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공동대표의 사퇴를 기점으로 국민의당 지지율 하락세는 멈췄다. 수도권에서만 27% 넘는 정당득표율을 보이며 제2당(제20대 총선 정당득표 기준)의 위용을 뽐냈던 국민의당은 지난 6월 내내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건에 휘청이면서 10%대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웠다.
국민의당의 오늘을 있게 한 호남 민심은 말할 것도 없다. 지지율 40%에 육박하며 광주·전남·전북 의석 28석 가운데 26석을 휩쓸었던 기세는 단 3주 만에 “이대로 가다가는 당 존립 기반이 붕괴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휘청거렸다.
예상치 못한 극적인 사퇴
그래서 더 극적인 사퇴였다. 안 대표가 사퇴한 6월29일 오전, 최고위원회 현장에 있던 취재진 100여 명 가운데 안 대표의 사퇴를 예상하는 눈 밝은 이는 찾기 힘들었다. 왕주현 사무부총장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당 사무총장 출신인 박선숙 의원과 김수민 비례대표 의원이 검찰 수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유성엽 의원 등 일부 호남 의원들이 지도부 책임을 거론했지만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당시 최고위는 비공개로 계속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고위 사무실 문이 열리며 박주현 최고위원(비례대표 의원)이 다급하게 “당헌 좀 가져다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됐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안 대표는 상기된 얼굴로 사퇴의 변을 읽어 내려갔다.
국민의당은 현재 기본적인 정당의 토대도 갖추지 못한 상태다. 대표의 궐위에도 당장 전당대회를 열지 못한다. 대의원이 없기 때문이다. 안 전 대표가 대표 자리를 던진 날을 기준으로 보면, 전국 253개 지역구 가운데 지역위원회가 설치돼 위원장이 선임된 지역은 156곳에 불과했다. 당원을 모집할 수 있는 체계도 없다. 당원 관리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를 치를 최소한의 조직만 갖춘 채 총선을 치렀고,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던 시점이었다.
당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국민의당’이라 쓰고 ‘안철수당’이라고 읽는 상황이었다. 핵심 당직자부터 실무진까지 모두 안 전 대표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제3당이라는 열망의 근간이 안철수 개인의 확장성에 일정 부분 기반했다는 점에서 ‘안철수’가 이끌지 않는 ‘안철수당’은 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책임을 졌고,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건으로 당과 안 전 대표를 흔드는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아니, 언제 있었느냐는 듯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당내 혼란 수습하기보다 봉합 택해애초에는 총선 홍보비 리베이트 의혹 사건 뒤에 거대한 비리가 도사린 듯했다. 제대로 검증받지 않은 김수민 의원을 비례대표 선정 당일 새벽에 추천하고 전격적으로 비례대표 7번으로 선정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이 직접 김 의원의 회사인 브랜드호텔에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선거홍보물 인쇄업체, 텔레비전 광고대행 업체를 통해 돈을 건넨 것에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검찰 수사로 드러난 현재까지 상황은 딱 거기까지다. 검찰 출신인 이용주 국민의당 법률위원장은 “브랜드호텔이 당의 이미지를 만들고, 텔레비전 홍보를 기획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수민 의원이 몸담았던 브랜드호텔에 갔어야 할 자금을 당이 아니라 업체를 통해서 지급했다는 사실 말고 드러난 것이 무엇이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위원장은 “지금 검찰 수사로 드러난 것은 진상조사단이 발표한 내용대로다. 당은 할 만큼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속된 왕주현 사무부총장의 경우, 실무자의 미숙함은 있었지만 지급할 비용을 처리한 것일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루자들이 핵심 당직자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건 자체는 당대표가 책임져야 할 만큼 비리로 얼룩진 대형 게이트는 아니라는 주장은 당 내부에서 여전히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안 전 대표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대표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안 전 대표 쪽 설명을 들어보면, 이번 사건에서 안 전 대표를 움직이게 한 것은 사건에 대한 책임만이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확인된 당 내부의 갈등과 반목이 더 크다는 설명이 더해진다.
당 사정을 잘 아는 핵심 관계자는 “누군가의 제보 없이 도저히 알려질 수 없는 내밀한 내용을 선관위가 확보했다. 업체 선정 과정이나 자금 흐름까지 통째로 선관위가 알고 있었다는 것은 당내 세력 중 누군가가 관련 사실을 알린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이 또한 안 전 대표가 모를 리 없다. 결국 이번 사건을 수습하고 당을 정비한 뒤 대권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단박에 당내 혼란을 봉합해 대선 준비에 돌입하느냐의 분기점에 섰던 것이다.
결정은 예상보다 빨랐다. 이유는 외부 요인에 있었다. ‘문재인’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8월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대선 준비에 들어간다. 선거의 명수 새누리당이 전열을 가다듬어 대선 주자를 내세우기 위한 이벤트를 만들어가는 것도 예상 가능하다. 당 내부에선 검찰에 이대로 끌려가다가는 내년 대선은 어렵다는 분위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결국 책임을 진 것은 외양일 뿐 안 전 대표는 내년 대권을 향한 승부수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비대위 안철수계 절반 이상안 전 대표는 물러났지만, 물러난 게 아니다. 비상대책위원 12명 가운데 안철수계라 할 수 있는 수는 반을 넘는다. “이번 기회에 ‘안철수당’이라는 색깔을 지우고 체질 개선을 해보자”는 일부 호남 의원들의 목소리도 잦아들고 있다.
게다가 안 전 대표는 본인이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주장한 국회 내 일자리특별위원회에 직접 참가했다.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안 대표가 다가올 지역위원회 구성 및 당원 모집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안 전 대표는 대표 사퇴 8일 만인 지난 7월7일 인천의 한 호텔에서 열린 외부 강연에서 “결산국회를 열지 않으려는 새누리당·더불어민주당은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고 공세를 가했다. 원내 제3당의 주인은 여전히 자신이라는 사실을 재차 각인시키려는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번 사태의 초기, 안 대표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흔드는 모습을 두고 ‘선위파동’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선위파동은 조선시대 정치적 기반이 불안했던 선조가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거듭하면서, 자신의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반대세력의 준동을 막는 데 쓴 정치적 기술이었다. 안 대표 역시 사퇴 카드를 직접 흔들어 호남 의원을 비롯한 당내 이견 그룹을 진압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안 전 대표가 던진 승부수의 결과를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우선 내부 갈등이 끝난 것이 아니다. 7월7일 비대위원 구성 뒤 처음 열린 회의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언급한 “사당(안철수당)화”는 내분의 여진이 상당히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안철수 쪽 사람들이 당을 장악한 뒤 벌어진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당이 다시 자리잡는 국면에선 호남의 지분을 요구하겠다는 뜻이다. 새로운 당직 임명부터 지역위원장 인선까지 지난한 내부 투쟁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안 전 대표가 물러난 상황에서 호남 의원들의 첫 과녁은 박지원 비대위원장이 될 공산이 크다. 원내대표를 겸하는 박 위원장은 겸직 분리 요구에 “알아서 한다”는 말로 일축한 바 있다. 호남 쪽 의원들은 당권을 목표로 하는 박 위원장이 권한을 과도하게 늘린 데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조기 전당대회 개최와 ‘비대위 권한·원내 권력 분리’ 주장이 동시에 터져나온다. 최근 박 위원장을 제외한 호남 의원들의 모임이 잦아진 것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안 전 대표 쪽 움직임도 포착된다. 한때 안 대표의 복심으로 불린 이태규 의원(전 전략홍보본부장)은 최근 와 만나 “찬 바람이 불면 정권 교체를 위한 고민을 갖고 움직여볼 생각이다. 통치 구조를 바꾸는 방식의 개헌보다는 안 대표가 강조한 격차 해소, 일자리 창출 등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개헌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들고 가겠다”고 말했다. 2012년 안철수 진심캠프 구성원들은 2016년 다시 모여 당 안팎에서 대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선숙·김수민 의원 구속영장 청구7월8일 검찰은 박선숙 의원과 김수민 의원에 대해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서울서부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김도균)는 박 의원에 대해 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 형법상 사기, 범죄수익은닉 혐의를, 김 의원에 대해서는 공직선거법·정치자금법 위반, 범죄수익은닉 혐의를 적용했다. 현역 의원에 대한 영장 청구는 제20대 국회에서 처음이다. 바람 잘 날 없는 국민의당, 안 전 대표가 미리 던진 승부수. 대권을 향한 승부는 이미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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