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각하’를 방패 삼아 숨어버린 재판관들

국회 법관 탄핵소추위원 대리인단 양홍석·김선휴 변호사 인터뷰
“헌법재판소가 형식논리 앞세워 주어진 책무를 저버렸다”
등록 2021-11-06 05:11 수정 2021-11-06 11:11
헌법재판소의 법관 탄핵심판 선고 다음날인 2021년 10월29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 김선휴 변호사를 만났다. 김진수 선임기자

헌법재판소의 법관 탄핵심판 선고 다음날인 2021년 10월29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 김선휴 변호사를 만났다. 김진수 선임기자

“이 사건 심판 청구를 각하한다.”

임성근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 대한 탄핵심판은 10월28일 이렇게 막을 내렸다. 각하는 재판의 요건이 미비할 때 내용을 판단하지 않고 재판을 종료하는 결정이다. 임 전 판사가 임기 만료로 퇴직했기 때문에 파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헌법재판관 5명(이선애·이은애·이종석·이영진·이미선)이 ‘각하’ 의견을 냈고, 문형배 재판관은 ‘심판 절차 종료’ 의견을 냈다. 이들은 임 전 판사의 재판 개입 행위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임 전 판사가 퇴직했어도 그의 행위는 심판 대상이 맞다고 본 재판관 3명(유남석·이석태·김기영)이 임기 만료로 부득이하게 파면하지 못해도 그가 “중대하게 헌법을 위반했다”고 확인했을 뿐이다.

‘법관 임성근 탄핵소추’는 2월4일 국회 재적의원 300명 중 179명 찬성으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면서 시작됐다. 변호사 7명이 지난 8개월 동안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국회 소추위원을 대리했다. 헌재가 각하 결정을 내린 다음날인 10월29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소추위원 대리인 양홍석, 김선휴 변호사를 만났다. 이들은 “헌재가 형식논리 뒤에 숨어 주어진 책무를 저버렸다”고 말했다. ‘각하’라는 결론보다도 각하를 방패 삼아 실체적 판단을 회피했다는 점에서 헌재의 결정이 문제라는 비판이다.

“현재 스스로 존재 의의 깎아내려”

2021년 2월4일 임성근 전 판사에 대한 법관 탄핵소추안이 허겁지겁 국회를 통과했다. 임 전 판사의 법관 임기(10년)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시점이다. 헌재가 이미 퇴직한 사람의 파면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국회 소추위원 대리인단은 헌재가 “각하를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하리라는 점은 예상했지만 “(헌재의 다른) 각하 결정과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초의 법관 탄핵 사건이라는 상징성이 있고, 앞으로도 임 전 판사와 비슷한 재판 관여 행위가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헌재가 “임 전 판사 행위의 위헌·위법성을 확인해주리라”고 본 것이다.

대리인단은 지난 8개월 동안 헌재의 적극적인 판단을 요청했다. 앞서 헌재는 주요한 사건을 ‘헌법적으로 해명’해왔다. 2020년 4월 백남기 농민에게 물대포를 쏜 경찰의 행위에 대해 당사자가 이미 숨졌지만 ‘위헌’이라 확인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재판관 6명이 ‘각하’라는 이유로 ‘헌법적 해명’에 대한 판단을 멈췄다.

헌재 결정문 113쪽 중 54쪽이 ‘각하’ 혹은 ‘심판 종료 절차’여야만 하는 이유로 채워졌다. 위헌·위법 여부를 확인해달라는 대리인단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탄핵심판은 한 개인(임성근)을 넘어서 국가기관(법관)으로서의 책임을 묻는 제도다. 그런데 이번 결정은 단순히 한 개인을 직에서 배제하는 것이 탄핵심판제도나 탄핵소추 의결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그 제도의 의미를 축소했다. 이전의 대통령 탄핵 결정에서 밝힌 탄핵심판제도의 취지보다 후퇴했다. 탄핵심판은 파면이라는 결과뿐 아니라 그 심판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위헌·위법 행위를 규명하고 어떤 행위가 탄핵 사유가 되는지 명백히 밝히는 것이다. 그래야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위헌·위법 사유를 판단하더라도 다른 국가기관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며 실체적 판단을 회피했다. 헌재 스스로 헌재와 탄핵심판제도의 존재 의의를 깎아내린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직을 박탈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헌법재판소가 이미 임기 만료된 판사의 직무집행 위헌·위법성을 해명하는 것뿐인데 그마저도 왜 이렇게 소극적이었을까.”(김선휴 변호사)

헌법재판소의 법관 탄핵심판 선고 다음날인 2021년 10월29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 양홍석변호사를 만났다. 김진수 선임기자

헌법재판소의 법관 탄핵심판 선고 다음날인 2021년 10월29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국회 탄핵소추위원 대리인 양홍석변호사를 만났다. 김진수 선임기자

“법관 독립 침해의 기준 정립은 헌재 몫”

인용 의견을 낸 재판관 3명을 비롯해, 이미선 재판관은 각하에 동의하면서도 탄핵심판제도의 취지를 각하 의견을 낸 다른 재판관 4명과 다르게 해석했다. 결정문 내부에서 재판관들 의견이 상호 반박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입장에서든 법 논리는 구성할 수 있다. 다수의견도 소수의견도 논박할 수 있다. 문제는 입장이다. 입장이 정해지면 논리는 만들 수 있고 채택할 수 있다. 단순히 법 형식상 임기 만료된 법관을 파면하는 게 가능한지 고민하는 게 아니라 헌정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방향은 무엇인지 고민해서 헌재의 입장을 정했어야 한다. 각하가 학술적으로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헌재의 존재 이유를 방기한 것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고 본다. 임 전 판사 행위를 평가한 것도 아니고 같은 행위의 반복을 막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 각하 결정이 우리 사회를 진일보시키는 데 어떤 기여를 하나.”(양홍석 변호사)

임성근 전 판사는 2014년 2월~2016년 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로 일하면서 청와대 관심 사건을 비롯해 3건의 형사재판에 개입했다. 김선휴 변호사는 “법정에서 오간 논리나 증거 외에 다른 무언가가 재판에 개입한, 장막 뒤에 가려졌던 법정의 이면이 밝혀진 굉장히 드문 사건”이라며 “충격적이면서도 (헌법 질서를 바로잡을)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2017~2018년 법원 자체 진상 조사, 2018년 법원에서 가장 낮은 수위의 징계인 견책 처분, 2020~2021년 형사재판 1·2심 무죄 판결이 있었지만, “헌법이 판사에게 부여한 재판 독립 의무, 이를 침해하는 행위의 판단 기준을 세우는 건 헌재의 몫”으로 남아 있 었다.

2021년 3월24일 임 전 판사 탄핵심판 사건의 첫 변론준비기일에서 이영진 재판관이 이렇게 말했다. “사건의 핵심은 피청구인(임 전 판사)의 재판 관여가 헌법이나 법률 위반으로 탄핵 사유인지 여부다.” “사상 최초의 중요 사건인데 저희(재판관들)도 신중하면서도 치밀하게 여러 가지 잘 검토하면서 재판하려 한다.”

무책임한 속전속결 재판

그러나 대리인단은 두 번째 변론기일부터 법정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재판부는 변론을 서둘러 종결하려 했다. 재판 관여 당사자를 포함해 판사 6명을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마지막 변론기일, 법정에서 증거를 설명할 시간도 어렵게 얻어냈다.

재판이 변론준비기일과 선고기일을 포함해도 5차례만 열렸다. 시간으로 따져보니 5차례 합쳐서 모두 8시간57분 진행됐더라.

“사건의 의미도 있는데 최소한의 증거 조사 기회도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각하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증인신문이 이뤄지고 사회적 관심을 받으면 법정뿐 아니라 법정 밖에서도 논의가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나머지 사법부 구성원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 준칙도 마련됐을 거다.”(김선휴 변호사)

헌재 다수의견은 왜 구체적인 판단까지 나아가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이건 사실 진보-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보수적이면 사법 독립이 침해된 상황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섰을 거다. 탄핵이라는 건 ‘명예형’에 가깝다. 이미 건강상 이유로 퇴직까지 했는데 이런 판단까지 내려야 하나 고민했을 수 있고 임 전 판사보다 문제 많은 사람도 탄핵 안 됐는데 그를 헌법 질서를 파괴한 법관의 대표 격으로 역사에 자리매김시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 이런 헌법 이외의 고려 요소가 입장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양홍석 변 호사)

판사들에게 준 사인

무위로 돌아간 판사 탄핵심판은 어떤 흔적을 남길까. 양홍석 변호사는 다른 판사들에게 일종의 ‘신호’(사인)를 줄 것을 우려했다. “이런 위헌적인 재판 관여 행위조차 단죄되지 않으면, 판사는 아무런 통제도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재판’은 점점 힘들어진다. 국민으로서는 좋은 판사를 선택해 재판받을 권리도 없는데, 탄핵당할 만큼 나쁜 판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일반 국민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판사들이 충분히 고민해 판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것이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2008년 제대로 반성했더라면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