24%보다 왜 높나
4·2 재보선 민주당 거제·구로·아산서 승리…부산 진보교육감 당선
박지원, 4월4일 탄핵 선고에 “4, 4, 4…틀림없이 죽는 거다”
[단독] 문상호 “노상원, 계엄 실패 뒤 ‘모두 김용현 지시라 말하라’ 했다”
[단독] 요양원서 심혈관 약 누락…80대 입소자는 석 달 만에 숨졌다
[속보] ‘당원 매수’ 홍남표 창원시장 당선무효형 확정
‘가해자’ 윤석열은 놔두고, 왜 ‘피해자’에 승복을 요구하나 [뷰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