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 함께하는 ‘프리유어북’]
문화수도 광주에서 열린 ‘제1회 책 해방의 날’… 자유 얻은 책 800여권 전국 향해 출발!
■ 광주=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고맙게도 광주는 비를 참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 들어 너무 척척 들어맞는 주간 일기예보에 따르면, ‘프리유어북 책 해방의 날’이 열리는 5월16일엔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16일 아침 불안한 마음에 벌떡 일어나 내다본 하늘은 다행히도 구름만 살짝 걸쳐 있었다.
책퀴즈 등 즐거운 놀이판도 함께
5·18 광주민중항쟁일을 기념해 16일 광주 금남로에서 펼쳐진 ‘제1회 프리유어북 책 해방의 날’은 ‘책 해방’이라는 생소한 개념이 현실에서 이뤄지는 자리였다. 5·18 시민 대동마당이 벌어진 금남로를 지나던 행인들은 “문화수도 광주에서 책 해방이 시작됩니다”라는 현수막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을 아무 데나 놓는다”라는 설명엔 더 의아해했다. 그러나 책을 돌려보는 것에 더해 인터넷으로 그 행적을 추적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선 눈을 반짝였다. 행사장엔 아침부터 광주의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해 북적거렸다. 금호고등학교 학생들 40여명과 광주 학교도서관 사서들의 모임, 광주전남문화연대, 광주여성민우회 회원 80여명이 모여 기증 도서 800여권을 거리에 펼쳐놓고 행사장을 정돈했다. 광주 ‘동화 읽는 어른모임’ 회원들은 행사장 전면에서 미니장승 놀이, 동화그림 퍼즐 맞추기 등을 벌여 아이들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오후 2시가 되자 정진욱 책 해방의 날 운영위원(40·인터넷교보 상무)이 사회 마이크를 잡았다. 박석무 5·18 기념재단 이사장이 축하의 말로 운을 뗐다. “책 없이는 인생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프리유어북은 이 책을 우리가 읽고 영원히 소유하지 말고 남들에게 전해주자는 뜻입니다. 이런 해방과 나눔의 정신이 광주에서 시작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책 해방이 광주에서 출발해 전국으로 널리널리 퍼져 우리 사회가 지적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겨레신문사 고희범 사장도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내려받듯, 책도 읽고 공공의 영역에 두자는 것이 프리유어북의 취지입니다. 책 해방을 하면서 자신도 해방되는 기쁨을 누리길 바랍니다”라고 화답했다.
책퀴즈가 벌어지면서부터 행사장에는 흥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을 쓴 작가 권정생씨는 안동의 작은 교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분의 직업이 목사, 맞을까요?” 대다수가 맞다고 손을 들었지만 역시 책을 즐겨 읽는 어른들은 달랐다. 사서 선생님들과 동화 읽는 어른모임 회원들은 한목소리로 답을 맞췄다. “종지기!” 정답을 맞춘 이들에게는 시아출판사에서 경품도서로 기증한 책 100여권이 돌아갔다.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금호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은 퀴즈를 맞춰 받은 책을 들고 “처음엔 단순한 자원봉사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나눠 읽는 놀이에 참여하게 돼 재미있다”고 즐거워했다.
프리유어북의 행진은 계속된다
책퀴즈 고개를 넘고서야 본행사인 방생이 펼쳐졌다. 부산에서 책을 한 박스 모아 보낸 독자, 헐레벌떡 신문사로 달려와 책을 주고 총총히 떠난 독자, 좋은 행사에 쓰라며 노동월간지 최근호 을 보낸 작은책출판사들의 힘이 모여 자유를 얻을 책 700여권을 만들어냈다. 자원봉사자들은 방생에 앞서 인터넷 사이트에 등록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전국의 시민들이 보내온 책을 한 아름씩 안고 시내 곳곳으로 흩어졌다. 지난 4월 말 개통한 지하철 1호선 도청역, 금남로5가 등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 푸른색 스티커가 붙은 책들이 놓였다. 그렇게 광주에 프리유어북의 작은 씨앗이 점점이 뿌려졌다. 그 씨앗이 다른 도시들로 계속 전파돼 전국에서 싹을 틔울 때까지 프리유어북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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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저는 조선대학교 기계공학과 4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위험한 일이긴 했으나, 이 광경을 꼭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당시 가톨릭학생회 소속이었던 이재권(48·나주공고 교사)씨는 사진기 가방을 둘러메고 5월3~16일 거리를 누볐다. 계엄령 선포 직전 시위대는 급격히 불어났고, 도시는 시시각각 긴장감과 공포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진기를 든 것만으로도 프락치 또는 간첩으로 오인받기 일쑤였다. 시비를 거는 사람도 많았고 험한 소리도 많이 들었다. 사진을 찍은 뒤에도 문제였다. 혹 사진이 경찰 손에 넘어가면 시위대에 참가한 사람들 얼굴이 ‘기록’으로 남을까 염려스러웠다. 이씨는 사람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옥상이나 높은 건물에 올라가 원경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엔 얼어붙은 듯한 거리를 가득 메우고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군중의 물결이 담겨 있다. 그동안 공개된 광주항쟁 현장사진이 대부분 1980년 5월20일 이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사진은 항쟁 초기 단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찍었던 컬러사진 50여컷은, 오랜 세월을 잠자다 2000년 5월 처음으로 광주에서 두 차례에 걸쳐 공개됐다. 지난해엔 자비 500만원 등 650만원을 들여 200여권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 사진집 2부엔 1980년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찾아 같은 앵글로 잡은 2003년 광주의 풍경을 담아 시대의 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이 작품집을 발간한 공로로 이씨는 지난해 국가인권위 인권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기억을 잊을 수 없어 오늘도 금남로에 나왔습니다. 그러다 프리유어북 책 해방의 날 행사장을 발견하곤 반가웠습니다.” 그는 한권에 2만원씩 팔려고 들고 나왔던 작품집 3권을 흔쾌히 기증했다. “책을 사유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나누도록 자유를 주자는 이 의미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 정신이 광주의 정신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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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유어북 행사를 준비하면서 ‘사회 각계 지도층 인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프리유어북이 뭔가요?”라는 질문에 한참 동안 취지를 설명하고, 책 해방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구걸과 압력에 애교를 듬뿍 친 뒤 책을 기증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20여명이 보낸 책 150여권이 모였다.
3권을 보낸 강금실 법무부 장관의 메시지를 읽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책의 주인공인 지허 스님, 어디 계신지 모르지만, 아마도 당신 마음속에,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지허 스님과 강 장관의 관계에 대해 호기심을 억누를 길 없어 책을 펼쳤다. 알고 보니, 는 본래 1973년 논픽션 부문에 당선됐던 것인데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어떤 눈밝은 이에 의해 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선방의 일과를 솔직담백하게 기록한 지허 스님은 서울대 출신의 출가승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 뒤로 종적을 감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강 장관의 애절한 문장은 애독자로서 지허 스님의 행방을 궁금해한 까닭이었다.
배우 안성기씨는 따뜻한 마음이 물씬 풍기는 책과 글을 보냈다. 자신이 목소리 출연했던 애니메이션 를 같은 이름으로 꾸민 책과 김혜자씨의 등 기증도서마다 ‘책 읽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엽서가 끼워 있었다. 황기원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장)는 책이 여러 사람 손을 타면 쉬이 더러워진다며 비닐 커버를 입혀서 기증했다. 책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일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277쪽 ‘오월의 빛’부터 읽고, 나머지는 아무 꼭지나 열어서 읽으시면 즐거움이 더할 것입니다.”()
건축가 정기용씨는 를 보내며 속표지 한바닥 가득 장문을 썼다. “이 책은 나의 동료 건축가인 조성룡 선생이 의재 허백련 선생님을 기리는 미술관을 광주 무등산 자락에 지으며, 기념으로 편찬한 책이다. 책이라기보다, 책으로 집을 지은 느낌이다. 한국 동양화의 맥을 잇고 있는 화가다. 그를 위한 건축을 설계한 건축가다. 이들을 한 방에 모으는 일을 한 ‘책 디자이너들’의 노력의 결실이다. 한편으로는 낯설고 불편해 보이는 이유를 더듬으면서.”
소설가 박완서씨는 처음엔 자신의 책은 기증하면 안 되는 줄 알고 정중한 거절의 메일을 보냈다가, ‘저서는 더욱 환영’이라는 말에 등 소설 13권을 부랴부랴 챙겨 보냈다. 어린이를 위한 미술가이드북을 쓰기도 했던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김선정씨는 등 좋은 동화를 여러 권 보낸 뒤, 이튿날 잊은 책이 있다며 추가로 밀란 쿤데라의 등을 보탰다.
이 밖에도 여러 사람이 좋은 뜻을 모았다. 김원(건축설계사무소 광장 대표), 노회찬(국회의원), 박원순(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송기철(음악평론가), 승효상(건축설계사무소 이로재), 윤도현(가수), 이상은(가수), 이일훈(후리건축 대표), 임옥상(화가), 정태춘(가수), 정기용(기용건축 대표), 박영선(국회의원), 유홍준(미술평론가·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황지우(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기웅(열화당 대표), 황정민(아나운서). 행사 당일 금남로를 지나던 많은 이들은 이들의 이름에 끌려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이 책들을 정말 주는 건가요?”
그래서 정말 부탁한다. 책을 주신 분들의 좋은 뜻을 당신의 서가에 가두지 마시라고. 책을 발견하면 인터넷 사이트(www.freeyourbook.com)에 반드시 ‘신고’할 것을, 그리고 소중히 읽은 뒤엔 반드시 남과 나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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