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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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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갈등 세력으로 회귀하는 한국 보수

합리적 보수의 길 걷겠다던 바른정당 12명 집단 탈당…

보수 주도권은 여전히 수구 냉전 세력 손에
등록 2017-05-10 13:59 수정 2020-05-03 04:28
바른정당 홍문표 의원(마이크 앞) 등 13명의 의원이 5월2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른정당 탈당과 자유한국당 입당을 선언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바른정당 홍문표 의원(마이크 앞) 등 13명의 의원이 5월2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른정당 탈당과 자유한국당 입당을 선언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의 수구적 행태를 비판하며 탈당한 뒤 ‘합리적 보수’라 스스로를 부르며 바른정당을 창당했던 의원 13명이 5월2일 다시 한번 탈당 기자회견에 나섰다. 이들은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자신들이 만든 바른정당을 떠나 “다시 자유한국당에 입당하겠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황영철 의원은 지역구로부터 거센 비난이 쏟아지자, 발표 다음날 탈당을 번복하고 바른정당에 남기로 했다. ‘명분 없는 탈당’이란 거센 정치적 비판에 직면한, 나머지 12명의 의원들은 자유한국당 안에서도 친박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당분간 갈 곳 없는 신세가 됐다.

촛불이 불러온 보수의 분화

지난 1월 창당한 바른정당은 오랜 시간 한국 정치에서 공고하게 유지돼왔던 보수 정치 세력이 본격적인 분화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는 한국 정치의 발전이란 측면에서도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불러온 대규모 촛불시위를 통해 수구·냉전 보수가 의미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지위를 잃고, 합리적 보수가 그 자리를 대체할 기회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진보와 보수가 합리적 대화로 ‘합의 민주주의’를 실현해볼 수 있다는 희망적인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또 그동안 양대 정당 체제를 유지해온 한국 정당 체제가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바른정당·자유한국당·정의당 등 5개 원내 정당으로 분화되면서, 한국 정치가 좀더 다원화될 수 있을 것이란 분석도 이뤄졌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12월21일 정치발전소 특강에서 이같은 한국 정치의 ‘기회적 상황’에 대한 분석을 남겼다. “촛불시위는 한국의 정당 체제를 양극화해왔던 민주 대 반민주 구도를 해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역사적 전환이라고 할 만큼 크다. 보수가 극우적 분파와 온건 합리적 보수로 분열됨과 아울러 이른바 ‘친박계 보수’를 주변으로 밀어내는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좌-우 간, 또는 진보-보수 간 거리는 무척 가까워졌고 나아가 대연정까지 가능할 수 있는 정치적 기초를 만들었다. 한국의 정당 체제는 촛불시위를 통해 온건다당제로의 변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게이트와 촛불시위는 보수 정치세력의 분화뿐 아니라 보수 지지층의 분화도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과거엔 합리적 보수를 지지하는 이들도 새누리당 안에 머무를 수 있었다. 새누리당 안에도 합리적 보수 정치인이 존재해왔고, 새누리당도 위기에 처할 때마다 끊임없이 개혁적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을 끌어안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게이트를 거치면서 합리적 보수 지지층은 기존 세력과 공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제 보수 지지층을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보는 견해는 드물다. 정한울 여시재 솔루션 디자이너는 칼럼에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거치면서 보수층이 이질적 집단으로 분화했다. 즉 TK(대구·경북), 60대 이상을 중심으로 친박 성향이 강한 ‘일관된 보수층’과 PK(부산·경남), 비영남, 40∼50대 보수층을 중심으로 대통령 탄핵에 동조하며 새누리당 지지를 철회한 소위 ‘스윙 보수층’으로 분화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번 탈당 사태로 인해 보수 정치세력의 주도권은 여전히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극우 혹은 수구가 쥐고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 합리적 보수 지지층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로 일부 쏠렸던 이들의 표심은 선거가 가까워오면서 다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쪽으로 옮겨갔다. 바른정당의 창당 취지로 보면 이들이 합리적 보수층의 지지를 흡수했어야 한다. 그러나 바른정당은 창당부터 지금까지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합리적 보수는 여전히 붕 떠 있는 상태다. 바른정당의 약체화로 ‘스윙 보수층’이 갈 곳이 사라진 것이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이들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딜레마에 빠질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바른정당이 합리적 보수 정치세력으로서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우선 바른정당은 정당으로서 허약하다. 정당의 기반을 제대로 닦기도 전에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당내 갈등을 봉합하지 못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가진 질 높은 콘텐츠에 비해 지지율이 낮게 나오는 가장 큰 이유다.

“바른정당, 정당으로서 기능 못해”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5월2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에서 열린 마지막 TV토론회에서 발언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유승민 바른정당 대선 후보가 5월2일 저녁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에서 열린 마지막 TV토론회에서 발언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기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분석이다. “유승민 후보의 부진은 정당이 없는 선거를 하기 때문이다. 선거에는 여러 마케팅적 요소가 있지만, 정당이 가장 중요하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지지율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그가 토론을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정의당이란 정당 안에 탄탄한 지역 기반을 중심으로 헌신적으로 일해온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당은 눈에 크게 띄지는 않지만 사회적 의제를 구조화하는 힘을 갖고 있다. 바른정당은 정당으로서 이런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바른정당 없이 유 후보 혼자 선거를 했다. 그게 치명적이었다.”

유승민 후보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박상훈 학교장은 “유 후보에 걸었던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다. 김무성계 의원들의 탈당 움직임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주적’ 논란에서 보듯 그가 가진 경직된 안보관이다. 박 학교장은 “선거 과정에서 지나치게 냉전적 사고방식을 보여준 것도 실망스럽다. 합리적 보수라기보다 냉전·수구적 이념 위에서 말만 합리적으로 하는 것처럼 비쳤다”고 덧붙였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도 “유 후보는 주어가 항상 ‘나’다. 유 후보가 똑똑한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이 점이 그가 과연 정당을 이끌 만한 사람인가 하는 면에선 마이너스로 작용한다”고 평가했다.

합리적 보수가 탄탄한 정치세력으로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선거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 12명의 바른정당 의원이 탈당한 것도 ‘대의’보다는 다음 총선을 위한 ‘생존 전략’인 측면이 크다.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를 채택하는 한국에선 지역구에서 1등을 해야 당선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소선거구제는 유권자의 사표 방지 심리를 자극해 당선 가능성이 높은 거대 정당 후보에게 표가 몰리게 만든다.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대학교 정치경영연구소장은 “다음 선거에서 1등으로 당선되려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자기 사람을 당선시키는 등 자기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바른정당 상황으로 봤을 때 자기 지역구에서 확실하게 당선될 사람은 몇 안 된다. 의원들 스스로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탈당을 한 것이다.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가 도입된다면 소수 정당이 좀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선 이후 한국 보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현재 둘로 쪼개진 보수가 다시 예전과 같은 ‘수구 보수’로 통합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보수가 과거 수구적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대선 이후에도 수구 기득권 세력이 그대로 온존하는 정당 체제를 맞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다시 ‘민주 대 반민주’라는 극단적 정쟁을 일으키는 정치 구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재인 후보가 당선될 경우 다시 뭉친 보수 세력이 생존을 위해 더욱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이미 홍준표 후보가 대선 과정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단적 갈등 빚는 단일 보수로 회귀

최 교수는 “역사에는 반동이 있는데 전형적인 수구 반동적인 모습을 보일 것이다. 태극기집회가 전형적인 수구 반동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가 완전하게 냉전적 구도로 돌아갈 것이다. (새로 부활한 수구 보수는) 극단적 갈등을 표출하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는 전략으로 나갈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윤태곤 실장도 “보수 입장에서 가장 쉬운 방법은 ‘저쪽 좌파, 우리 우파’라고 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게 가장 편한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중도보수 가운데 일부를 끌어안은 국민의당이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해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지지 기반인 호남을 지역구로 둔 국민의당 의원들과 중도보수의 지지를 받는 안철수 후보 사이엔 미묘한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가 앞으로 끊임없이 당의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 훨씬 못 미치는 득표율을 기록하면, 당의 장기적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정당 체제는 현재의 다원화된 구조에서 다시 양극단의 구조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바른정당, 계속해서 가야”

황영철 의원의 잔류 선언으로 겨우 원내 교섭단체(의원 20명)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바른정당은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롭다. 유승민 후보는 5월2일 열린 마지막 TV토론 마무리 발언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제가 지난겨울에 바른정당을 창당한 것은 따뜻한 공동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개혁보수의 역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에 남아서 개혁하고 싶었지만, 대통령 탄핵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보수가 해왔던 그 방식으로는 보수는 소멸된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따뜻하고, 정의로운 보수 해보고 싶었습니다. ‘저런 보수가 있구나’ ‘저런 보수면 우리가 지지할 수 있겠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보수 정치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쉽지 않은 것 처음부터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른정당 국회의원 13분이 당을 떠났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외롭지만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유한국당, 선거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낡은 보수, 썩은 보수, 부패한 보수는 궤멸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따뜻하고 정의로운 개혁보수가 나타나야 합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을 생각합니다.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았다.’ 많은 국민들께서 지켜보고 계시고, 손을 잡아주시면 저는 개혁보수의 길을 가보고 싶습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유 후보의 애끓는 호소에도 결국 바른정당이 소멸 수순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그럼에도 한국 민주주의의 성장을 위해서는 합리적 보수가 꼭 필요하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박상훈 학교장의 조언이다.

“바른정당이 이대로 흩어진다면 합리적 보수라고 하기도 어렵다. 당연히 계속해서 가야 한다. 의석수가 몇이든 자기 갈 길을 뚜벅뚜벅 가야 한다. 처음부터 꽃길을 걸으면서 합리적 보수를 한다는 것이었다면 그것부터가 망상이다. 힘든 과정이지만 굴하지 않고 가겠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유승민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큰 좌절을 맛봤다. 그러나 “합리적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선언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한 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말고 자기 길을 꾸준히 가야 한다. 정치라는 것은 꾸준히 해서 길을 내는 것이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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