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입니다. 새 학기를 맞아 아이들과 함께 방을 정리하다가 올해 중2가 된 딸아이의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썼지요. 아주 낡았지만 아직은 빠진 색 하나 없는데다 멀쩡한 색깔들이 훨씬 많이 남은, 그래서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곧 5학년이 되면 또 쓸지도 모르는, 여전히 쓸모있는 파스텔입니다. 물론 그것뿐이라면, ‘나의 오래된 물건’과는 상관이 있을 리 없겠지요.
문교 파스텔입니다. 지금도 이 회사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상자 안쪽에는 ‘파스텔의 역사’ ‘파스텔이 애용되는 이유’ ‘파스텔이 학교 미술의 재료로 사용하게 된 이유’ 같은 이야기들이 작은 글씨로 인쇄돼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문교화학공업사’에서 만들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겉면에 이 파스텔이 지나온 길이 보입니다. ‘김지원/ 샛별’이라고 매직으로 쓴 글씨가 있고, 그 아래 볼펜으로 써진 글씨가 어지럽습니다. ‘신명여중/ 1학년 2반 13번/ 최정애’라고 적힌 잔 글씨를 북북 긋고 무리하게 바꿔쓴 이름은 ‘중앙/ 1학년 2반 51번/ 최기홍’입니다. 1975년에 중학교 1학년이었던 제가 쓰고는 3년 뒤에 중1이 된 남동생이 받아서 쓴 내력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이 은은한 색의 파스텔 한통을 들고 너무나 신비롭게 바라보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와아, 30년 전인가요? 세상에!
그때는 잘 쓰기보다는 아끼느라 애썼던 듯합니다. 파스텔에 가는 마음이 유난했던지, 동생이 다 쓰고 일없어지자 다시 챙겨두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썼고, 그러고는 그만 쓸 일이 없어졌지만 갖고 있다는 것도 좋았던가 봅니다. 결혼하면서 새살림을 차리면서도 이게 따라온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고 피식 웃음이 납니다.
웬걸, 세월이 흘러 딸이 초등학생이 되고, 5학년 때 파스텔이 필요하니 사야겠다지 않습니까! 그때 이 파스텔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거지요. 딸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파스텔을 쓴다며, 조금도 꺼리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주었지요. 이제 곧 아들이 이어서 쓰게 될 때, 하나 더 보태질 이름을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아들, 딸과 둘러앉아 이 파스텔의 내력을 이야기하고 있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집니다.
최정애/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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