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한-일 정상회담을 지나 4월 한-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목에 난데없이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이 교체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전격적인 교체 결정의 이유와 과정은 불투명하고, 사후 설명은 불충분하다.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란 연막을 걷어낸 자리에, 무너진 정책 결정 시스템과 그 배후에 자리한 윤 대통령의 ‘확증편향’이 있다. 한국 외교·안보의 최대 난제는 ‘대통령 리스크’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되짚어보자. 지난 3월29일 오후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돌연 사임했다. 이어 불과 1시간 남짓 만에 조태용 주미대사가 신임 실장으로 지명됐다. 대통령실은 전날까지 “안보실장 교체를 검토한 바 없다”고 강조했다. 외교부 재외공관장 회의(3월29~31일) 참석을 위해 일시 귀국했던 조 신임 실장은 지명 직후, 다음날 오후로 예고한 외교부 출입기자단 간담회를 취소했다. 안보실장 교체가 갑작스럽게 내려진 결정임을 유추할 수 있다. 대통령실 쪽 설명을 종합하면, 3월29일 오후 윤 대통령이 직접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안보에 관한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는 장관급 정무직 공무원(정부조직법 15조)이다. 통일·외교·국방부의 업무를 아우르는 터라, 흔히 ‘외교·안보 정책의 사령탑’으로 불린다. 하루아침에, 내키는 대로 교체할 자리가 아니란 뜻이다. 더구나 김 전 실장은 3월 초 직접 미국을 방문해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윤 대통령의 4월 국빈 방문을 최종 조율한 당사자다. 한-미 동맹을 최우선시하는 윤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안보실장을 교체한 것을 두고 “상식적이지 않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조태용 신임 실장이 별다른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지명 다음날 바로 업무를 시작한 것도 비상식적이다. 전 청와대 외교·안보 고위 당국자는 이렇게 짚었다. “고위 공직자는 사임하기 전 재임 기간 비위가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또 현직이라도 대통령실 근무를 위해선 인사 검증 절차를 따로 밟아야 한다. 특히 직전 직책에 임명된 지 6개월이 지났다면, 약식으로라도 반드시 비위 여부를 살피게 된다. 조 실장이 이런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것 자체가 안보실장 교체 결정이 즉흥적으로 이뤄졌음을 방증한다.”
외교·안보 정책과 관련해 윤 대통령이 자기 확신에 기대 독단적 결정을 내린 대표적 사례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다. 집권 이전부터 △한-미 동맹 복원 △한-일 관계 개선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대외정책의 핵심으로 꼽은 윤 대통령은 취임 직후 한-미 정상회담을 연 데 이어, 지난해 6월부터 강제동원 문제를 두고 국장급 실무협의와 장차관 등 고위급 협의를 독려했다. 애초 협의의 전제는 일본 쪽의 사죄와 배상 참여 등 ‘성의 있는 호응 조치’였다. 지난 1월 이른바 ‘병존적·중첩적 채무인수’ 방식을 통한 ‘제3자 변제’를 사실상 정부 해법으로 공개한 뒤에도 정부 당국자는 “일본 쪽 호응조치가 나오기 전엔 해법을 공식 발표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 2월 중순 뮌헨안보회의 참석 뒤 귀국길에 기자들과 만나 일본 쪽의 ‘정치적 결단’을 재차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2월 말께 분위기가 돌변했다. 대통령실 쪽이 ‘빠른 해결’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말이 외교가에 떠돌기 시작했다. 보수진영 원로들조차 “서둘러선 안 된다”고 공공연히 경고했지만, 윤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말을 앞세웠다. 결국 정부는 3월6일 ‘제3자 변제’ 방안을 강제동원 배상 해법으로 공식 발표했다. 피해자 쪽의 거센 반발 속에 비판 여론이 급등했지만, 윤 대통령은 그로부터 열흘 뒤 한-일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일본 도쿄로 향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 12년 만에 이뤄진 한국 대통령의 방일 정상회담이었다.
지난 3월16일 정상회담을 마친 윤 대통령이 기시다 후미오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음에도, 기시다 총리가 내놓은 발언은 충격적이라 할 만했다. 이날 회견에서 기시다 총리는 세 문장을 되풀이 강조했다.
“얼마 전 한국 정부가 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문제에 관한 조치를 발표했다. 그때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된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로서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앞으로 (한국 쪽) 조치 실시와 함께 양국 간에 정치·경제·문화 등 분야에서 교류가 힘차게 확대될 것으로 기대한다.”
자세히 풀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제의 식민지배는 불법이며 △이에 기반해 이뤄진 강제동원은 반인도적 범죄행위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 대상이 아니므로 △일본 가해 전범기업은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후 일본 보수진영은 강제동원의 불법성과 강제성을 부정하기 위해 ‘징용공’ 등 기존에 쓰던 표현 대신 ‘옛 조선반도 출신 노동자’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과 회견장에 나란히 서서 강제동원의 불법성·강제성을 부정했다는 뜻이다.
두 번째 문장은 해괴하기까지 하다. 정부는 이를 과거사에 대한 일본 쪽의 사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정신승리’식 오독임을 알 수 있다. 정확히 말해 기시다 총리는 이날 회견에서 아무런 새로운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그저 한국 정부가 ‘제3자 변제’ 해법을 발표했던 3월6일(‘그때’), 자신이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로서 계승하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과거형으로 재차 언급했을 뿐이다.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이란 표현에도 함정이 숨어 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명시한 고노 담화(1993년)·무라야마 담화(1995년)·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간 나오토 담화(2010년)뿐 아니라 아베 담화(2015년)도 ‘전체로서 계승’할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패전 70주년에 맞춰 발표한 담화에서 한반도 식민화의 서막을 연 러-일전쟁에 대해 “식민지 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다”고 주장했다. 또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과 관련해선 “지난 대전(2차 세계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해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유체이탈식 과거형’ 사죄란 점에서 기시다 총리의 기자회견 발언과 맥을 같이한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4월3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윤석열-기시다 정상회담에 대해 “한-일 관계가 서로 바람직한 관계로 가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가 회견에서 강조한 세 번째 문장을 보면, 성급한 평가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분명 양국 교류 확대의 전제로 한국 쪽 ‘조치 실시’를 내세웠다. ‘제3자 변제’ 해법의 이행과 한-일 관계 개선을 연계하겠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법원 배상 확정 판결을 받은 원고 15명 가운데 생존 피해자 3명을 포함한 상당수가 정부의 해법을 거부하고 있는 터라, 정부 해법의 순조로운 이행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 총리가 내세운 한-일 관계 개선의 ‘토대’는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직업 외교관 출신 외교·안보 전문가는 이렇게 말했다.
“2018년 대법원 판결이 불러온 파장은 나라 안팎에서 엄청났다. 정부가 대법원 판결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수습하려 했다면, 당연히 초당적·거국적 논의를 거쳐 여론을 모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강제동원 배상 해법이란 엄청나게 정치적인 일을 하면서, 아무런 정치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심각한 문제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부 정책은 대통령실에서 각 부처 실무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협의를 거치며 만들어진다. 따라서 사전에 예고하고, 사후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 정부에선 이런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외교에는 상대가 있고, 다양하고 단계적인 협의 채널이 존재한다. 만약 실무급에서 이미 매듭진 사안을 윗선에서 틀어버리면, 상대국으로선 협의에 응할 이유가 사라진다. 전직 외교·안보 핵심 당국자는 “대통령의 독단적이고 즉흥적인 결정이 되풀이되면 참모진은 손을 놓게 되고, 결국 시스템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안보 정책은 가능한 모든 변수와 제약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내가 책임진다’는 식의 결정은 자칫 국가안보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납득할 수 없는 행태다.” 한 외교·안보 분야 원로의 말이다. 이어 그는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정책 결정은 과감한 게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것”이라며 “청와대를 ‘구중궁궐’이라며 박차고 나와 용산으로 옮겨온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의 전형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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