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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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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오래된물건 ]“저승 가면 대야 물만큼 마신다”

등록 2006-04-06 00:00 수정 2020-05-03 04:24

▣ 고정희/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평촌동

쓰던 물건이 고장나지 않는 이상 새것으로 바꿔쓰지 않는다. 근검과 절약 정신에 기반한다기보단 새로운 도구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해 그 일이 불편하고 두렵기 때문이다. 사고방식이 고루하거나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는 나이는 아니지만 물건에 대해서만큼은 비슷한 연령대 사람들에 비해 유독 구닥다리다. 남들은 이사할 때면 새 가구를 사들여 살림살이를 간다든데 몇 번 이사를 하면서도 새것으로 갈아본 경험이 없다. 우리 집엔 인테리어라는 게 없다. 쓸모없어졌을 때 하나씩 교체되다 보니 가구색과 모양이 완전히 따로 논다. 가구회사나 전자제품 회사 영업사원이 “사모님, 이 기회에 한번 싹 바꿔보시죠?”라고 말할 만하다. 텔레비전, 냉장고, 비디오, 전자레인지, 수납장 등 십 년 넘은 것들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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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아이들은 자기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들이 뭐뭐가 있는지 세보곤 하는데, 연세가 많은 물건들 가운데 으뜸인 것이 바로 이 알루미늄 세숫대야댜. 우리 집에 오는 이들마다 꼭 이것을 보고 한마디씩 한다. 대부분 제발 버리라고 말한다. 남의 말을 잘 듣는 나지만 이 말만은 듣지 않고 지금껏 세숫대야를 간직하고 있으니, 애당초 버릴 이유가 없다.

남편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며 자취생활을 할 때 구입한 물건이다. 25살이 넘었지만 아직도 정정하기만 한데 왜 버려야 하는가. 세월을 무시할 수 없어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퇴색됐지만 아직도 제 몫을 해내는 데 모자람이 없다. 더러운 빨래를 삶느라 불에 달구어도 구멍난 데가 없고, 무겁게 굴지도 않고 욕실에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마 못쓰게 될지라도 버리지 못하고 내 살림살이의 산 증인인 양 간직할 것 같다. 남편의 것이었다가 이제 내 것이 된 세숫대야. 오늘도 쭈그리고 앉아 대야에서 머리를 감는다.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세수를 하면, 물을 아껴쓰란 뜻으로 “저승에 가면 대야에 받아 썼던 물만큼 마시라고 한다”던 어른들의 예전 말씀이 쟁쟁하게 들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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