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2024년 8월6일 국무회의에서 ‘방송 4법’(방송통신위원회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개정안)에 대한 재의요구안을 의결했다. 여름휴가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재의요구권(거부권)을 재가하지 않고 속도 조절에 나섰다. ‘거부권 정국’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나오지만 휴가를 마친 뒤 ‘전국민 25만원 민생회복 지원법’과 ‘노란봉투법’까지 포함해 6건의 거부권을 한꺼번에 행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렇게 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모두 21건으로 늘어난다. ‘민주당의 법안 추진→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민주당 주도로 본회의 통과→대통령 거부권 행사→재의결→법안 폐기’가 한국 정치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고착화된 가운데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민생은 실종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건수는 역대 한국 대통령들이 행사한 건수와 견줘봐도 압도적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한 정부는 노태우 정부로 모두 7건이다. 노무현 정부 6건, 박근혜 정부 2건, 이명박 정부 1건 순이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정부는 단 한 건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아직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을 통틀어 최다 거부권 행사자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45건 기록마저 깨뜨릴 기세다.
역대 대통령들이 거부권 행사에 신중했던 것은 민의를 대표하는 입법부의 결정을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서로를 견제하는 삼권분립 위에서 안정적으로 기능한다. 특히 오랜 기간 독재를 겪은 한국에선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공포가 상존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이 헌법에 보장된 권리라 해도 이를 남발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삼권분립의 훼손과 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윤 대통령은 지난 총선에서 혹독한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총선 참패 뒤에도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에 거부권을 남발하는 것은 민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당인 국민의힘은 이런 윤 대통령의 행위를 적극 엄호하고 있다. 배준영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는 8월3일 “재의요구권 행사는 대통령제를 최초로 시행한 미국에서도 자주 발생했다”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635번,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414번, 비교적 최근에는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12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12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10번, 조 바이든 대통령도 11번 행사했다”고 강조했다. 민주주의 역사가 깊은 미국의 사례를 가져와 거부권 행사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잦은 거부권 행사는 민주주의 후퇴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국민의힘의 반박은 윤 대통령 거부권 남발에 대한 변명이 되기 어렵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쓴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던 세 가지 사례 가운데 첫 번째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의 비대해진 행정 권력을 들고 있다. 국민의힘이 635번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사례로 든 바로 그 대통령이다. 미국 민주주의 위협의 두 번째 사례는 매카시즘, 세 번째 사례는 야당과 언론을 적으로 규정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전제주의 행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권 남발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일으켜 대통령직에서 사임한 닉슨 대통령, 그리고 매카시즘 광풍에 비견될 만큼 심각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제대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권력기관이 그들에게 주어진 제도적 특권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이어 민주주의의 규범과 관습을 올바로 정착시킨 사례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대통령을 들면서 그가 8년의 임기 동안 거부권을 단 두 차례만 행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미국 정치사에서 존경받는 대표적 인물인 워싱턴 대통령은 훗날 자신이 거부권을 자제한 행위에 대해 “비록 내 생각과 많이 달랐지만 입법부에 대한 존경 차원에서 여러 법안에 서명했다”고 회상했다.
이 책 저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성문화되지 않은 규범’의 중요성이다. 그중에서도 민주주의가 제대로 돌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두 가지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를 꼽는다. 상호 관용은 “(정치적 경쟁 세력을 적으로 모는 것이 아닌)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개념이고, 제도적 자제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뿐 아니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잦은 탄핵안 발의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행위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민주당이 추진한 탄핵소추안은 모두 18건이다. 개원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은 제22대 국회에서도 벌써 7건의 탄핵안이 추진되고 있다. 특히 민주당이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 수사와 관련된 검사 4명을 대상으로 탄핵안을 발의한 것을 두고는 ‘방탄용 탄핵’ ‘이재명 지키기용 탄핵’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야당은 대통령에게 ‘거부권 중독’이라 쏘아붙이고 여당은 야당에게 ‘탄핵 중독’이라며 역공하는 상황은 정치적 양극화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심각하게 침식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거부권을 남발하며 국내 정치엔 그토록 박절한 태도를 보이는 윤 대통령이 일본에만큼은 한없이 너그럽다는 사실은 아니러니하다. 최근 일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관련 전시물에 ‘강제’ 표현 명시를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는 사실이 한겨레 보도로 밝혀졌다. 강제동원 피해국인 한국이 반대표를 던졌다면 등재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윤석열 정부는 역사를 포기한 채 일본 편에 섰다. 총선 참패 이후로도 거부권 남발에 더해 굴욕적 대일 외교 등 국정 기조를 바꾸지 않는 윤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8월5일부터 일주일간의 여름휴가에 돌입했다. 재충전과 함께 임기 하반기 정국 구상에 집중한다는 게 여권의 설명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휴가를 정부 운영 기조를 바꾸는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이번 휴가를 국정 전환의 기회로 삼아 입법부를 존중하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간다면 남은 임기 동안에는 ‘무능한 대통령’ 이미지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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