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나의오래된물건] 수학 시간과 헌혈

등록 2006-08-18 00:00 수정 2020-05-02 04:24

▣ 이순열 경기 의정부시 의정부동

지금의 강산이 70%가량 바뀌기 전 늦은 가을날 난 처음으로 헌혈을 했다. 나의 헌혈로 남을 구하겠다는 숭고한 정신도, 전화카드나 과자와 음료를 받고 싶다는 평범한 목적도 아닌 단지 당당하게 수업을 빠지고픈 욕구(수학 숙제를 안했다)에 학교로 찾아온 헌혈 버스에 몸을 실었다.
처음 한 헌혈의 느낌은 ‘잔뜩 긴장한 뒤 만족감이 밀려왔다’랄까? 100원짜리 모나미 볼펜 심만큼 두꺼운 바늘을 봤을 땐 그냥 수업을 들을걸 하는 후회와 공포감도 들었지만 막상 하고 나니 아프지도 않고 겨우 20여 분 투자로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보람도 생겼다. 물론 수학숙제 건도 무사히 넘어갔다. 그 뒤 ‘헌혈이 이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두 달에 한 번씩 꼭 해서 봉사활동 점수를 챙겨 대학 가는 데 보태자!’ 하는 다소 기특한 결심도 했지만 역시나 나의 두 번째 헌혈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나의 두 번째 헌혈은 첫 헌혈 뒤 두 달이 지나서가 아닌 3년 뒤인 2002년 8월7일 춘천 102보충대에서였다. 이때는 평범하게도 전화카드가 목적이었다. ‘군대에서라도 열심히 헌혈을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공교롭게도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이 강원도 화천으로 말라리아 주의지역인 탓에 헌혈 차량이 잘 오질 않았고 2년1개월의 군생활 동안 한 번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 등록헌혈 회원으로 가입해 무려 7년 전에 세웠던 계획을 드디어 실천에 옮겼고, 그것도 두 달에 한 번이 아닌 2주에 한 번이 가능한 성분헌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3천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받고, 꾸준한 헌혈로 상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취업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순하면서도 서글픈 생각이 있다. 뭐, 가끔은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학교 교재 값도 만만치 않고, 취업을 위해선 뭐든 해야 할 세상이다 보니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무튼 난 99년 11월3일 내 피와 체벌을 바꿨고 지금도 열심히 뭔가와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추신: 등록헌혈 회원에 가입하시면 5천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혈소판 헌혈 역시 5천원짜리 문화상품권을 주지요.)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