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위해 참배한다는 리덩후이 전 총통, 화해할 수 없는 역사를 보여주다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청년의 이름은 이와사토 마사오였다. 1923년 1월15일 대만 타이베이현 산즈향(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시대 경찰이었다. 부친의 임지가 바뀜에 따라 소년 마사오는 이사를 자주 다녔다. 소학교 3학년 때까지 단수이소학교를 다니다 부친을 따라 난강소학교로 전학갔고, 다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고향 산즈소학교로 옮겨 졸업을 했다. 당시 동기들은 “그는 공부를 매우 잘하는 학생이었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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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이 최대 소원이었던 수재
마사오는 주위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수재였다. 하지만 타이베이에 있는 타이베이사범학교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했다. 다시 청궁중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만다. 어린 마사오는 참담한 실패를 견딜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재수를 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마사오는 이듬해 중학교 입시에 다시 실패했고 마지못해 고향의 산즈중학교에 입학했다. 잇따른 실패에 맞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싶었던 듯 중학교에 다닐 때는 검도에 매진했다.
고등학교 입시가 앞으로 다가왔다. 마사오는 다시 타이베이로 가 최고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타이베이고등학교에 응시했다. 합격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3년 과정을 2년 만에 독학으로 마칠 만큼 맹렬히 공부했다. 당시 동기들은 “최대 소원이었던 일본 유학을 위해 밤새워 공부만 했던 친구”로 그를 기억했다.
마사오의 소원은 현실이 됐다. 그는 도쿄제국대학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던 교토제국대학 농업경제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식민지 대만인이 일본인들과 겨뤄 교토대에 합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사오는 당대 최고 엘리트 반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1944년이었다. 그 무렵 그의 형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필리핀 전선에서 전사했다. 청년 마사오가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머잖아 마사오의 일생을 뒤흔들 대사건이 터진다.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외부의 압도적인 힘이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만 것이다. 대만은 광복을 맞았고, 그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만대학 농업경제학과는 2학년 과정밖에 개설돼 있지 않았다. 마사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1학년으로 편입했고, 결국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대학에 머무르게 된다. 하늘 높은 곳에서 땅속 깊은 곳으로 처박히는 불쾌하기 이를 데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노인 마사오는 5월30일 일본을 찾았다. ‘패전’을 맞은 뒤 세 번째 방문이었다. 그는 타이베이에서 도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일본 기자들에게 “전사한 형이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야스쿠니신사에) 갈 시간이 있을지 일본에 가봐야 알 것”이라며 “형님이 모셔진 곳에 갈 수 없다면 사람의 정으로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숙원이 있는데 하나는 일본 도호쿠 지방의 오쿠노호소미치(奧之細道)를 여행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라고 말했다고 한다. 야스쿠니신사에는 2만8천여 명의 대만인들이 그들을 침략해 죽인 침략자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요시히사신노(北白川宮 能久親王)와 함께 잠들어 있다.
중국은 ‘대만 독립분자’로 규정
첫 번째 일본 방문에서 노인 마사오는 게이오대학을 찾았다. 일본을 떠난 지 56년 만이었다. 그는 열변을 토했다. “‘일본 문화’의 빛나는 역사와 전통… 60억 인류 전체에 대한 강력한 지도국가로서 자질과 실력… 세계인들로부터 두터운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이처럼 대체하기 어려운 일본 정신의 특유한 지도이념과 도덕규범이 전면 부정당했다. 일본의 과거는 모두 잘못됐다는 자기부정적인 행위로 폭주해버렸다. …이런 완전한 자기부정 경향이 지금 일본 사회의 근저에 소용돌이치고 있는 데 마음 아프다.”
노인의 야스쿠니신사 방문 계획에 중국 정부는 즉각 항의 성명을 냈다. “대만 독립세력에 활동 무대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중국은 노인을 ‘대만 독립분자’로 규정하고 노인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고위관리의 방일을 전격 취소하거나 분노를 표출했다. 노인은 “중국이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왜 나에게 겨누는지 모르겠다. 나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도 비슷한 입장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개인 자격으로 일본에 온 것 아니냐. 개인에게는 당연히 신앙의 자유가 있다. 본인이 판단할 일이다”고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친일로 점철된 노인의 일생을 비난하는 것은 아마도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인의 진심이다. 그는 대만이 일본 덕에 근대화를 이뤘다고 믿고 있으며, 일본을 위해 숨을 거둔 형에게 온 마음을 다해 참배하고 싶을 것이다. 그의 행동에 상처 입는 중국인들의 마음도 진심이다. 야스쿠니신사를 둘러싼 수많은 진심들은 동아시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둘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절망적 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만으로 돌아왔을 때의 우려와 달리 청년 마사오의 인생은 술술 풀려나갔다.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땄고, 코넬대에서 박사가 됐다. 1988년 장징궈 총통 서거로 총통직을 승계해 2000년까지 그 자리에 머물렀다. 총통으로 머물면서 그는 “22살 때까지는 일본인으로 살았다”는 고백을 서슴지 않았다. 대만 전 총통인 그의 중국식 이름은 리덩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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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현재 모금액 1200만3천원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의 이름은 이와사토 마사오입니다. 1923년생인 그는 일왕의 신민으로 성실한 삶을 살다 해방을 맞았습니다. 지난 5월30일 그는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진 형을 위해 참배를 해야겠다”는 말로 화제의 인물이 됐습니다. 중국인들은 흥분했고, 일본인들은 난처해했습니다. 일본 우익들은 “당연한 일이다”며 마사오 노인의 결심을 반겼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창씨명은 두 개입니다. 1917년생인 그는 처음에는 다카기 마사오였다가, 나중에 오카모토 미노루가 됐습니다. 그는 일본 육사를 나와 관동군 장교로 해방을 맞았습니다. 한국의 마사오도 최고 권력자가 됐습니다. 마사오들의 나라에서, 1990년대 초까지 사람들은 그들의 아들과 남편과 아버지가 야스쿠니신사에 모셔져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후손은 집회를 하고, 영화를 만들고, 재판을 걸고, 재판에서 지고, 다시 재판을 걸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은 여전히 마사오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할아버지들의 원혼을 모셔와야 하지 않을까요. 독자 여러분, 작은 정성을 모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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