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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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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본청 246호실엔 빈 생수병만 뒹굴었다

유승민이 사퇴한 7월8일 국회의 몇 장면들… 대통령의 왕따 작전 성실히 수행한 김무성과 사약을 받은 유승민이 느낀 갈증의 정체는 무엇일까
등록 2015-07-14 14:52 수정 2020-05-03 04:28

기자들은 새누리당 의원총회가 열린 국회 본청 246호실 문턱까지 다가가지 못했다. 회의장 입구에서 좌우로 약 28걸음씩 밀려났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당의 작은 파열음 하나라도 기자들의 귀에 포착되지 않게 하려는 공간적 분리였다.
“음…, 주먹을 쥐었네.”
회의장으로 걸어가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모습을 멀찌감치 떨어져 찍던 한 사진기자가 짧게 말했다. 주먹을 쥔 순간이 김 대표의 결연함이 무의식중에 드러난 ‘찰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김 대표가 의총을 시작하며 의원들에게 말한 내용이라고 당이 나중에 공개한 발언에서 그의 어떤 의지를 미뤄 짐작할 뿐이다.
“당대표로서 결단을 내릴 시점이다. 지금처럼 갈등과 혼란이 계속되면 (내년) 총선에서 패하고 우리 모두 공멸한다. 새누리당의 미래와 박근혜 정권의 성공을 위한 방안으로,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권고하기로 했고 의총에서 동의를 구하고자 한다.”

애초부터 의총은 형식적 절차일 뿐

유승민 의원이 지난 7월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국회 정론관에서 나오고 있다. 그는 자진 사퇴를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법과 원칙, 정의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유승민 의원이 지난 7월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을 한 뒤 국회 정론관에서 나오고 있다. 그는 자진 사퇴를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법과 원칙, 정의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유승민 사퇴’를 통해 논란을 종식시키겠다는 김 대표의 의중이 실린 발언이다. 애초부터 의총은 사퇴가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려는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날 회의장에 들어서던 몇몇 의원들의 표정에서도 의총은 ‘유승민 사퇴’로 향하는 형식적 절차라는 성격이 드러난다.

기자들이 빽빽이 몰려 있는 곳으로 당 최고위원인 김태호 의원이 걸어왔다. 발걸음이 경쾌했고, 입가엔 웃음이 감돌았다. 그는 의총에 들어가면서 “먹구름이 지나가면 맑은 하늘이 보일 겁니다”라고 말했다. 잠시 뒤, 기자들을 향해 “굿모닝, 굿모닝”이란 인사말이 들렸다. 당 최고위원인 이인제 의원이었다. 언론 카메라가 대거 쏠린 긴장감과는 다소 이질적인 여유가 묻어났다. 두 사람(김태호·이인제)은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란 말로 정치권과 여당 원내 사령탑에 역정을 낸 뒤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주장해온 이들이다. 그들은 의총을 자신들의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최종 추인받는 자리라고 보았을 것이다.

예정됐던 ‘오전 9시 의총’ 시간을 14분 넘겨 도착한 김태흠 의원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토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녹음하기 위해 김 의원의 입에 갖다댄 기자들의 휴대전화 속으로 그의 말이 담기기 시작했다. “이런 사태를 만들고도 (유 원내대표가) 사퇴 이유를 모르겠다는 자체가 사퇴할 이유입니다.”

이 짧은 문장에 ‘사퇴’란 말이 세 번이나 들어간 이 발언은 친박계의 득의양양한 ‘승자 세리머니’처럼 비쳤다. 그가 말한 ‘이런 사태’란 당·청 갈등쯤을 뜻할 텐데, 청와대 정무특보인 김재원 의원은 의총 다음날 ‘친박’이 생각하는 그 ‘사태의 실체’를 좀더 풀어서 설명했다. “청와대는 소통을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원내 지도부(유승민)가 청와대를 고립시키고 그럼으로써 일을 잘 못하게 하지 않았나.”

친박이 이런 논리로 유승민 사퇴를 관철하는 과정에서 김태흠·이장우 등 충청권 의원들이 ‘친박 행동대’란 시선을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것을 두고 정치권에선 여러 말이 무성했다. ‘박근혜 정권 성공을 위한 충정’이란 주장에서부터, 박 대통령의 영향력을 등에 업고 차기 공천에 대한 불안을 씻으려는 행동이란 해석, ‘성완종 리스트’로 불구속 기소된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명예 회복을 위해 ‘친(親)이완구 인사’들이 친박에 힘을 보탠 것이란 추측 등이 나돌았다.

‘사퇴 권고’ 전달한 김무성의 행보

지난 7월8일, 3시간35분간 33명이 발언했다는 새누리당 의총이 끝나자 의원들이 밀려나왔다. 결과를 묻는 기자들에게 한 여성 의원이 웃는 얼굴로 차에 올라타며 “사퇴 불가피, 사퇴 권고”라고 의총 결론을 요약했다. 그의 얼굴 위로 쏟아진 정오의 햇살 때문인지, 박 대통령의 ‘6월25일 격노 발언’ 이후 정국을 흔든 사안의 무게감과 대비되는 밝은 표정 때문인지 그의 웃음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이날 가장 인상적으로 기록될 장면은 의총 이후 김무성 대표의 모습이다. 그는 국회 본청에서 나와 자신의 차를 타지 않고 몇몇 의원을 대동한 채 본청 앞 38개의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국기게양대를 거쳐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회에 심은 소나무 옆을 지난 그는 이윽고 의원회관까지 다소 돌아가는 아스팔트 길에서 벗어나 국회 잔디밭으로 방향을 튼 뒤 대각선으로 곧장 가로질러 회관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옛날 구중궁궐에서 관직을 내놓으라는 명(命)을 들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누군가의 방으로 향하던 어떤 무리의 비장한 행렬처럼 보였다.

김 대표가 ‘사퇴 권고’를 들고 다다른 곳은 아침부터 회관에서 기다리던 유승민 원내대표의 916호 사무실이었다. 한 언론은 이를 왕(대통령)이 내린 사약을 전달하는 장면에 빗대기도 했다.

심리학자 김태형씨는 배신이란 이름으로 원내 사령탑을 제거한 박 대통령의 이런 심리를 조선시대 임금 연산군이 보인 심리적 방어와의 유사점에서 찾는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당시 보수 세력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연산군이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불안 탓에 측근 신하의 말에만 의존하면서 왕권에 비판적인 사람을 가만두지 못했다고, 그는 보고 있다.

“이런 지도자 곁엔 소신 있는 사람이 붙어 있기 어렵다”고 김태형씨는 말했다. 박 대통령이 부모를 잃는 비극을 겪은 뒤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마음”이 강해졌을 것으로 그는 추정한다. “이런 심리를 가진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배신이며,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을 위험한 상태로 인식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13일간 저항하던 유 원내대표는 결국 자신의 방에서 ‘의총에서 모인 뜻’이라고 포장된 사퇴 권고의 명을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는 내용이 담긴 사퇴회견문은 의총 전날부터 유 원내대표가 구상하고 다듬었다고 그의 측근이 전했다. 그는 “고통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고 다짐한 지난 4월 국회 연설 때 맸던 분홍색 넥타이를 다시 매고 사퇴 기자회견장에 나왔다. 취임 157일 만의 사퇴다.

분홍 넥타이 그리고 157일 만의 사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7월8일 유승민 의원에게 사퇴를 권고한 의총 결과를 전한 뒤 유 의원의 의원실인 916호 방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7월8일 유승민 의원에게 사퇴를 권고한 의총 결과를 전한 뒤 유 의원의 의원실인 916호 방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결국 갈아치운 사퇴 파동을 두고 정당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훼손이라는 정치학자들의 평가가 잇따랐다. 이번 사안이 국가가 보여준 ‘따돌림 행태’의 위험한 사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학교에서 힘이 센 친구가 주도하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달려들어 다른 친구를 고립시키는 문제를 지적하던 우리 사회가 오히려 국가 차원에서 이 행태를 공개적으로 확대해 보여준 꼴이 됐다는 것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누군가를 찍어내는 게 통하지 않으면 우습게 되지만 그게 통하면 더 큰 힘이 생긴다. 권력이 작동하는 전형적 방식이다. 하지만 권력의 힘이 (절차 등을 무시하고) 모든 곳에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대통령이 권력을 과신하다보니 상식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김 대표가 유 원내대표에게 사퇴를 권하려고 916호로 향하던 이날의 모습은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 김무성’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일단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당내 입지는 더 좋아질 수도 있다”고 했다. 어쨌든 당의 내분을 정리한 모양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경기도가 지역구인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이런 설명을 보탰다.

“유승민 사태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은 두 가지 유혹이 있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으니 청와대와 엇박자를 내지 말고 단일대오를 만들어야 한다는 첫 번째 유혹. 개혁적 이미지로 우리 당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두 번째 유혹. 그중 의원들이 첫 번째를 택했고, 김 대표가 갈등의 봉합이란 대전제를 마무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철희 소장은 “김 대표가 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잘 아니까 대통령에 맞설 경우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결정으로 김 대표가 결국 소탐대실(작은 걸 얻으려다 큰 걸 잃었다)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청와대와 당의 수평적 관계를 주장했던 김 대표가 “당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권 후보는 본선 경쟁력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기존 보수 지지자 외에 ‘플러스알파’(중도층)를 확보해야 하는데 개혁보수를 지향한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이끌면서 본선 경쟁력을 까먹은 측면이 있다”고 이 소장은 평가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이번 파동으로) 개혁적 이미지는 유승민 원내대표가 가져갔지만, 김 대표가 보수층 지지자를 가져갔기 때문에 두 사람의 정치적 득실은 비슷하다”고 했다. 이번 사태 이후 높아진 유승민 의원의 위상이 탄탄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김 교수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지 않았다.

“개혁보수의 기치를 목숨 걸고 지킬 새누리당 의원의 그룹이 워낙 취약한 상황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계와 “박근혜 대통령을 내세워 먹히겠느냐”는 수도권 중심 비박계의 당내 주도권 경쟁이 예견되지만, 보수의 개혁을 주창하는 일부 비박계의 목소리가 힘을 발휘할지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이철희 소장도 “싸움은 기세인데 친박이 유승민을 물러나게 했으니 그 힘이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 그것이 물리학의 법칙 아닌가”라고 했다.

‘유승민 사태’ 이후 총선·대선 향방은?

유 의원이 원내대표에서 물러난 그날 저녁, 김 대표는 국회 앞 술집에서 당직자들과 모여 술을 돌렸다. 반면 유 의원은 “여의도는 시선이 집중된다”며 경기도 김포 지역 갈빗집에서 자신과 함께 해체될 원내대표단과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이 자리에서 “유승민을 위하여”란 건배사가 등장했고, 유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다 살아남아 만나자”며 술잔을 부딪쳤다. 사퇴를 권고한 이도, 사퇴를 수용한 이도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불안한 정치적 미래 앞에서 심한 갈증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이날 의총이 끝난 직후 국회 본청 246호실에는 새누리당 의원들이 마신 300mℓ짜리 생수병이 의자 밑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결국 청와대의 뜻을 수용하는 결론에 이르며 박수 소리가 나오기도 했던 이곳에서 그들은 어떤 갈증을 느꼈을까? 다음 총선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목마름, 혹은 의회 민주주의가 상처를 입게 됐다는 우려 앞에서 솟구친 어떤 갈증? 의자 바닥에 놓인 생수병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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