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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이 ‘선수’로 등판하며 벌어진 일

‘김건희 문자 파동’으로 당무 개입 넘어 국정 농단으로 논란 확대… 한동훈 당대표 선출돼도 후폭풍
등록 2024-07-13 05:37 수정 2024-07-14 00:49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미국 하와이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2024년 7월8일(현지시각)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하와이 주지사 부부 등 영접 인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미국 하와이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2024년 7월8일(현지시각) 히캄 공군기지에 도착해 공군 1호기에서 내린 뒤 하와이 주지사 부부 등 영접 인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이 2024년 7월23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자중지란에 빠졌다. 한동훈 당대표 경선 후보의 ‘김건희 문자메시지 무시’ 논란과 관련해 당권주자들 간에 벌이는 격한 공방은 진흙탕 싸움을 방불케 한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국민의힘이 총선 참패 뒤 당 재건을 위한 비전 경쟁에 몰두해야 할 때 ‘모두가 패자’인 집단 자해극을 벌이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진다.

‘김건희 리스크’ 관리 못한 여권의 무능 자백

논란의 핵심은 김건희 여사가 2024년 1월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있던 한동훈 후보에게 자신의 명품백 수수 논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겠다는 뜻을 담은 문자메시지를 보냈지만, 한 후보가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한 후보와 당권을 놓고 경쟁하는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 후보는 한 후보가 김 여사의 ‘사과 의지’를 외면해 총선을 참패로 이끌었다고 공격하고 있다. 나 후보는 7월9일 열린 당대표 경선 첫 티브이(TV) 토론회에서 “당사자 얘기를 듣지 않고 소통을 단절한다? 정치적 판단이 매우 미숙하다”고 날을 세웠다.

반면 한 후보는 영부인과 사적인 방식으로 공무를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김 여사의 메시지가 실은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날 토론회에서 “당시에 여사가 사과 의사가 없다는 걸 여러 경로로 확인했다”며 “(윤석열) 대통령님은 사과가 필요 없다고 하셨다”고 말했다.

다만 이날 토론회에서 모든 후보는 ‘김건희 여사가 사과했다면 총선 결과가 달라졌다?’라는 ○× 질문에 모두 ○를 선택하면서 김 여사 문제가 총선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동의했다. 지난 총선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김건희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여권 전체의 ‘무능론’을 한목소리로 자백한 꼴이다.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싸움은 그간 여러 정당에서 반복됐던 레퍼토리다. 그러나 이번 전당대회에서 펼쳐지는 권력 다툼이 기존과 다른 점은 이 싸움의 중심에 공인보다는 사인에 가까운 영부인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이번 문자 파동이 ‘당무 개입’을 넘어 ‘국정 농단’으로까지 확장된 이유다. 강유정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7월7일 국회 브리핑에서 “영부인이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대놓고 침범하고 있다”며 “뻔뻔한 당무 개입이자 국정 농단”이라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전당대회 이후로도 ‘김건희 리스크’는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차기 대권주자가 현재 권력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늘 있었지만 여기에 영부인이 등장해 플레이어가 되는 방식은 처음 봤다”며 “김 여사 리스크는 앞으로 더 심해질 것이다. 특히 한동훈 후보가 당대표 경선에서 떨어지면 이번 문자 파동으로 인한 것이라는 서사가 형성되지 않겠나. 1월에 벌어진 일이 6개월 만에 드러났듯이 몇 달 뒤에 또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들이 2024년 7월8일 오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제주 합동연설회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왼쪽부터 원희룡·나경원·한동훈·윤상현 후보. 연합뉴스

국민의힘 당대표 후보들이 2024년 7월8일 오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4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제주 합동연설회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왼쪽부터 원희룡·나경원·한동훈·윤상현 후보. 연합뉴스


모두를 ‘패자’로 만든 자중지란

이번 싸움에 과연 승자가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문자 파동의 진원지로 의심받는 친윤계(친윤석열계)의 지원을 받는 원희룡 후보는 문자 파동 국면에서 오히려 존재감이 사라졌다. 원 후보는 첫 티브이 토론회에서 “능력과 리더십 경쟁으로 모범을 보이겠다”며 문자 파동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윤 대통령과의 친분을 내세우는 것 외에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원 후보는 이번 토론회에서도 한 후보의 집중 공격에 밀리는 모습을 보이며 정치력을 과시하는 데도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경원 후보나 윤상현 후보도 한 후보를 향한 공격에만 주력할 뿐 전당대회의 주인공으로 떠오르지 못하는 모습이다.

한동훈 후보는 이번 문자 파동으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 김 여사의 문자메시지를 받아놓고도 사과를 이끌어내지 못해 선거를 참패로 이끌었다는 ‘패배 책임론’이 가장 뼈아픈 대목이다. 여기에 더해 영부인의 문자메시지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은 ‘무례함’도 예의를 중시하는 보수 지지층의 실망을 자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번 문자 파동에 대해 한 후보가 “당무 개입이자 전당대회 개입”이라며 윤 대통령과 전면전을 선포한 것은 국민의힘 당원들이 가장 우려하는 ‘당정 관계 파탄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로 가장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다. 김 여사는 총선 국면에서 여당 대표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행위로 ‘국정 농단’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것에 더해 명품백 수수 논란에 대해 지금이라도 사과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은 “장막 뒤에 조용히 있어야 할 김 여사가 이번 사태로 또다시 정치권 전면에 등장했다”며 “친윤계가 김 여사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도 ‘부인 보호’에만 몰두한 나머지 공과 사를 구분 짓지 못하는 모습이 부각되고 있다. 한 후보가 김 여사의 문자를 무시한 사실을 알게 된 뒤 “이런 ××인데 어떻게 믿느냐”는 취지로 격노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등 ‘격노설’이 수시로 튀어나오는 것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 능력을 의심케 한다. 6개월 전의 문자메시지를 전당대회 국면에서 공개하는 행위가 상식적으로 윤 대통령의 허락 없이 이뤄지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 ‘당무 개입’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스스로 레임덕을 자초한 지점이다.

여당의 자중지란에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안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추경호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7월8일 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이번 문자 파동을 두고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공방으로 자해적 행태”라고 비판하며 “후보자들은 과거보다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민생을 위해 무엇을 할지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황우여 비상대책위원장도 같은 회의에서 “전당대회가 과도한 비난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는 일부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우려했다.

윤-한 관계, 루비콘강 건너다

여당 당권주자들은 이번 사태가 전당대회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까지 ‘한동훈 대세론’이 크게 흔들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 후보가 이번 문자 파동을 딛고 당대표에 당선되더라도 이미 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루비콘강’을 건넌 상황에서 이를 어떻게 회복할지 미지수다. 벌써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여권의 분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갈라진 대로 갈라진 당심을 봉합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제다. 이 모든 상황을 허탈함 속에 지켜보는 국민까지 포함해 모두를 패자로 만들어버린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후폭풍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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