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6월25일 국회법 개정안의 재의를 요구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 이유를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위헌성이 있고 행정업무마저 마비시켜 국가의 위기를 자초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새누리당은 이날 오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어 재의 표결에 응하지 않고 19대 국회 임기 종료(2016년 5월)와 함께 자동 폐기하기로 했다. 지난 5월29일 국회법 개정안에 압도적인 찬성표(211명)를 던져놓고도 대통령의 한마디에 헌법기관(국회의원)이 꼬리를 내린 것이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6월26일 “헌법 절차대로 하겠다”며 국회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헌법 제53조 4항을 보면, “(대통령의 법률안) 재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국회는 재의에 붙인다. 재적 의원 과반수(149명)의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다시 의결하면 그 법률안은 법률로서 확정된다”고 돼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의결은 불가능해 보인다. 160석을 보유한 새누리당이 국회법 개정안 재의결을 반대하며 본회의에 불참하면 의사정족수 미달로 본회의를 열 수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선전포고”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국회법 개정안을 되살릴 “현실적인 수단이 없다”. 이번 사건으로 헌법이 보장한 권한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무능한 입법권자(국회)를 재확인한 셈이다.
대통령 한마디에 꼬리 내린 ‘헌법기관’국회의 ‘입법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난 법 조항을 20여 년간 삭제·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행태가 대표적이다. 일부는 헌재가 정한 개정 시한을 넘길 때까지 법 개정을 하지 않아 법의 공백까지 발생하고 있다.
국회 법제실이 지난 5월 내놓은 ‘위헌 결정 미개정 법률 현황’을 보면, 위헌 결정 뒤 국회가 후속 조치를 밟지 않은 법 조항은 17개 법률 32건이다. 유형별로는 위헌이 19건, 헌법 불합치가 13건이다. 26건은 개정안이 제출됐고 이 가운데 6건은 상임위 의결을 거쳐 법사위 심사를 받고 있다. 하지만 6건은 감감무소식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조항들이다. 헌법 불합치는 해당 조항이 위헌이지만 단순위헌 결정이 내려질 경우 발생할 법적 공백을 막기 위해 헌재가 국회가 법을 개정할 때까지 효력을 유지시키는 ‘변형 결정’이다. 따라서 국회는 헌재가 정한 ‘입법 기한’에 맞춰 위헌 법률을 삭제·개정해야 한다.
하지만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봉쇄하고 참가자를 처벌하는 근거가 됐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제10조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은 헌재가 2009년 9월 헌법 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2010년 6월30일로 개정 시한을 못박았지만, 국회는 아직 개정 법률을 마련하지 않았다.
당시 헌재는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뒤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금지한 집시법 제10조가 “집회의 사전 허가를 금지한 헌법에 위배되고 집회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과도한 제한”이라고 판단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이강국 소장과 이공현·조대현·김종대·송두환 재판관 등 5명이 즉시 법 조항의 효력을 없애는 위헌 의견을 냈지만 위헌 결정 정족수인 6명에 못 미쳤다. 결국 민형기·목영준 재판관이 ‘입법권자인 국회의 재량을 인정한다’며 낸 헌법 불합치 의견을 합산해 최종 결정이 이뤄졌다.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은 법원의 ‘혼란’을 낳았다. 국회가 관련 법을 개정할 때까지 선고를 미뤄야 한다는 의견과 현행법대로 유죄판결을 하는 게 적절하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헌재가 떠넘긴 ‘과제’는 서울중앙지법 단독 판사들이 창조적으로 해결했다.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이 형식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이미 위헌 판정을 받았다며 무죄판결을 잇따라 내린 것이다. “행정법규로서는 2010년 7월1일부터 위헌으로 확정돼 법률로서의 효력을 상실하고 유죄의 확정판결도 전면적으로 재심이 허용된다”는 이유에서다. 유죄판결을 하더라도 개정 시한인 2010년 7월1일 이후에는 재심을 통해 이 판결을 무죄판결로 번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지금 유죄판결을 내리는 게 오히려 법적 안정성을 흔들 가능성이 있으므로 무죄판결을 내리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왔다.
단독 판사들의 독자적 판단은 옳았다. 개정 시한이 5년 가까이 지났지만 국회는 아직 개정안을 본의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했다. 제10조의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라는 표현을 ‘오전 0시에서 오전 6시까지’로 바꾼 개정안과 제10조 전체를 삭제한 개정안이 지난해 안전행정위원회에 회부됐지만 법안 심사는 제자리걸음이다.
야간 옥외집회 금지, 개정 시한 넘겨입법 시한을 넘긴 또 다른 법 조항은 수사기관이 감청할 수 있는 기간을 무제한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한 통신비밀보호법 제6조의 ‘통신 제한 조치 기간의 연장’이다. 이 조항은 범죄의 소명 자료를 첨부하면 2개월 내로 횟수 제한 없이 감청을 하거나 전자우편을 열람할 수 있다고 돼 있다. 헌재는 2010년 12월 “통신 제한 조치(감청·전자우편 열람)를 연장할 때 횟수나 연장 기간 제한을 두지 않는다면 수사와 전혀 관계없는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 비밀이 침해될 수 있다”며 2011년 12월31일까지 이 조항을 개정하라고 결정했다.
개정 시한이 훌쩍 넘어갔지만 정부와 국회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법무부는 대공 사건, 조직범죄 사건의 경우 장기간의 수사가 불가피하다며 연장 횟수의 제한 없이 기간만 총 1년으로 규정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의원들이 내놓은 개정안은 연장 횟수를 1회나 2회로 제한하거나, 연장 허가제를 아예 없애는 내용들이다. 2013년부터 4개 법안이 법제사법위원회에 상정됐지만 실질적 논의는 없는 상태다.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법 조항이 15년째 현행법으로 살아 있기도 하다. 헌재는 2002년 9월 ‘약사 또는 한의사가 아니면 약국을 개설할 수 없다’는 약사법 제16조(약국의 개설등록)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개정 시한은 명시하지 않았다. 17~18대 국회에서는 법인약국 설립을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처리되지 못했고, 19대에는 개정안이 아예 제출되지 않았다.
위헌 결정이 난 법 조항도 국회는 손질하지 않고 있다. 2008년 외환위기 당시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을 일으켰던 ‘미네르바’ 사건에 적용한 전기통신사업법 제47조 1항(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처벌한다)이 대표적이다. 미네르바 박대성(37)씨는 2008년 7월과 12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환전 업무가 전면 중단된다” “긴급명령 1호로 정부가 7대 금융기관 등에 달러 매수를 금지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검찰은 2009년 1월 전기통신사업법을 적용해 박씨를 구속 기소했다. 법원은 2009년 4월 “글의 내용이 허위라는 인식이나 공익을 해칠 목적이 없었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에 항소했고, 박씨는 해당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2010년 12월 “공익을 해할 목적에서 ‘공익’은 의미가 불명확하고 추상적이어서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검찰이 항소를 취하해 박씨의 무죄가 확정됐다.
인터넷에 허위 사실 유포 새 ‘처벌’ 추진18대 국회에서 6건의 개정안이 발의됐다. 5건은 법 조항을 구체화해 위헌성을 없애려 했고, 나머지 1건은 조항 자체를 삭제하는 내용이었다. 인터넷에서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행위를 형사처벌할 필요가 있느냐를 두고 찬반이 맞선 것이다. 18대 국회 임기 만료 때까지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개정안들은 모두 폐기됐다. 19대에서는 ‘역풍’이 불고 있다. 한선교·한기호 새누리당 의원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정부 정책과 관련해 허위 사실을 유포하면 형사처벌한다는 내용의 정보통신망이용법 개정안까지 내놓았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에도 위헌 조항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도 검찰이 즉시항고를 하면 석방되지 못하는 형사소송제도(형사소송법 제101조 3항)는 2012년 6월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이 제도는 이른바 유신헌법 공포 뒤인 1973년 1월 국회가 아닌 비상국무회의에서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면서 신설됐다. 헌재는 “법원의 판단보다 검사의 불복을 우선시키고, 법원의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사실상 무의미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검사에게 줬다는 점에서 헌법상 영장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밝혔다.
판결 전 구금 일수 삽입을 규정한 법 조항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았다. 형사소송법 제428조는 상소 제기 이후 상소 취하 때까지의 구금 일수 계산법을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의 미결구금은 형기에 넣지 않아 구속 피고인이 형량보다 많은 기간을 복역할 수 있다는 얘기다. 헌재는 “형법상 무죄 추정의 원칙 및 적법 절차의 원칙, 평등 원칙 등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회가 개정할 때까지 이 위헌 조항은 계속 적용된다. 5년4개월 만인 지난 3월에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 원심 판결 선고 후 판결 확정 전 미결구금 일수를 전부 본형에 삽입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국가보안법 위헌 조항 23년째 삭제 안 해가장 오래된 위헌 법률은 국가보안법이다. 위헌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찬양·고무나 불고지의 죄의 구속 기간을 50일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한 조항(제19조)은 23년째, 찬양·고무의 죄를 반복해 저지른 경우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한 조항(제13조)은 13년째 법전에 남아 있다. 사실상 사문화됐지만 갈등이 불붙을까봐 국회 차원에서는 개정안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입법권자인 국회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 법률을 손질할 권한과 의무가 있음은 명백하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1. 대상 조문
2. 헌법재판소 결정 요지
3. 심사 경과
국가보안법
1. 제19조(구속 기간의 연장) ① 지방법원판사는 제3조 내지 제10조의 죄로서 사법경찰관이 수사를 계속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 때에 형법 제202조의 구속 기간의 연장을 1차에 한해 허가할 수 있다.
2. 위헌(1992년 4월14일): 피의자의 신체의 자유, 무죄 추정의 원칙 및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 침해
3. 개정안 미발의
1. 제13조(특수가중) 이 법의 죄를 범하여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형의 집행을 종료하지 아니한 자가 제7조 내지 제9조의 죄를 범한 때에는 그 죄에 대한 법정형의 최고를 사형으로 한다.
2. 위헌(2002년 11월28일): 형벌 체계의 균형과 정당성 상실. 형벌 법규의 명확성 원칙 위반
3. 개정안 미발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 제10조(옥외집회와 시위의 금지 시간) ① 누구든지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에는 옥외집회 또는 시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2. 헌법 불합치(2009년 9월24일): 집회의 자유 침해
3. 국회 안전행정위 상정
형사소송법
1. 제482조(상소 제기 후 판결 전 구금 일수 등의 삽입) ① 상소 제기 후의 판결 선고 전 구금 일수는 다음 경우에는 전부를 본형에 삽입한다. 1. 검사가 상소를 제기한 때 2. 검사가 아닌 자가 상소를 제기한 경우에 원심 판결이 파기된 때
② 상소 제기 기간 중의 판결 확정 전 구금 일수(상소 제기 후의 구금 일수를 제외한다)는 전부 본형에 삽입한다
2. 헌법 불합치(2009년 12월19일): 신체의 자유 침해
3. 국회 법제사법위 상정
1. 제101조(구속의 집행 정지) ① 법원은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 구속의 집행을 정지할 수 있다. ③ 제1항의 결정에 대해 검사는 즉시 항고를 할 수 있다.
2. 위헌(2012년 6월27일): 영장주의와 적법 절차 원칙, 과잉 금지 원칙을 위배
3. 국회 법제사법위 상정
통신비밀보호법
1. 제6조 ⑦ 통신 제한 조치의 기간은 2월을 초과하지 못한다. 다만, 소명 자료를 첨부해 2개월의 범위 안에서 통신 제한 조치 기간의 연장을 청구할 수 있다.
2. 헌법 불합치(2010년 12월28일): 침해의 최소성 원칙 및 법익 균형성 요건을 갖추지 못해
3. 국회 법제사법위 상정
전기통신기본법
1. 제47조(벌칙) ①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해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 위헌(2010년 12월28일):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 위배
3. 국회 법제사법위 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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