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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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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쿠니 캠페인] 슬퍼하지 않는 자들의 슬픔

등록 2007-05-18 00:00 수정 2020-05-03 04:24

끔찍한 수탈과 강제합사에도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만 원주민 노인들

▣ 타오위안·우서(대만)=글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 사진 스나미 게스케 프리랜서 기자yorogadi@hotmail.com

그것은 네 개 언어가 난무한 인터뷰였다. 대만 타이베이시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쯤 달려 도착한 대만 원주민 타이알족 마을에서 만난 니무이 로부 할머니는 웃는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녹음으로 뒤덮인 험준한 산허리에서 할머니가 몸에 걸친 색동 윗옷과 붉은색 치마(타이알족 전통 의상이라고 했다)가 아름다워 보였다. 할머니는 중국어를 하지 못했다. 한국어를 중국어로 바꾸고, 중국어를 타이알족 전통 언어로 바꾸는 힘겨운 과정을 거치면서 인터뷰는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일본어는 할 수 있어요.” 유창한 일본어로 할머니가 외쳤다. 그는 일본이 대만 원주민들을 교육하기 위해 만든 번동교육소(蕃童敎育所)에서 3년 동안 일본말을 배웠다고 한다. 인터뷰 속도는 갑자기 빨라졌고, 취재진은 할머니의 마음속 깊은 얘기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정신의 침탈”

할머니가 태어난 것은 1933년이다. 그의 아버지 하타나가 마사시는 1941년 일본군이 대만 원주민을 군속으로 동원하기 위해 모집한 다카사고의용대(高砂義勇隊)원으로 태평양전쟁에 나섰다. 아버지의 원주민 이름은 시란 노손, 어머니의 이름은 하타나가 기요코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다 76살에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떠난 지 5년이 지난 뒤였다. 같이 전쟁터로 끌려갔던 옆 마을 아저씨들의 전언이었다. “아버지가 전쟁에 져서 밀림으로 도망갔대. 거기서 먹을 게 없었나봐. 뭔가 잘못된 것을 먹었는지 설사가 나서 죽었다는 얘길 들었지.” 별로 슬플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할머니가 말했다. 유골은 찾지 못했고, 4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말 일본 정부가 조위금으로 200만엔을 지급했다.

“그 정도 돈이 사람의 생명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어요.” 그렇지만 일본을 원망한다는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자원해서 참전한 거니까. 일본에 대해 불쾌하거나 나쁜 생각은 없어요.” 그의 부친은 다른 대만인 2만8863명과 같이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할머니는 “일본에서 합사 여부를 알려오진 않았다”고 말했다. 야스쿠니신사의 무지막지한 강제합사 전통이다. 다른 나라에서 온 취재진이 신기했는지 마을 노인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할머니의 옆에 선 와탄 탄가(일본명 도야마 요시오)와 치와스 노칸(나카지마 야스코)도 웃는 얼굴로 “일본을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승 일본 리츠메이칸대 교수는 “여러 식민 침탈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은 정신의 침탈”이라고 말했다. 역사가 기록하는 일제 침략은 대만 원주민들이 기억하는 것만큼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에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대만을 할양받아 식민지로 삼았다. 대만총독부가 세워졌고 본격적인 식민 침탈이 시작됐다. 그들은 ‘정부 소유 임야 및 장뇌 제조업 규제 규칙’을 만들어 원주민 땅을 국유지로 편입했고, 반항하는 원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해 수많은 살상을 저질렀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대만 정복 과정을 ‘리번’(理蕃)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원주민들의 피와 살점으로 도배된 기나긴 살육의 과정이었다. 치와스 아리 대만 입법위원(우리나라의 국회의원)이 2006년 8월 만든 야스쿠니신사 반대 자료 ‘합사 제명, 우리들은 일본인이 아니다’를 보면, 1896년에서 1920년까지 138차례 이어진 리번 정책으로 대만 원주민 7080명이 숨졌고, 4123명이 다친 것으로 나타난다. 1905년 있었던 인구조사에서 확인된 대만 원주민 수는 8만2795명. 리번의 결과 전체 원주민의 8분의 1이 죽거나 다친 셈이다.

이름 세 개인 할아버지, ‘나라’ 위해 전쟁터로

기록 중에서는 믿기 힘든 것도 있다. 대만 5대 총독 사쿠마 사마타(佐久間左馬太)는 도쿄에서 대만에 전보를 보내 “식량이 부족하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번인(원주민)의 고기를 베어 먹어 배고픔을 채우라고 명하라”고 말했고, 1930년에 있었던 원주민들의 대규모 반란사건인 우서(霧社) 사건 때는 주모자 모나루도의 유해를 표본으로 만들어 타이베이 제국대학에 연구 자료로 보내기도 했다. 원주민들을 진압한 일본은 곳곳에 번동교육소를 만들어 원주민 아이들을 황국신민으로 교육했다. 의무 교육 보급률은 86.4%에 달했다. 치와스 아리 입법위원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원주민들의 전통문화는 사라졌고, 자신의 역사도 점차 잃어갔다”고 말했다. 씻기 힘든 고통을 입고도, 이를 느끼지 못하는 대만 원주민의 서글픈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니무이 로부 할머니의 옆 마을에서 만난 로신 유라오 할아버지는 1916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91살. 아흔이 넘은 고령에도 그는 비교적 정확히 옛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는 이름이 세 개”라고 말했다. 일본 이름은 게다 히로시, 중국어 이름은 황신후이라고 했다. 그는 4년 동안 다카사고의용대에 있었다. “어느 날 새벽에 집으로 일본 경찰들이 몰려들더니 폭파대로 전쟁에 나가자고 하더라고. 특수 임무니까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가야 한다고 했거든. 내가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느낌에 기뻤지.” 그는 옛 무용담을 늘어놓듯 지난 사연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1942년(쇼와 17년) 4월26일 대만을 출발해 남태평양 팔라우섬에서 1년 동안 훈련을 받았다. 부대에는 400명의 대만 원주민들이 있었다. 훈련 도중에 두 명이 죽었다. 팔라우를 거쳐 뉴기니로 이동했다. 거기서 조금 더 훈련을 받은 뒤 폭파대에 들어갔다. 다카사고의용대는 군속 신분이었기 때문에 총을 들 수 없었지만, 그는 “총을 휴대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미군 비행기나 시설을 게릴라전을 벌여 폭파하는 임무는 맡았거든. 아주 재미있었지.” 그는 뉴기니의 수도 포트모레스비로 이동하는 도중에 적과 만나 대부분이 죽었다고 말했다. “식량도 탄약도 없어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면서 포트모레스비로 갔거든. 우리 의용대 사람 가운데 포로가 된 사람은 네 명밖에 없어.” “왜 전쟁에 참여했냐고? 당연한 것 아닌가? 일본의 국민이니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어” 유창한 일본어로 노인이 말했다. 그는 “전쟁터로 떠났을 때 살아 돌아올 마음이 없었다”고 했고, “전쟁의 고통이 심했을 땐 어서 빨리 총알이 내 몸을 관통하길 기다렸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1944년 1월까지 정글에 숨어 있다가 민국 35년(1944) 1월20일에 마을로 돌아왔다. 다이쇼 7년(1918)에 태어난 동생 케이다 세이지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의 동생은 대만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숨진 1130명의 일본군과 함께 야스쿠니신사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신사 합사 여부는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행복한 일본인으로 눈 감을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났고, 일본은 그를 감싸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뒤 일본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방 이후 그는 중화민국 사람이 됐다. 그 뒤 노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면사무소에서 회계를 맡아 18년 동안 일했고, 2년 전부터 심장이 나빠져 계속 병원에 다닌다. 일본 정부가 지급한 조위금 200만엔은 살아 돌아온 죄로 받지 못했다. 일본이 조선에서 이루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던 ‘황국신민화’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까. “전쟁터에서 조선 사람도 많이 만났어. 같은 솥에 밥을 해먹을 정도로 친했는데….”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머잖아 노인은 숨지고, 그의 사연은 사람들의 기억 너머로 흩어질 것이다. 그는 행복했던 일본인으로 눈을 감을까?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원주민 마을 한가운데서, 뭐라 설명하기 힘든 먹먹한 느낌이었다.



[야스쿠니신사 합사 피해자 돕기]
1천만원 넘었습니다

10,021,000원

5월11일 현재 모금액 1002만1천원
모금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자동응답(ARS) 전화도 열려 있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가 목숨을 잃어야 했던 2만1천여 명의 할아버지들 원혼이 억눌려 있습니다. 대만의 노인들은 “일본인으로 전쟁터에 끌려갔으니 일본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이루려 했지만 실패했던 황국신민화란 그런 것이었을까요. 대만의 노인들은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참담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집단 최면’의 한가운데에 야스쿠니신사가 있습니다. 그동안 일본 정부에 전쟁 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은 일본 시민단체들의 자발적인 모금에 의존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힘으로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할아버지들의 원혼을 모셔와야 합니다. 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가 모아낸 작은 정성들이 하루가 다르게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에 둔중하고 의미 있는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독자 여러분, 작은 정성을 모아주세요.

계좌이체 우리은행 1006-401-235747, 예금주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ARS 060-707-1945·한 통화 3천원
주관 민족문제연구소, ‘노합사(NO 合祀)’,
문의 민족문제연구소(02-969-0226), 홈페이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www.anti-yasukuni.org),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38-29 금은빌딩 3층(우편번호 130-866)
모금자 명단
김윤수(3만원) 홍성아(3만원) 정은영(10만원) 문응상(2만원) 화이팅(5만원) 김호룡(5만원) 김무강(1만원) 백성미(10만원) 하주영(1만원) 이상붕(2만원) 안민용(2만원) 류재봉(2만원) 안영수(2만원) 김승배(3만원) 이창용(5만원) 최봉태(30만원) 장병화(10만원) 황두연(10만원) 정희경(2만원) 정희수(1만원)
*그 밖에 전화 ARS로 349명이 힘을 모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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