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의원(노회찬)에 대한 폭발적인 추모 열기가 끝난 뒤 정의당엔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고인의 뜻이 남았다. 당 지지율도 올라가고, 당원 가입도 급증했지만 이들의 고민은 깊어간다. 항상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진보 정치의 위기’라는 짐은 그의 부재로 더욱 무거워졌기 때문이다. 조문객이나 지역구민이 던진 한마디도 쉽게 흘려보낼 수 없다. “당을 떠나서 너무나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이 가셔서 안타깝다”는 사람들의 말에서도 ‘당을 떠나서’라는 부분이 귓가에 맴돈다. “고인께서 이렇게 많은 국민으로부터 광범위하게 사랑받으셨는데, 왜 그것이 그동안 정의당에 대한 지지로 온전히 이어지지 않았을까.”(임한솔 정의당 서대문구 의원)
“제1야당 운운 좀 민망하다”
<한겨레21>은 진보정당 1세대인 노회찬과 함께 2000~2004년 민주노동당(민노당) 창당에 참여해 20여 년간 진보정당과 함께한 40대 안팎의 ‘진보정당 2세대’에게 노회찬의 부재와 정의당의 미래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당직자, 보좌진 등을 거쳐 지난 6월 지방선거 기초의회 선거에서 당선된 김희서(41) 구로구 의원(재선), 이기중(38) 관악구 의원, 임한솔(37) 서대문구 의원이 응답했다. 이들을 8월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노회찬 의원의 부재는 정의당에 어떤 의미인가.임한솔 선거제도나 정치자금법, 원내교섭단체 기준 등 소수 정당인 정의당에 불리한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나마 원투 펀치(심상정·노회찬)가 워낙 강력해서 지금까지 간신히 버텨왔는데, 이제는 한 손마저 못 쓰게 된 상황이다.
김희서 사실 저희도 생각해보지 않아서…. “언제까지 심·노에게만 기댈 것이냐”는 이야기는 했는데 이제는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노회찬 의원이 잘해왔던 것에 갇히지 말고, 미래를 새롭게 열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은 든다.
이기중 그의 가장 큰 역할은 진보적인 가치와 노선을 대중적인 언어로 풀어내 대중을 설득하는 일을 했던 건데 그 이후에 많은 국회의원이 배출됐지만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은 없었다. 당장 메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정의당 지지율이 계속 오르고 있다. 실제 정의당의 실력과 일치하는 것인가.김희서 지지율 높게 나오지만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총선·지방선거 거치며 느낀 건데, 비례대표(정당 지지)는 정의당을 지지하지만 지역에서는 지지하지 않는, 냉정하게 보면 ‘반쪽짜리 정당’이다. 이게 지속되면 반쪽짜리 정당으로 굳어질 위기의 시기다.
임한솔 우리 당 지지율이 자유한국당보다 조금 높게 나온다고 제1야당 운운하는 건 좀 민망한 일이다. 월드컵 때 우리가 독일을 이겼다고 대회 자체를 성공적으로 치렀다고 평가할 수 있나. 당이 지역에 얼마나 뿌리내렸는지 한국당과 비교하면 여전히 코끼리 대 강아지 수준이다.
세 사람의 현실 인식은 냉철했다. 정의당은 ‘거대한 소수’라고 불렸던 민노당의 ‘영광’을 계승했지만 이를 확장하지 못했다. 노동·시민사회와의 연결망은 약해졌고, 무상의료·무상교육 등의 대표 정책 상품을 내놓은 뒤 ‘히트작’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이 대변하던 을들의 목소리나 진보적 정책 의제는 민주당에 주도권을 내주기도 했다. 애초에 정당의 뿌리가 약했고, 자주파(NL)와 평등파(PD)의 해묵은 갈등은 진보 정치를 더욱 쪼그라들게 했다. (원내 정당 중 진보정당으로 분류되는 당은 5석의 정의당과 1석의 민중당이다.)
민주당 매장에 있는데 정의당 찾겠나
결국 노회찬·심상정이라는 간판 정치인들의 ‘개인기’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흐름 속에서 당을 지켜온 그들에게 진보 정치의 과거는 반성과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었다.
정의당, 나아가 진보 정치 위축의 원인은 무엇인가.김희서 민노당 초창기에 가졌던 변별력이 약화했다. 민주당 일부 그룹이 진보적 의제를 받아들여 진보층의 지지를 일부 흡수했다. 진보정당은 상대적으로 변화가 크지 않았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에서 다양한 분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책은 연구하는 사람도, 그걸 대표하는 정치인도 역량이 나뉘고, 성장이 더뎠다. 내놓는 상품이 밀리고 있다. 민주당 일부 매장에서 살 수 있는데 집권 가능성이 약한 진보정당에서 같은 상품을 살 이유가 없지 않나. 정책 역량의 일부는 생계와 정치적 전망 등을 이유로 당을 떠나거나 민주당으로 갔다. 정책 연구 인력도 과거 민노당 시절의 절반 아래로 줄었다.
이기중 정책의 디테일한 부분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적 성패를 가르는 건 정책에서 드러나는 당의 가치와 노선이 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2004년 이후에 진보정당은 민주당과 차별화된 노선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에 머무른 측면이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민주당과 한편으로 묶여 같이 싸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더욱 정체성의 차이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됐다. 차별성을 보이지 못하는 게 가장 큰 문제 아닌가 싶다.
임한솔 정의당이 표방하는 바와 실제 지지하는 분들 사이에 간극이 있다. 정의당 당원 중 가장 많은 연령대가 40대다. 여론조사도 마찬가지. 평범한 40대 국민의 고민과 요구가 뭔지, 여기에 당이 무엇을 내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 정의당이 여성·노동·소수자를 이야기할 때 지지자들의 심리는 “내 삶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옳은 이야기니까”라고 지지를 보내는 것으로 읽힌다. 막연하게 뭉뚱그릴 게 아니라 40대 노동자, 40대 여성 등으로 디테일하게 접근해야 한다.
정의당 지도부는 노회찬의 장례를 마친 뒤 정당 득표율이 의석수에 온전히 반영되는 선거제도 개혁에 힘을 쏟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세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은 언제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선거제도 개혁보다 당의 체질 개선이 먼저라고 앞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각 지역에서 정의당의 가치와 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을 육성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이를 위해 돈과 인력을 지원하는 노력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작 비례대표 달라 할 순 없다
정의당과 진보 정치의 돌파구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임한솔 단기간 내에 선거제도는 안 바뀔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후를 고민해야 한다. 민주당의 의지도 안 보이고, 국민적 요구도 크지 않은 게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설사 선거제도가 개혁되더라도 정의당에 열매가 돌아올지 의문이다. 당장 내후년에 자기 지역구에서 15~20% 이상 득표 가능한 인물들이 정의당에 얼마나 되나. 평창올림픽에서 스켈레톤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은 우리가 썰매 강국이어서가 아니라, 몇 년에 걸쳐 집중 육성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큰 당들의 후보 내는 과정이 쇼트트랙이나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과 같다면, 정의당은 될 만한 재목을 미리 선발해 지원하고 훈련시켜 지역주민들에게 각인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으면 당선권에 들 수 없다.
이기중 정치인 육성은 강좌나 교육으로 되지 않는다.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다보면 정당이 안 보이고 TV에서 자주 보는 당만 있다. 롤모델 삼을 선배는 없고, 지역조직이 취약하다보니 같이 선거를 치를 활동가나 상근자도 없다. 선거제도 문제가 있지만 당내에서 정치인을 어떻게 활용하고 성장시켜나갈 것인지 고민이 부족했다. 우리 당에선 당선될 수 있는 건 비례대표와 기초의원밖에 없다. 결국 당에서 커온 사람들은 비례대표 선거에 매달리게 된다. 외부 명망가도 영입했는데 그 결과가 좋았는지, 득표율에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다.
김희서 다들 비례대표에 집중하는 것은 지금 당장은 쉬워 보이지만 진보 정치를 가두는 효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회찬·심상정은 개인의 능력으로 비례대표 뒤 재선에 성공했지만… 진보 정치가 국민에게 요구하는 게 ‘비례대표라도 되게 해주세요’라고 수위가 낮아진 것 같다. 우리가 가치와 비전을 보여줘 대안 세력으로서 지지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내야 하지 않나. 진보정당의 세대교체는 지역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학생운동·노동운동 출신들이 20년 가까이 당을 이끌어왔다. 지역에서 성장하고 떨어지고 훈련받은 사람들이 그다음 세대를 만들고, 지도부가 될 때 변화가 생기고 그게 세대교체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전과 같은 방식은 이제 안 된다.
임한솔 늘 당이 어렵다는 이유로 지역을 소홀히 하는데, 넉넉하고 여유 있을 때 지역에 예산과 인력을 투입하는 건 누가 못하나. 지역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이며, 후순위가 아니라 최우선이다. 그러지 않으면 정의당은 지속 가능한 정당이 되기 어렵다.
서울 25개구에 정의당 의원 1명씩만
이들은 ‘진보정치인 세대’가 노회찬·심상정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진보정당 1세대가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당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각 지역에서 사회적 약자와 시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쌓고 성장한 정치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 세대’에서 ‘진보정치인 세대’가 당의 주축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상품을 키워내고 선택을 받아 서울 25개 구 각각에 정의당 의원 1명씩만 배출한다면, 그들이 기존 정당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면 정의당과 진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달라질 것이다.”(김희서 의원) 물론 이는 이들과 당이 앞으로 계속 풀어야 할 숙제다.
일단 국민은 노회찬이 떠난 정의당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8월3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 결과(7월31일~8월2일 1003명 대상·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를 보면 정의당의 정당 지지율은 15%로, 일주일 전보다 4%포인트 올랐다. 11%의 자유한국당을 제치고 민주당(41%)에 이어 지지율 2위에 올랐다.
글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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