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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 표지는 너무 착했다?

등록 2006-08-09 00:00 수정 2020-05-03 04:24

‘폭력 합리화’측면에서 부담도… 채찍이나 가죽끈은 너무 기성화된 욕망으로 읽혀…교육계의 고질적 병폐 다룬 ‘급식 잔혹사’와 ‘일곱살의 트라우마’는 반가운 기획

▣ 김수현 기자 groove@hani.co.kr

장마가 끝난 7월3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4층 회의실에 12기 위원들이 모였다. 7월에 발행된 네 권의 가운데 학교급식 문제를 다룬 617호 ‘급식 잔혹사’와 초등학교 저학년 체벌 문제를 파헤친 619호 ‘일곱 살의 트라우마’에 관심이 몰렸다. 교육계의 고질적인 병폐에 대한 독자들의 깊은 우려를 대변했다.

초등생과 중학생 구분해줬더라면…

김유홍: 급식 세대가 아닌 나로선 정말 몰랐던 내용들이었다. 직영급식의 사례, 관련법 개정 문제 등을 두루 다루고, 급식비 항목 분석표 등을 곁들이면서 기획이 알차졌다.

무엇보다 재벌 간의 식자재 유통 다툼을 설명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가 별로 안 들렸다.

한상헌: ‘사는 게 전쟁이란 걸 배우는 시간’이라는 기사 제목이 와 닿았다. 급식, 체벌 문제 모두 공교육의 구조적 폐단에서 일어난다. 사건·사고를 표피적으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개선책을 보여주려 한 점이 돋보였다.

최영재: 아직까진 학부모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같은 동네에서도 학교별로 급식의 수준차가 있다. 학부모 운영위원회가 어떻게 꾸려지는 다뤄봄직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점심시간이 지니는 의미나 과거의 도시락이 지녔던 장점을 찬찬히 짚어보거나, 구체적으로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샘플 조사를 해보면 좋겠다.

나연자: 급식으로 식습관이 악화돼 아이들은 가공식품과 육식을 선호하고 채식을 꺼린다. 급식을 포함해 우리 식단이 어떻게 구성돼야 하는지, 실제 아이들의 건강 실태는 어떠한지 다룰 필요가 있다.

위성은: 20쪽에 실린 통계자료는 조사 인원이나 오차 범위 등이 누락된 채 백분율로만 표기되어 신뢰도가 떨어졌다.

최영재: 성장 과정 등을 감안해 초등학생과 중고생을 구분해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데 급식 기사에선 이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 저학년 체벌 문제를 다룬 619호에서 표지 제목에 ‘트라우마’란 단어를 꼭 써야 했는지 의문이다. 평소 레토릭, 테크노크라트, 프로파간다, 페르소나 등 독자들에게 생소한 외래어가 자주 등장한다.

체벌 기사는 급식 기사와 달리 교사-학부모-학생의 삼각구도 대신 교사-학생 양자구도 내에서 논의가 전개됐지만 이 또한 삼자구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 29쪽의 ‘초등학생에게 가해지는 신체부위별 체벌 유형’은 뻔한 내용을 왜 다뤘는지 모르겠다.

양희준: 조사 결과인지, 문헌 인용인지, 혹은 상상인지에 대한 설명도 없었다. 그리고 본문에서 ‘학습권’과 ‘교육권’이란 단어를 혼동해 사용했다. 기사 말미에서 교육대학의 교육 과정에 문제를 제기한 부분에는 공감한다.

나연자: 이런 주제를 다뤘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나도 교사지만 이런 기사가 나와야 교사들이 경각심을 느낀다. 가정교육에 기대기도 어렵고, 이상적인 학생들만 존재하지 않으므로 실제 교단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 학습 흥미를 끌어내는 교수법을 고민해보지만 해법이 잘 안 보인다. 그렇다고 재교육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심각하다. 또한 성적에 따른 학원의 체벌은 용인하면서 학교의 체벌에 무조건 반발하는 일부 학부모들을 보며 공교육과 전인교육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한상헌: 객관적으로 사건을 기술하느라 현장을 설명하는 데 머문 느낌이다. 차라리 가해자나 피해자 한쪽을 중심으로 서술했다면 흡입력이 있지 않았을까. 교사의 체벌 습관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피해자의 충격은 구체적으로 어떠한지, 교사에게 체벌할 권리가 있는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기사가 없었다.

최영재: 616호 특집 ‘이헌재 게이트는 허황된 작문인가’에서 언급한 론스타 문제는 종종 이 다뤄온 주제다. ‘재경부와 금감위의 후안무치’라는 기사 제목처럼 여전히 방만한 정부를 계속 비판해야 할 필요가 있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장화식 위원장의 인터뷰는 내용이 알차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아시아가 울었다’는 과장스러워

양희준: 616호 ‘아시아가 울었다’에선 다소 무리하게 월드컵의 아시아 공동체성을 만들고자 했다. 아시아 국가들의 월드컵 성적을 정리한 기사는 기획 취지에 얼추 부합되지만, 각국 기자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한국팀을 분석한 기사는 표지이야기의 취지와 멀어 보였다.

김유홍: 최진철 선수의 부상 사진에 ‘아시아가 울었다’라는 제목을 붙인 건 과장이다. 박지성의 골을 ‘아시아적 동점골’이라고 서술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부담스럽다. ‘대한민국이 울었다’ 대신 ‘아시아가 울었다’고 말한들 둘의 차이는 커 보이지 않는다. 국가주의의 범주가 넓어졌을 뿐이란 느낌이다.

최영재: 여러 주에 걸쳐 월드컵 특집이 게재됐지만 축구광이 아닌 일반 독자로서 축구 분야에 대해 지식과 정보를 충분히 얻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른 기사에 비해 글쓴이들의 주관 또한 상대적으로 많이 노출됐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의 인터뷰는 흥미로웠다.

한상헌: 주제는 잘 잡았다. 2002년 한국의 4강 진출을 제하면 서유럽과 남미 이외의 국가가 월드컵 4강에 나간 적이 없다. 실력차로만 보기 어렵다. 자본의 본산인 유럽의 이해관계나 축구 이데올로기 문제가 작용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다각도로 이를 다루지 못했고, 정윤수씨의 글은 ‘아시아’란 주제와 어긋났다. 유럽컵은 인기 있지만 아시안컵은 인기가 없는 현실이나, ‘탈아시아’를 외치는 일본팀의 속사정 등을 다뤄봤으면 어땠을까.

위성은: 618호에서는 사도마조히즘(SM)이라는 밀실의 주제를 과감히 다뤄냈다. 도발적인 소재가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SM을 일상에 적용해보는 과정 중 오히려 기사가 착하고 바른 쪽으로 흘러버렸다. 성과 관련된 마지막 기사도 절제된 느낌이 풍겼다. ‘기자가 뛰어든 세상’ 같은 기사 꼭지로 SM 동호인과 채팅을 해본다든지 ‘쾌도난담’식의 솔직한 대담을 시도해봤더라면 더 경쾌했을 것이다.

나연자: 가볍게 읽었으나 읽고 나서 우려되는 바가 있었다. 우리 주변의 연인, 부부 관계에서 구타와 폭력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소재는 부담스러웠다. ‘사디스트니까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다’고 말할 순 없지 않겠는가.

김유홍: 생활의 동력을 욕망에서 찾으려 한 점이 재미있었다. 누구에게나 은밀한 욕망이 있다. 하나 채찍이나 가죽끈 같은 성적 판타지는 한국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상업적이고 기성화된 욕망으로 보인다. 이런 부분도 지적해보면 재미있었을 것 같다. SM은 관계를 분석하는 유용한 틀이긴 하나 여기에 집중하다 보니 서열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계급적 병폐들이 묻혔다.

한상헌: 기자 한 명이 표지이야기를 전부 쓰면 독자 입장에선 ‘이래도 괜찮나’ 싶다. 전체적으로 분량이 많았다. 드라마와 인간관계 분석에 설득력이 약했다.

양희준: 618호 특집 ‘국기 경례 거부, 중징계 당하는가’에서 드러난 어린이집의 애국조회 실태는 충격적이었다. 원장과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듯하다. 또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한다.

만화의 스테레오타입 깨준 별책부록

위성은: 만화 별책부록이 신선했다. 흔히 생각해왔던 만화의 스테레오타입을 깨주는 그림체, 이야기들과 만나게 되면서 만화에 새로운 취미를 붙여볼 기회가 됐다.

양희준: 618호 라이프 & 트렌드에서 ‘침실 다시 보기’를 다뤘는데, 예전의 거실서재 기사처럼 신선했다. 그러나 결국 ‘소비’로 귀결되는 듯해 씁쓸하기도 했다. 617호에선 다른 호에 비해 문화 꼭지가 적었다. 영화 의 평이 검은 바탕 위에 세 면이나 할애되면서 과장된 느낌을 줬다. 616호 ‘판사들도 마감인생이었다’는 직업인 판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였으나,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묻는다면 별로 할 말이 없을 듯하다.

김유홍: 619호 초점 ‘미대입시, 표절이 춤춘다’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표절 문제를 다뤄 의미 있었지만 미술학원과 미대 교수의 침묵 카르텔에 집중하면서 ‘표절’이란 주제가 산만해진 감이 있다. 616호 이슈추적 ‘기미코 센세 히노마루와 싸운다’는 그동안 보여준 국가주의 비판의 연장선상에 놓인 훌륭한 기사였다. 그러나 ‘기미코 센세’ ‘히노마루’ ‘기미가요’ 등 일본어를 그대로 쓰면서 설명이 없어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안인용의 개그쟁이’는 지엽적인 소재 범위를 확장하고 ‘김수현의 달려라 밴드’는 음악 세계를 설명하는 데 더 집중하면 좋겠다.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은 색감과 사투리가 만화를 어둡게 보이게 한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가 단순한 과거의 재연만이 아닐 거라 믿으며 좀더 지켜보려 한다.

나연자: 제618호 인터넷 스타에서 연예인 아유미와 관련된 기사는 답지 않았다. 배우나 가수에 대해서라면 개인의 상처를 건드려도 되는 것인가.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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