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019 기자의 서가를 공개합니다

<한겨레21>의 상상력이 머물렀던 9권의 책
등록 2019-12-27 10:55 수정 2020-05-03 04:29
.

.

기자들의 서가가 궁금하다.

올 한 해 어떤 책을 끼고 살았을까. 기자 9명이 9권의 책을 공개한다.

말과 삶이 따로 노는 진보, 공유가 아닌 공유경제, 집이 복지가 된 세상을 통찰한 굵직한 기사의 뿌리를 엿볼 수 있다. 판을 뒤엎은 여성들의 이야기, 배 만드는 노동자 9명의 구술집, 등산 식욕의 경지를 그린 만화, 밥 한 끼의 소중함을 따뜻하게 전하는 책에도 기자들의 손때가 묻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으며 글 쓰는 고통을 달래고, 기사가 안 써질 땐 킬킬거리며 유쾌한 소설책을 읽었단다. 책장을 여니 사람의 결이 보인다.

구둘래 (2017~)

가을 지리산을 같이 오른 친구의 배낭 속은 눈부셨다. 지리산에서 스파게티를 해먹었다. 스파게티 면을 점심에 산장에 들렀을 때 지퍼락에 물을 부어 불린다. 저녁에 도착한 산장에서, 불린 면을 데운 뒤, 미리 만들어온 라구소스를 부어 먹는다. 친구는 술도 포도주를 싸왔다. 다소 비실용적이지만 어울리게 먹기 위해서다. “먹을 거 말고 뭘 싸가야 할지…”라고 한 친구는 등산바지를 새로 사고 배낭은 빌리고 헤드랜턴도 없었지만 음식 준비에서는 온 산천을 통틀어 최고였다.

그가 이런 베테랑의 풍모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라는 등산 ‘식욕’ 만화 때문이었다. 쇠고기고추장과 쇠고기된장, 누룽지 그리고 참치캔 정도에서 상상력이 머무르던, 지리산 네 번 등반 경험자인 나에게도 무궁무진한 먹을 것의 세계가 열렸다. 이 만화책의 등산요리를 실험하기 위해 한 달 뒤 다시 지리산행을 감행했다. 여러 채소와 새우를 삶고 그것을 올리브유에 재워 지퍼락에 넣고, 언 식빵을 함께 가져갔다. 같이 간 초보 산행자가 놀라워하는 것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이 만화책의 주인공처럼 ‘여성 단독 등산가’가 되기 위해 다시 한번 지리산 단독 등반을 예약했지만, 망설이다 취소했다. 지리산에 눈이 내렸다는 뉴스를 보고서다. 내년에는 다 먹고 말 거야.

.

.

박태우 (2019)
연초 카풀에서 연말 타다까지 2019년은 ‘탈것’(모빌리티)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한 해였다. ‘전통산업’인 택시업계에서 기사 여러 명이 목숨을 끊는 가운데, ‘신산업’ 모빌리티 기업들은 택시에 대한 소비자의 불만을 내세우면서 전세계 700개 도시에서 서비스되는 우버의 편익과 유휴자원의 효율적 활용을 통한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공유경제를 내세워 갈등을 돌파하려 했다. 모빌리티뿐만 아니라 배달대행 등 많은 플랫폼기업이 공유경제를 내세웠다. 플랫폼기업의 주장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공유경제 플랫폼이 변화시키는 노동의 법칙’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 이 많은 도움을 줬다. 기술의 사회문화적 현상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테크놀로지 에스노그라퍼’ 알렉스 로젠블랏이 썼다. 플랫폼기업이 공유경제를 어떻게 신화화하고 있는지를 통찰력 있게 드러내고, 알고리즘이 ‘사용자 없는 노동자’라는 플랫폼노동자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제대로 보여준다. 플랫폼노동자 보호에 관한 논의가 앞으로 더 확산될 것으로 보여, 2020년에도 이 책은 책장에 꽂혀 있을 듯하다.

.

.

방준호 (2018)

서른 중반, “아파트 한 채는 사라”는 어머니와 입씨름하는 일이 잦아졌다. “나 돈 없어.” ”대출받아.” 집이 최고라는 고집, 이해 못할 바는 아닌데 이래도 될까, 싶다. 어쩌다 우리는 복지 아닌 집을 내 평생 책임질 단 하나의 보루로 점찍게 됐나. 세금 조금 더 내는 것은 그리 아까운데, 시원하게 수억원씩 대출받는 게 대수롭지 않은 세상인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를 꺼내 든다.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조세, 재정, 금융 정책을 사료를 바탕으로 꼼꼼하게 되짚는다. 자산이 복지의 대체 수단이 된 현실로 이어진다. 제목이며 주제며 딱딱해 보이는 책을 소설처럼 아꼈다. 밑줄 치고 색인 테이프 붙이고, 커피 흘려 더럽히며 아끼는 책에 해댔던 갖은 짓을 이 책에도 했다. 저자인 김도균 경기연구원 전략연구부장과 통화하면서 묘한 팬심에 목소리마저 떨렸다. 정책 연구 서적 두고 이 무슨. 그건 나와 엄마의 신경전을 비롯해 수많은 보통 사람의 서사를 상상하게 하는 묘한 힘을, 책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터다. “엄마가 집 한 채에 몰두하는 건 산업화 시기의…” 잘난 척할 역사적 사실을 잔뜩 얻긴 했는데, “이 나라에서 집 없이 늙어서 어쩌려고?” 강력한 반박에 답할 말은 아직 궁하다.

.

.

변지민 (2019)

2019년 한국 사회를 정확히 겨냥한 책이었다. 저자 리처드 리브스(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미국 사회를 분석해 ‘상위 20%가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지’ 밝힌 이 책은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저자가 집중하는 대상은 소득 상위 20%의 중상류층이다. 사회의 모든 특권을 독차지하고 계층이동 사다리를 걷어차면서도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이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중상류층은 하위 80%와 격차를 계속 벌리며 사회 불평등을 강화하지만,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상위 1% 상류층 탓만 한다. 그리고 자신과 자녀의 성공을 전적으로 본인의 재능과 머리와 노력 덕분이라고 굳게 믿는다.

저자는 자신 또한 ‘상위 20%’에 속한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스스로에게 먼저 책임을 묻는다. 사회 변화는 자기 성찰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인상 깊다. 이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책 와 함께 기자의 책상 한쪽을 오래도록 차지했다. 말과 행동이 너무 차이 나게 살지는 말자는 뜻에서.

.

.

이승준 (2019)

취재가 안 되거나 기사가 안 써질 때 소설책을 찾는다. 올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박상영 작가의 을 재밌게 읽었다. 소설은 성소수자의 연애, 성정체성으로 인한 주변과의 불화, HIV 감염 등 심각한 소재를 다루지만 꽤나 유쾌한 어조를 유지한다. 특히 인물들의 연애가 정말 곁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성애자의 연애 이야기를 읽을 때처럼) 킬킬거리며 때로는 마음을 졸이며 술술 책장을 넘겼다.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니 ‘소설 속 현실’이 자꾸 겹쳐졌다.

은 여성·장애인·성소수자 관련 의제를 한발 앞서 던져왔다. 이들의 현실이 심각하다보니 기사도 심각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소설 밖 현실도 유쾌할 수 없을까.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평범하게 취업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게 더는 ‘기삿거리’가 안 되는 날은 언제쯤 올까. 소설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올해 특히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다. 내년에는 올해 만났던 취재원들이 소설처럼 유쾌하고 낭만적으로 살 수 있는 사회로 한 걸음 더 나아갔으면….

.

.

장수경 (2018)

2019년, 4월11일은 여성 해방의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헌법재판소는 1953년 제정한 ‘낙태죄’에 2012년 합헌을 내렸다가, 약 7년 만인 이날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날 헌재 결정 뒤 여성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더는 정죄당하지 않아도 됨을 기뻐했다. 사회는 그동안 생명권과 선택권이라는 이분법으로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여성들에게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왔다. 이 책은 수년 동안 낙태죄 폐지에 힘쓴 여성 활동가, 연구자, 변호사, 의사 등이 여성의 몸을 ‘배틀그라운드’(전장)로 선언하고, 태아를 떨어뜨린다는 뜻인 ‘낙태’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여성의 성과 재생산 권리를 의료, 인권, 종교 등의 관점에서 짚었다.

판을 뒤엎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제1259호 표지이야기에 실렸다. 이 책을 기획하고 쓴 ‘성과재생산포럼’(현재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Share’로 이름을 바꿈)은 12월10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표창을 받았다.

.

.

하어영 (2016)

12월17일 일본 도쿄에는 비가 내렸다(포털 날씨 검색에 그렇게 나온다). 하루키는 오늘도 달렸을까. 하루키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커피를 내리고, 200자 원고지 20장을 쓴 다음 툭툭 털고 일어나 10㎞를 가뿐히 달렸을까. 15년차 직장인이 40대 중반에 재능이 없다는 걸 알았는데, 그것도 모자라 꽤 오래전부터 나 말고 동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아버렸을 때, 책을 폈다.

책에서 하루키는 “두뇌의 명석함만으로 일할 수 있는 햇수는 기껏해야 십 년 정도”라고 말한다. 나에게 ‘명석함’이란 어디에 붙어 있는 성질이란 말인가. 이미 15년이나 일해버린 걸. 하루키는 좀더 나간다. “기한을 넘어서면 명석함을 대신할 만한 좀더 크고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미 기한을 넘어섰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느 시점에 날카로운 면도날이 잘 갈린 손도끼로, 그러다 잘 갈린 도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는 대목에 이른다. 손도끼는 고사하고 면도날부터 모르겠다. 이 빠진 식칼인가, 녹슨 과도인가. “중년기로 접어들면 유감스럽게도 체력은 떨어지고 순발력은 저하하고 지속력은 감퇴한다. 작가는 군살이 붙으면 끝장”에 이르면 자학은 화룡점정을 찍는다. 쳇, 난 태어나면서부터 우량아였다고. 이제, 자판에 손 올릴 용기가 조금 생겨난다.

.

.

조윤영 (2019)

이 책은 2017년 5월1일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일어난 크레인 충돌 사고를 목격한 이후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노동자 9명의 이야기를 담은 구술기록집이다. 배 만들던 노동자들의 인생과 노동, 상처를 더듬는다. 제1258호 표지이야기 ‘2년 전 그날 이후’에 대한 사전 취재를 하면서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에서 제공받아 읽게 된 구술기록집 초안은 ‘그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노동자들이 겪는 사고 목격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도와줬다. 이후에도 저마다 이유로 전국 곳곳에서 조선소로 흘러 들어온 이들의 삶에 꾸준히 관심 갖게 해주었다. 그들의 증언과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고 이 책을 곁에 뒀다.

.

.

허윤희 (2018)

“(밥) 한술 더 떠봐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9년 전, 암 투병을 하던 아버지는 기력도 식욕도 잃었다. 어머니는 매끼 버려지는 밥상을 차렸다. 그래도 매일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 일기’라는 부제를 단 를 읽으며 그때의 밥상이 떠올랐다. ‘암 이후의 삶’ 취재를 하고 온 뒤에도 이 책을 펼쳤다.

인문학자 강창래씨는 암 투병 중인 아내를 위해 요리하며 써내려간 메모를 엮어 책을 냈다. 그는 “먹을 수 있는 게 점점 줄어드는 아내가 먹을 수만 있다면”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라면밖에 끓일 줄 몰랐던 그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능숙한 요리사가 된다. 망고주스를 만들고 시금치나물을 무치고 콩나물국을 끓이고 동태전을 부친다. 그는 요리하며 지문이 사라지고 살갗이 벗겨졌다.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을까. 아픈 아내를 돌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글은 고통도 슬픔도 드러내지 않고 담백하다. 그런데 읽는 이를 울린다. 마지막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그가 읊조린다.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하던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그의 아픈 말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밥을 먹는 그 한끼 한끼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