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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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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야스쿠니를 보는 제3의 시선

등록 2007-08-10 00:00 수정 2020-05-03 04:25

자이니치 3세 김광민씨 “한국인들은 동포가 볼모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죠?”

▣ 쓰루하시(오사카)=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 yorogadi@hotmail.com

김광민(36) 코리아엔지오센터 사무국장은 ‘자이니치 코리안’ 3세다. 그는 오사카에 있는 대표적 자이니치 코리안 집단촌인 쓰루하시에서 나고, 자랐고,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의 조부모는 제주도 성산 출신이다. 오사카로 건너온 김씨 집안의 일본 거주사는 이제 80년에 이르고 있다.

‘닥토나리’의 쓸쓸한 의미

그의 조부모가 오사카와 인연을 맺게 된 시점은 명확지 않다. 이제는 숨을 거둔 그의 할머니는 “언제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군대환을 타고 일본에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군대도 안 간 분이 군대는 뭘까”라며 의아한 생각을 가졌다. 군대환이 1922년 제주와 오사카 사이에 뚫린 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ケ代丸)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뒤였다.

1920년대 일본의 급속한 산업화로 오사카 도심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늘어나기 시작한 도시는 오사카 외곽을 흐르던 히라노(平野)강 부근까지 확장됐다. 가난했던 고향에서 먹고살 방법을 찾지 못한 조선인들의 값싼 노동력이 히라노강의 하천 공사와 주변 개발에 집중 투입됐다. 그때 쓰루하시로 흘러든 조선인 가운데 70% 정도가 제주 출신이다.

조선 사람들은 사람이 살기 힘든 히라노강 하천 둔치에 터를 잡고 닭과 돼지를 길렀다. 김 사무국장의 아버지는 “옛날에 어디 살았냐”는 김씨의 질문에 ‘닥토나리’라고 답했다. 닥토나리란 ‘닭’이란 우리말과 ‘이웃’(隣·도나리)이라는 일본말을 합친 자이니치들의 신조어다. 일본인들은 더러운 가축의 분뇨와 함께 생활하던 조선인들에게 “냄새가 난다”고 손가락질했다. 조선인들이 돈을 내고, 배를 타고, 오사카로 흘러들어 고된 노동으로 목구멍에 풀칠하게 되는 과정은 ‘자발’이나 ‘강제’라는 쉬운 단어로 설명하기 힘든 생의 고단함이 묻어 있다.

김 사무국장은 “야스쿠니신사에 반대하는 운동에 동의하지 않을 자이니치 코리안은 없다”고 말했다. “강제로 사람을 끌어다 죽게 한 뒤, 그들을 일본의 신으로 모시는 행위는 유족에게는 참기 힘든 모욕이겠죠. 정말로 화나는 일입니다.” 그는 “야스쿠니신사 문제는 민단도 총련도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겁이 난다”고 말했다. 일본에는 1억2천만 명의 일본인이 있고, 자이니치 코리안의 수는 채 100만 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그 100만 명은 60년 넘게 이어진 남북 대립의 여파로 조각조각 갈라져 있다. 사실 그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있다고 해도, 그 100배에 이르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정면 투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본인에게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납득시키는 것은 한국 우익들에게 조선전쟁(6·25) 희생자 참배에 문제가 있음을 납득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에 민족주의 바람이 불면 일본에도 거센 민족주의 바람이 붑니다. 그럼 자이니치들은 테러 대상이 됩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을 자극하는 말을 할 때 자신의 동포가 볼모로 잡혀 있다는 사실을 거의 모르겠죠?” 김 사무국장은 “그렇지만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금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은 지난 넉 달 동안 ‘야스쿠니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한국인, 대만인, 오키나와인, 일본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시선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은 자이니치 코리안의 시선이었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말하면서 서울의 관점 아니면 도쿄나 오사카의 관점에서 말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김 사무국장은 “그러나 그 중간에 다른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한국인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쓰루하시 출신인 그가 처음 조국 땅을 밟은 것은 1990년이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조국의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움에 사무쳐 찾아간 조국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한국인들은 밖으로는 ‘일본놈들, 일본놈들’ 하면서 일본 사람들의 욕을 했지만 실제로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나 자이니치인 그에게는 “왜 한국말을 못하냐”고 나무랐고, “당신들은 부자 나라에서 잘살지 않았냐”며 힐난했다.

다문화 민족공동체를 향하여

한국과 일본의 교류는 앞으로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은 ‘자이니치’에 관심이 없고, 일본 사람들은 ‘자이니치’ 문제를 뜨거운 감자라며 피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민족 차별과 달리 한국인·조선인과 일본인은 겉모습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그냥 가만히 일본 사람인 것처럼 생활하면 모든 자이니치는 일본인이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피해가기 힘든 역사의 자연스런 흐름일지 모른다. 그는 “자이니치들은 그동안 살아온 생활기반이 모두 일본에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이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든 그것이 우리 조국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돌아가 살게 될 것 같진 않습니다.”

그의 고민은 자신의 뿌리인 조국과 지금 몸담고 있는 일본이 공생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에 앞서 이뤄져야 할 것은 조국의 사람들과 조국 밖의 사람들이 공생하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이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일본의 자이니치들이 모두 조선에 뿌리를 둔 동포이다. “자이니치는 자이니치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서울을 닮을 필요도 평양을 닮을 필요도 없겠죠.” 김 사무국장은 “그런 다문화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게 우리 민족의 새 과제”라고 말했다. 그 다문화 민족공동체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야스쿠니신사 반대운동의 방식을 고민해보는 것은 다시 을 포함한 한국 사회의 몫이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
정성을 모아주세요

14,803,000원

8월3일 현재 1480만3천원

독자 여러분, ‘평택 캠페인’ 때 보여주었던 폭발적인 반응과 달리 모금 추이가 좀 저조합니다.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야스쿠니신사는 몰입하기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작은 정성을 모아주실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은 아름다운가게 등과 함께 9월15일 바자회를 엽니다. 그동안 아껴 사용하셨던 좋은 물건들을 기증해주셨으면 합니다. 기증 방법은 추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은 우리의 작은 정성들이 모여 큰 흐름을 이루고, 그 도도한 흐름들이 모여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둔직하고 의미 있는 충격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 작은 정성을 모아주세요.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 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문의 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모금자 명단
김현(2만원) 박창우(1만원) 일본이명희(10만원)
*그 밖에 ARS로 26명이 정성을 모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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