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우리 국민 한 사람이 연간 56.7㎏(2022년 기준)씩 먹는 ‘주곡’이다. 정부는 연간 쌀 생산량의 10% 안팎인 30만~50만t을 매년 쟁여놓는다. 수급 불안, 천재지변 등 비상시에 대비(양곡관리법 제2조)해 쌀 등 양곡을 사들이는 ‘공공비축제’다. 양곡의 매입 물량과 시기는 정부가 재량껏 판단했다. 2022년 3월 쌀값이 한 해 전보다 10% 이상 하락했고, 급기야 9월 45년 만에 최대 폭인 24.9% 급락했다. 농민들 속이 타들어가도 손 놓고 있는 정부에 대고 농민단체 등은 ‘매입 기준을 법으로 정하라’고 요구했다.
2023년 3월23일 야당(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해 ‘쌀값이 전년도 대비 5~8% 떨어지는 등의 경우엔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의무 매입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12일 뒤 4월4일 국무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고, 4월13일 국회 재투표에서 재의안이 부결(찬성 177, 반대 112, 무효 1)됐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법안을 재의결하려면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박흥식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의 말이다. “8% 떨어져도 쌀을 안 사겠다는 거잖아요. 5%에서 많이 양보해 법안을 만든 건데. 농민은 죽으라는 거예요.”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 모두 사들여야 하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윤 대통령은 거부권 행사 배경을 설명했다. ‘주곡’이고 완전 자급에 가까운 자급률(2021년 84.6%)을 유지한다는 정책목표에 맞춰 쌀값은 ‘시장’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는다. 너무 비싸면 가계 부담이, 너무 싸면 농업 기반이 붕괴될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공공비축제를 활용해 쌀을 방출하거나 매입하면서 가격을 조정한다.
“쌀값은 수요·공급만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2022년 9월25일 정부가 90만t을 매입하겠다고 발표했음에도 잠시 올랐다가 계속 떨어지는 게 그 증거예요. 시장에 쌀 재고가 부족한데도 쌀값이 떨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쌀값은 정부가 결정합니다. 시장은 쌀이 언제 방출돼 쌀값이 떨어지지 않을까, 정부 눈치를 보게 됩니다.” 엄청나 전국쌀생산자협회 정책위원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통계청 산지쌀값(도정한 쌀 20㎏의 도맷값)은 정부의 쌀 90만t 매입 계획 발표 뒤 2022년 10월 한 달 찔끔 오른 뒤 계속 하락했다. 2023년 4월5일 산지쌀값은 4만4585원으로 한 해 전보다 4.8%, 2년 전보다 23.8% 떨어졌다. 농림축산식품부 ‘민간 쌀 재고량 통계’를 보면 2023년 3월10일 기준 쌀 재고량도 94만1179t으로 한 해 전보다 27.0% 적다. 시장에 쌀이 부족한데도 농협·미곡종합처리장 등 도매상들이 쌀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문제는 쌀값 안정으로 농민 이익을 보호해야 할(헌법 제123조) 농식품부가 뒷짐 지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쌀값 하락폭이 극심하던 2022년 8월10일 농식품부는 대통령 업무보고 때 쌀값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8월2일 농식품부 국회 업무보고에서 쌀값이 떨어지는 데 대한 국회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진 뒤의 업무보고였다. 이후 양곡관리법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도 ‘쌀 의무 수매=혈세 낭비’라는 점을 강조했다. 농민단체들은 ‘쌀값이 떨어질 땐 느긋하고 올랐을 때 발 빠른’ 정부의 태도에 대한 학습효과가 시장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본다.
또 정부의 공공비축미 매입·방출 기준인 ‘양곡수급안정대책 수립·시행 등에 관한 규정’(농림축산식품부 고시)에서 공공비축미 매입은 ‘할 수 있다’는 가능 조항이지만 방출은 일정 조건이 되면 반드시 팔아야 하는 ‘의무 조항’이다. 공공비축미 관리 체계는 자유시장·농가소득 보장보단 물가안정이라는 정책목표에 치우쳐 설계됐다.
‘2022년 쌀값 대폭락’을 바라보는 정부와 농민의 시각차는 매우 크다. 농민은 수요 대책 부족 등 농정 실패를, 정부는 농민이 쌀 생산을 줄이려 하지 않는 것을 각각 근본원인으로 본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2022년 10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쌀값이 떨어져도 쌀농사가 줄지 않는 이유’에 대해 “벼는 다른 작물에 비해 자동화가 잘돼 노동력이 적게 든다. 1ha 농사를 짓는 데 110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풀타임으로 (1년에) 10~11일만 일하면 된다는 얘기다. 농사짓기 쉽고 소득률도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엄청나 정책위원장은 “농민을 쌀 과잉생산해서 문제를 일으킨 죄인으로 취급해 문제에 접근하는 것 같다”며 “다른 농작물에도 기계를 지원하고 안정적 가격을 보장하면 되지 않냐”고 꼬집었다. 박흥식 전 전농 의장은 “정부가 소비량을 어떻게 늘릴지 고민하지 않고 생산하는 농민 탓만 한다. 요즘 여당에서 ‘1천원 아침밥’을 띄우던데 그런 쌀 소비 지원책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양곡관리법에 반대하는 논리로 갖고 온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양곡관리법 개정안 분석’ 보고서도 논란이다. 보고서는 “매년 1조원 이상의 예산이 추가로 들어가는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분석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4월11일 기자회견을 열고 “해당 보고서는 쌀 생산량 및 재배면적 감소율은 과소 추정, 단위면적당 생산량은 과다 추정한 부실·과장 보고서”라고 주장했다. 한 예로 최근 10년간 쌀 재배면적은 연평균 1.52% 줄었지만, 이 보고서는 향후 연 0.54%씩 재배면적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경실련은 지난 20년간 추세를 바탕으로 쌀 매입 비용이 연간 598억원일 것으로 추산했다.
“고품질 쌀 생산을 확대하기 위해 다수확 품종 재배를 축소해나갈 계획이다.”(3월8일 농식품부 ‘쌀 적정생산 대책’)
정부는 쌀 생산 줄이기 총력전에 나선 모양새다. 농식품부는 2023년 1월부터 ‘쌀 적정생산 추진단’을 구성·운영했다. 이 과정에서 ‘신동진’ 품종 등 10a(1000㎡)당 570㎏ 이상 소출이 나는 벼품종을 2024년부터 공공비축미 매입 제한 품종에 추가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신동진’은 2022년 기준 전북 지역 재배면적은 6만㏊로 지역 전체의 53%에 이른다. 전북농업인단체연합회는 2월20일 기자회견을 열고 “맛과 품질이 입증돼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신동진을 단순히 수확량 때문에 퇴출한다니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농식품부는 신동진 퇴출 시기를 2026년까지로 유예한다고 물러섰다.
신원식 전북 농식품축산생명국장은 “농식품부 발표는 너무 갑작스럽고 선택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이라며 “생산량을 줄이는 방향엔 공감하지만 설득보다는 강제와 금지로 정책을 실현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생산량을 줄이는 것으로 친환경적인 다른 방법이 있다. 곽현용 한살림생산자연합회 사무처장은 “친환경 쌀은 기존 쌀 대비 생산량이 70~75% 수준이다. 친환경농업을 늘리면 쌀 과잉도 해결되고 시류에도 맞는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임산부 친환경농산물 꾸러미’ 사업을 폐지하고, 친환경 농가가 줄어드는 걸 방치한다. 농업정책에 대체 어떤 관점이 있는 건지 의문”이라고 했다. 2020~2022년 친환경농업 관련 인증 농가는 5만9249가구에서 5만632가구로 줄었고, 재배면적도 8만1826ha에서 6만9815ha로 감소했다.
정부는 2023년 2월 기존 논에 콩·조사료·가루쌀을 심으면 ㏊당 50만~430만원을 지급하는 ‘전략작물직불제’ 시행을 발표했다. 특히 쉽게 빻아지는 것이 특징인 ‘가루쌀’을 2022년 100㏊ 규모의 전문 생산단지 규모를 2026년 4만2100㏊까지 대폭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가루쌀을 심으면 쌀 생산도 줄이고 수입밀도 대체하는 1석2조 효과가 난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3년 4월12일 ‘쿠팡’에서 100g당 수입밀(곰표) 가격은 188원, 국산밀(해표)은 416원, 쌀가루(대구농산㈜)는 632원이다. 더욱이 쌀가루를 밀가루로 쓰려면 글루텐을 첨가해야 하는 등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정부 지원 없이 가루쌀이 시장의 선택을 받을지 의문스러운 대목이다.
김경아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사무총장은 “쌀가루는 밀가루를 대체할 수 없다. 시장성이 없어 우리밀로도 못 따라가는 수입밀을 비싼 가루쌀로 대체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무턱대고 쌀 경작지만 줄이면 된다는 식이라 이런 대책이 나온 것 ”이라고 꼬집었다.
‘전략작물직불제’ 예산은 1121억원, 가구당 평균 지원액도 250만원 수준이다. 쌀 농가 유인책으로 충분하지 않다. 조경희 김제시농민회장은 “3년 전 끝난 비슷한 성격의 ‘논 대체 사업’(논 타작물 재배 지원사업)의 평균 지원액이 ㏊당 340만원이었다. 논에 콩 등을 심으면 쌀농사를 할 때보다 인건비와 비룟값 등 생산비가 더 든다”고 말했다.
과연 구조적인 쌀 과잉이 맞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불과 3년 전인 2020년만 해도 태풍과 장마 등의 영향으로 쌀 생산량이 수요량 대비 30만t 정도 부족해 ‘비축 물량 부족’이 우려돼 당시 정부가 긴급대책 마련에 나섰다. 국내외 이상기후가 잦아진 환경에서 식량 위기에 대비해야 할 필요성은 더 커진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상에 따라 2014년부터 매년 쌀 40만8700t을 수입하는 저율관세할당물량(TRQ·관세율 5%)도 논란이다. 2022년 ‘쌀값 대폭락’의 원인이 된 2021년 쌀의 과잉생산량(생산량 - 수요량)은 27만t 정도였다. 2022년 과잉생산량도 15만t가량이다. 일껏 국내에서 쌀 생산을 줄이고는 외국에서 쌀을 더 받아 ‘잉여 쌀’을 만드는 셈이다. 농민단체들은 정부가 WTO 재협상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흥식 전 의장은 “수입쌀 중 4만t가량이 밥쌀용이다. 정부가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 현재 5만t 정도 하는 해외 원조 물량도 상황에 따라 늘리는 등 다양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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