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2018년 7월23일 노회찬 의원은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서에 “당은 앞으로 나아가라”고 남겼다. 정의당은 슬픔을 딛고 ‘노회찬 정신’ 계승을 외치며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정의당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통을 겪고 있다. 노 전 의원이 오랫동안 꿈꿔온 공직선거법 개정(준연동형비례제)이 이뤄졌지만, 21대 총선에서 20대 국회와 똑같은 초라한 성적(6석)을 거뒀다. 정의당은 거대 양당과 비례위성정당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당대표 임기가 2021년 7월까지인 심상정 의원은 총선 성적에 책임지고 지난 5월 임기를 단축해 새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만 대표직을 맡기로 했다.
시선 사로잡을 ‘뾰족한’ 내용은 담기지 않아
“21대 총선 이후, 우리는 낙담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침체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7월19일 정의당 혁신위원회 혁신제안서 초안 ‘혁신안 초안을 제출하며’ 중)
당연히 변화와 쇄신의 목소리가 당 안팎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5월17일 정의당 전국위원회에서는 ‘포스트 심상정’ 체제를 준비할 혁신위원회 출범을 의결했다. 일주일 만인 5월24일 위원장을 맡은 장혜영 의원 등 당 안팎 인사 18명이 위원으로 참여하는 혁신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정체성 재구성을 포함해 당을 뜯어고치겠다며 출범한 정의당 혁신위는 활동 시작 두 달이 채 안 된 7월19일 ‘혁신제안서’(초안)를 발표했다. 혁신위는 “56일 동안 전국 각지에서 80여 개의 간담회를 진행하며 800명 넘는 당원들과 직접 대화하고 온라인을 통해 폭넓은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으며 언론인, 연구자, 시민사회 등 당 외부의 의견도 청해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발표된 혁신안 초안은 당 안팎의 시선을 사로잡을 ‘뾰족한’ 내용이 담기지 못했다. 당원들은 대체로 “밋밋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정의당의 한 주요 당직자는 “2004년 원내에 진출한 첫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내건 ‘무상의료, 무상교육, 부유세’처럼 정의당이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어떤 의제를 우리 사회에 관철해나갈지 등 좀더 ‘각이 서는’ 내용이 담기지 않아 아쉽다”고 말했다.
이런 평가에 혁신안 초안 도출에 참여했던 혁신위원도 동의한다. 홍명교 혁신위원은 그 배경에 대해 “논쟁은 굉장히 많이 했는데 의견수렴을 위한 초안이다보니 혁신위원들 사이에 모든 걸 합의할 수는 없었다. 합의가 안 된 내용은 다 빼고, 합의된 내용만 넣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한 ‘당비 1천원 지지당원제’ 도입처럼 첨예하게 의견이 갈리는 항목의 경우 아예 A안(당비 1천원 구간 신설), B안(1만원 당비 현행 유지)을 함께 나열했다.
“모든 것이 변화해야 할 이 순간, 기존의 사회를 유지하려는 거대 양당에게서 대안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혁신안 초안을 제출하며’ 중)
혁신안 초안이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정의당이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2중대’ 논란에 흔들리는 당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이는 정의당 안팎에서 제기된 해묵은 질문이자 과제다.
민주당과의 관계 어떻게 설정할까
혁신위 안에선 정의당의 존재 목적과 관련해 ‘사회운동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과 ‘정당으로서 더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원내 정당으로서 둘 다 함께 추구해야 할 목적이지만 어느 쪽에 무게중심을 두느냐가 당 정체성을 결정할 것이다. 엄정애 혁신위원은 “불평등·기후·노동 문제와 사회적 소수자·약자 문제 해결과 소수자·약자를 대변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강민진 혁신위원은 “진보적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이 함께 협력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정당으로서 정의당의 목표는 사회운동 강화가 아니라 정권 획득이라고 생각한다”며 “(환경미화원 등) ‘투명인간’이라고 불리는 분들 중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 많다. 이분들과 더불어 조직된 시민들의 목소리까지 모두 정치에 반영되도록 정당 활동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체성 설정은 소수정당으로서 정의당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민주당 2중대론’을 어떻게 극복할지와 연결된다. 특히 2019년 ‘조국 사태’ 이후 ‘2중대론’은 정의당의 발목을 잡아왔다. 공직자의 도덕성과 검찰 개혁이라는 두 쟁점 사이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보이며 ‘범여권’으로 묶인 탓이다. 결국 총선 때 정의당 청년 후보들은 3월 “조국 전 장관 임명에 단호한 입장을 밝히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은 2012년 정의당 창당 때부터 고민거리다. 2013년 1월 정의당 정체성 확립을 위해 실시한 ‘당 주요간부 의식조사’(당대표와 최고위원, 국회의원, 당직자 등 263명 대상)에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과의 관계는 ‘사안별 공조’가 65.6%로 가장 많았고, ‘독자 행보’는 14.0%로 조사됐다. 원내 소수 세력인 정의당이 진보·개혁 세력으로 묶이는 민주당과 사안에 따라 선택적 공조를 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볼 수 있다. 20대 국회에서도 6석으로 국회 안에서 운신 폭이 좁았던 정의당은 연동형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법 개정을 위해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는 전략을 택했다.
또 당내 세력의 역학관계와 당원 구성을 살펴보면 정의당호의 순항은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노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뒤 40대 이상 당원이 1만여 명 입당하는 등 기존 40대 이하 위주였던 정의당 당원 구성이 한층 다양해졌다. 하지만 민주당과 관계 설정이라는 틀에서 보면 세대, 젠더 등 여러 분야에서 갈등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모친상 빈소에 여권 핵심 인사들이 보낸 조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조문을 두고 당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정의당은 안 전 지사 모친상 빈소에 문재인 대통령이 조화를 보낸 데 대해 7월6일 대변인 논평으로 “민주당 대표, 원내대표, 대통령이라는 직책을 걸고 조화를 보낸 행동이 피해자에게, 한국 사회에 성폭력에도 지지 않는 정치권의 연대로 비치진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당원들 사이에서는 “시의적절한 논평”이라는 긍정 평가와 “탈당하겠다”며 반발하는 반응이 엇갈렸다.
조문 거부 반발 탈당 2500명에 이르러
곧이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박 전 시장 조문 논란이 있었다. 서울시가 박 전 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른다고 밝히자, 7월10일 류호정(27) 의원이 피해자에게 연대 의사를 표하며 “조문하지 않을 생각”을, 장혜영(33) 의원도 같은 날 “차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애도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당 내부에서는 피해자 연대에 대한 긍정 평가와 함께 조문 거부 의사를 굳이 글로 밝힌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비판도 거세게 제기됐다.
이후 류·장 의원의 조문 거부에 반발하는 정의당 당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는데 그 수가 25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나흘 뒤인 7월14일 심상정 대표가 의원총회에서 “두 의원의 메시지가 유족분들과 시민의 추모 감정에 상처를 드렸다면 대표로서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고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이 사과는 젊은 의원들의 소신을 당 지도부가 무시하는 모양새가 됐고 당내 갈등에 기름을 부었다. 정의당 여성주의자 모임은 “청년 의원을 동등한 동료 의원으로 존중하지 못했음을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라”고 반발했다. 세대 갈등, 젠더 이슈,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 등 중층적으로 쌓여 있던 다양한 문제가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기존의 정치가 대변하지 않았던, 오늘날의 사회구조에서 변두리로 내몰린 이들과 함께 진보정치의 제2막을 힘차게 시작합시다.”(‘혁신안 초안을 제출하며’ 중)
결론을 내리지 못했지만 혁신위는 정의당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보성 강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보인다. 정의당을 둘러싼 환경이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건강보험 보장성을 강화하는 ‘문재인 케어’로 의료 이용 문턱을 낮췄고, 고등학교 무상교육을 도입하는 등 기존 진보정당의 무상의료·무상교육 의제를 흡수해 실현했다. 정부·여당의 좌클릭으로 정의당 영역이 축소된 것이다. 민주당 협력 파트너로서 정의당의 존재감도 크게 줄었다. 혁신위원들은 당이 새로운 진보 의제를 깊고 힘있게 내놓아 존재감을 스스로 부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게 됐다고 판단한다.
2015년 제정된 현재의 정의당 강령은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추구한다.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강령에서 ‘포용적 복지국가’ 구현을 명시한다. 둘 사이 구분이 불명확하다. 이에 정의당 혁신위는 혁신안 초안에서 “‘정의로운 복지국가’의 내용을 정교화하거나 새로운 국가 비전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며 차기 지도부에 2021년 상반기까지 강령 개정을 권고했다. 강령 개정과 관련해 신장식 전 정의당 사무총장은 “2012년 정의당 창당 때 노회찬 공동대표가 한국적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채택하려고 했던 게 2015년에 가서야 정의당 강령에 담겼다. 이제 5년이 지난 만큼 최근 주요 이슈로 부각된 젠더, 생태, 평화 등을 포괄하는 한국적 사민주의를 선언하는 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 정의당의 분명한 정체성을 담은 강령이 있을 때 민주당과의 관계에서도 정세적 판단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준에 입각한 일관된 입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며 분명한 한국적 사민주의를 선언하는 강령을 통한 ‘민주당 2중대론’ 돌파를 제안했다.
이들은 부유세 도입, 그린 뉴딜 등 진보적 의제로 정치권에 돌풍을 일으킨 외국의 사례를 눈여겨본다. “미국의 버니 샌더스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사례에서 보듯 좌파적 대안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홍명교 혁신위원) “부와 자본의 세습을 실질적으로 막기 위한 조세정책 강화 등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강민진 혁신위원)
‘포스트 심상정’ 리더십도 과제
“많이 부족한 점들이 보이시겠지만 그 여백을 당원 여러분과 함께, 또 시민 여러분과 함께 채워나가겠습니다.”(7월19일 장혜영 혁신위원장 발언)
혁신위는 전국 17개 광역시도를 돌며 혁신안 초안에 대한 당원들의 의견을 듣고, 추가 논의를 거쳐 혁신안 최종안을 8월16일 전국위원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하지만 최종안에 초안보다 좀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당의 정체성 관련 내용이 ‘업데이트’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 혁신위원은 “혁신위 논의 결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현재로선 불분명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혁신안뿐만 아니라 ‘포스트 심상정’ 리더십을 만들어내는 것도 정의당에 중요한 과제다. 8월30일 정의당은 대의원대회에서 혁신안 최종안을 통과시키고, 9월 말까지 새 지도부를 구성할 계획이다. 새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한 인물은 아직(7월23일 현재) 없지만 윤소하 전 원내대표, 여영국 전 의원, 양경규 정의당 사회연대임금특별위원장, 김종철 선임대변인 등이 출마 예상자로 거론된다.
김규남 기자 3string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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