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 33만m²·연면적 8만1천m², 지하 1층, 지상 7층.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은 단일 의사당 건물로는 동양 최대 규모다. 밑지름 64m에 무게가 1천t이나 되는 거대한 돔은 24개의 각주가 받치고 있다. 돔 지붕의 의미는 “국민의 의견이 찬반토론을 거쳐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지는 의회민주정치의 본질”이라고 대한민국 국회 누리집에는 적혀 있다. 의사당을 둘러싼 24개의 기둥이 상징하는 것은 “국민의 다양한 의견”이다. 지난해 12월19일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이 나기 전까지 통합진보당 역시 국회를 떠받치는 24개 기둥의 일부였다. 국민이 세운 그 기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의해 뿌리째 뽑혀나간 일은 헌정 사상 전례 없는 충격을 몰고 왔다.
헌재가 내세운 진보당 해산의 주요 근거는 ‘진보적 민주주의’다. 역사와 맥락이 있으나 실체가 모호하다. 해산 결정문에서 헌재가 밝혔듯이 “정당의 목적이란 어떤 정당이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나 지향점 혹은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획 등을 통칭한다”면 RO 회합에서 나온 발언 또는 강령만큼이나 현실의 의회정치에서 진보당이 어떤 정치적 선택과 발언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따져물어야 했던 게 아닐까. 19대 국회 본회의·상임위원회·국정감사 등 속기록을 검토하며 헌재 결정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진보당 의원들이 19대 국회 개원 이후 2년7개월 동안 어떤 의견을 내왔는지 살펴봤다. 내란음모 혐의 수사와 재판으로 정상적인 의정활동을 하지 못한 이석기 전 의원은 제외했다.
공포는 패닉에 가까웠다. “통합진보, 종북-폭력의 그림자, NL계 의원들, 국회 진입하면 무슨 일이…”( 2012년 5월17일치), “‘종북 성향 의원, 상임위 들어가 국가기밀 쥐면 큰일’ 우려”( 2012년 5월18일치). 진보당 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 발 딛기 전부터 언론은 진보당 의원들이 군사기밀을 이용해 곧 ‘적화통일’이라도 수행하려 할 것처럼 들썩였다.
RO 사태 이후 이석기 전 의원 등 진보당 소속 의원들이 국방부에 군 관련 자료를 꾸준히 요청해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부의 공포가 현실이 됐다. “여야, 종북세력으로부터 국회 지킬 방안 찾아라”( 2013년 9월7일치), “통진당 요구 국가기밀, 사전·사후 관리 더 철저히 해야”( 2013년 9월6일치). 군 관계자가 언론 인터뷰에서 “제출한 자료 중에 대외비 자료는 없었다”고 밝혔지만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원내에 입성한 의원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해야 할 일을 수행했다. 청년 비례대표로 당선돼 기획재정위원회에 배정된 김재연 전 의원은 청년 주거·일자리뿐 아니라 세제·대기업 문제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정부에 질의했다. 서울 관악에서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된 이상규 전 의원은 행정안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구성된 국정조사 특위에서 ‘저격수’로 활약했다. 광주 서구을의 오병윤 전 의원은 국토교통위원회에서 4대강 사업 문제를 주로 지적해왔고, 경기도 성남 중원의 김미희 전 의원은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의료 민영화 문제와 관련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국회 회의록에 남겨진 진보당 의원들의 발언을 읽어보면, 언론이 보도해온 것처럼 북한이나 미군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서민경제나 인권 문제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주로 눈에 띈다.
“국회 개원 이후 줄곧 태풍의 눈이었다”“이름도 낯선 셀 수 없는 각종 공제, 법인세 감면, 고금리·고환율 정책으로 이명박 정부는 재벌들의 곳간을 차고 넘치게 해주었습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했던가요? 이 정도면 프렌드가 아니라 패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세상 아래 다른 삶, 함께 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2012년 9월27일 미분양 주택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감면하는 내용을 담은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반대 투표를 호소하며 김재연 전 의원이 발언한 내용이다. 김 전 의원은 “가계부채의 70% 이상이 상위 소득 계층에 집중되어 있고 그중 상당 부분이 주택 관련 부채”라는 점을 지적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어 2013년 1월1일에는 소득세·법인세 개정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연설한다. “세제 개편의 첫자리는 초고소득층에 대한 증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소수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최고세율의 상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200억원을 벌어들이는 기업과 1천억원을 벌어들이는 기업의 세율이 같아서는 되겠습니까?” 과세표준 1천억원 이상 법인에 대한 현행 22%의 세율은 미국 35%, 프랑스 34%, 일본 30% 등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월등히 낮다는 지적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일관된 관심을 반영한다.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당 강령과도 어긋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정부는 그해 11월5일 이같은 강령을 근거로 진보당에 대한 위헌정당 해산심판을 청구한다.
국정감사에서도 진보당 의원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2013년 국감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작성과 경찰의 은폐·축소에 대해 밝혀낸 이상규 전 의원은 2014년엔 정무위원회에 소속돼 세월호 참사를 집중 추궁했다. 이 전 의원은 2014년 산업은행 국감에서 산은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에어떤 가치 평가도 없이 80억원을 대출해준 사실을 확인했다. “은행이 담보를 근거로 대출하려면 대출 전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해 가치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산업은행은 100억원 중 80억원을 대출해줄 때까지 어떤 가격 평가도 하지 않았습니다. 관행에 따른 행태로 얼마나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는지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이어 한국거래소 국감에서는 거래소가 투자하고 있는 라오스 거래소의 사전 타당성 보고서가 캄보디아의 보고서를 베껴쓴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234억원을 라오스에 투자한 거래소는 해마다 10억원 이상의 적자를 내왔다. 약사 출신인 김미희 전 의원은 2013년 보건복지부 국감에서 상급종합병원 및 일반종합병원 수익 현황을 분석한 결과 상급종합병원 총수익이 61조원으로 수익 쏠림 현상이 최근 몇 년간 두드러지고 있음을 지적하는 등 진주의료원 폐업으로 촉발된 공공의료와 영리병원 문제에 집중했다.
정량평가 항목을 기준으로 진보당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톺아보면 성적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19대 국회 2차 연도(2013년 6월~2014년 5월)를 기준으로 시민단체인 법률소비자연맹이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진보당의 본회의 재석률은 새정치민주연합(65.09%), 정의당(64.73%), 새누리당(63.49%)에 견줘 한참 뒤처진 56.7%에 지나지 않는다. 법안 투표율(70.51%)은 새누리당(69.24%)보다는 낫지만 정의당(86.55%), 새정치연합(72.93%)에 못 미친다. 진보당의 한 기존 당직자는 “내란음모 사건 수사에, 의원 자격 심사 청구에, 정당해산 심판까지 국회 개원 이후 줄곧 태풍의 눈이었다. 이와 관련한 의원들의 단식이 있었고 세월호 참사 뒤에도 농성 참여, 등원 거부 등으로 자의 반 타의 반 회의 출석에는 모자란 부분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국회 의정평가 방식은 크게 정성평가와 정량평가(출결, 법안의 발의 건수, 보고 횟수 등)로 나뉜다. 시민단체나 언론이 수행해온 기존 의정평가는 주로 정량평가에 집중해왔는데 최근 몇 년 새 속기록을 분석해 이슈 제기 능력, 개혁성, 전문성 등을 따져묻는 정성평가 방식의 중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경영전략연구원에서 작성한 ‘국회의원 의정활동평가 개선방안’(2008) 보고서를 보면, “그동안의 의정평가는 정량평가에 치우쳐 평가의 본질적인 접근인 정성평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모습을 보였으며, 의정활동의 내용보다는 출결석, 투표 참여율, 법안 제출 건수 등 양적 측면의 평가에 치중하여, 평가를 의식한 대리출석과 대리투표, 부실한 중복 법안의 발의가 나타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고 지적한다.
일부에서는 진보당의 입법활동이 부진했던 점을 부실한 의정활동의 근거로 삼는다. 지난해 12월12일 기준으로 진보당 의원들은 모두 82건의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2만 건에 육박하는 19대 국회의 법안 발의 건수를 고려하면 미미한 숫자다. 그나마 처리된 법안은 훨씬 적다. 2차 연도에 입법 처리된 법안 평균 대표발의 건수는 새정치연합 소속 국회의원의 경우 5.68건,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의 경우 5.08건이다. 진보당은 이에 크게 못 미치는 0.8건이다. 법률소비자연맹은 이같은 수치를 근거로 2차 연도 진보당의 성적을 43.01점으로 매겼다. 이 단체에 따르면 새정치연합의 점수는 73.68점, 새누리당은 68.92점이다.
그러나 대표발의한 법안의 내용을 보면, 민생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은 올해 초 통과된 ‘크루즈법’이나 ‘마리나법’ 같은 경기부양 법안보다 직접적이다. 이상규 전 의원은 일당 5억원 노역으로 공분을 자아낸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사건의 재연을 막는 ‘재벌 봐주기 노역장 유치 5억원 일당 금지법’(일명 허재호법), 사용자가 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판정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내더라도 판결 확정 전에 법원이 복직을 강제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은 일명 ‘최병승법’, 차명계좌를 금지하는 내용의 전자금융거래법·금융사기방지특별법 개정안, ‘쪽지예산 방지법’ 등을 대표발의했다.
국회 내 ‘왕따’김재연 전 의원은 국가재정법 재정 운용의 목적 조항에 ‘형평성’을 추가하는 국가재정법·지방재정법 개정안, 공직자 재산 공개시에 비상장회사의 주식가치를 액면가치가 아닌 실제 가치로 반영하는 내용의 공직자윤리법 개정안, 법인세와 증여세·종합부동산세를 올리는 부자증세 법안, 종교인 과세를 명문화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개정안 등을 대표발의했다. 오병윤 전 의원은 대형마트를 신축할 때 변경 등록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전·월세 임차인이 최대 6년까지 계약 갱신을 요구할 수 있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을 내놨다.
진보당의 부실한 정량평가 점수는 비교섭단체인데다 국회 내 ‘왕따’가 된 처지를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20명 이상의 의원을 가진 정당’만이 교섭단체의 자격을 가진다. 현재 국회에선 거대 여야인 새누리당, 새정치연합만 교섭단체로서 권한을 누릴 수 있다. 교섭단체는 대표의원을 통해 본회의 개의 시간 변경, 비공개 결정, 의사일정 변경, 안건 추가 등 의제 설정의 시점과 순서를 결정할 수 있다. 상임위원회에서도 인사청문특별위원회의 설치를 비롯한 쟁점 사안을 다루기 위한 상임위원회나 특별위원회 설치와 개선 등의 권한을 갖는다. 5명의 의원을 낸 정의당과 진보당은 그러므로 이러한 권한에서 전부 배제된다. 2012년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2013 회계연도 예산안 처리를 위한 예산안조정소위를 구성하면서 비교섭단체인 진보당을 배제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국회법상 비교섭단체인 것만이 문제는 아니다. 경선 부정 사태로 출발부터 불안정했던 진보당을 여야는 의회 내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2013년 3월13일 열린 현오석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 검증 청문회의 속기록을 보면, 동료 의원에 대한 여당의 시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당시 청문회에서 김재연 전 의원이 현 후보자를 상대로 5·16, 12·12 등을 거론하며 역사관을 추궁하자 이한성 새누리당 의원이 다음과 같이 되받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현오석 후보자께서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지명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5·16 쿠데타 얘기가 좀 나온 데 대해서 참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연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미사일을 겨누고 아주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일부 종북세력에서는 북한 용어를 써가면서 ‘전쟁 연습’이니 ‘제2의 조선전쟁’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는 마당에 참 국가관이 제대로 박혔는가 하는 생각을 참 금할 수가 없고.” 김 전 의원이 “부적절한 발언”이라며 사과를 요구하지만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하냐. (누구를) 지명하지 않았다”는 이 의원의 실랑이가 오간다. 인사청문회에서 보기 드문 여야의 소모전이다. 의회 내부에서마저 ‘종북정당’으로 낙인찍힌 진보당이 지난 2년7개월여 처해 있던 자리를 보여주는 실례다.
숫자로 집계되지 않는 진보당에 대한 또 다른 평가가 있다. 진보당 해산 결정문에서 소수의견을 낸 김이수 헌재 재판관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주노동당과 이를 승계한 피청구인은 우리 정치에서 복지 확충과 경제민주화의 필요성 등을 역설한 대표적인 진보정당이었다. 이들이 선도적으로 주장한 여러 복지 정책들, 예컨대 국민들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는 공공교육이나 공공급식, 공공의료 등의 정책들은 그간 여당과 제1야당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정 부분 그들에게 수용되기도 하였다. 지난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의 유력 후보들이 모두 경제민주화를 주요한 공약으로 내건 모습 역시 진보정당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수용된 하나의 예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처럼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들이 한국 사회에 제시했던 여러 진보적 정책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하게 만든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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