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버드나무에 천연색으로 새겨진 지리산 화엄사의 일주문. 우리 집에서 제일 오래된 물건이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시골집 마루 벽에 걸려 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어언 41년. 긴 세월 묻혀 있다가 우연히 지난해 곰팡내 나는 궤짝 속에 모셔진 이 족자를 발견했다. 나는 신안 앞바다에서 고려시대 청자라도 발굴한 듯 다른 형제들의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지에 곱게 싸서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거실 벽에 걸린 족자를 쳐다볼 때마다 어디선가 구형 라디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개인용 진공관 라디오가 우리 동네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 소유주는 당연히(?) 이장이신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두루마기 속에 한 자가 넘는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를 품고 다니시면서 라디오 소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동네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셨다. 아버지에 대한 몇 안 되는 기억 중 가장 강렬하게 남겨진 라디오 소리가 족자에서 재생된다. 중학교를 일본에서 다니신 아버지는 신문물에 일찍 눈을 뜨셨고 평생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고 한다.
이 족자 앞면엔 한문으로 ‘화엄사’라고, 뒷면에는 ‘1956년 여름’이라고 쓰여 있다. 1956년이면 내가 태어나기 두 해 전이다. 아버지는 지리산 화엄사 좌대에서 파는 이 족자를 몇 원에 사셨던 걸까. 다른 토산품이나 사찰용품도 있는데 왜 이 족자가 아버지의 손길을 끌었을까. 지리산엔 왜 오르셨던 걸까. 그때 아버지 나이 겨우 서른다섯. 뭐가 그리 급해 마흔을 넘기고 부랴부랴 황천으로 가셨을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라디오 소리에 묻어난다. 일본에서 해방을 맞고 재산과 생활의 거처를 고스란히 남겨둔 채 맨몸으로 귀국선에 올랐다는 아버지. 내가 일곱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두루마기 속 라디오 소리를 이 족자 속에 남겨두고 말이 없으시다.
전희식/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황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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