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만 바보를 만들고 있다.”
“검찰한테 하수구 청소를 맡겼다. 그런데 말끔히 청소될까?”
일부 검찰 관계자들의 하소연은 괜한 푸념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윤회씨 국정 개입 동향 문건’을 ‘찌라시’(소문을 모은 정보지)로 못박은 뒤, 검찰이 처한 딜레마를 표현한 말이다. 문건 내용이 사실일 경우 ‘찌라시’라고 엉뚱한 소리를 한 박 대통령의 심기를 건드린 꼴이 되고, 국정 개입이 허위란 결과를 내놓아도 박 대통령의 심기에 맞춘 수사라는 비아냥이 날아들 것이란 얘기다. 검찰의 고민이 무엇이었든, 이번 수사는 박 대통령이 그어놓은 울타리를 넘지 않은 결과로 정리되고 있다.
검찰 울타리 친 대통령 “넘을 테면 넘어봐”검찰은 비선 실세들의 국정 농단 의혹을 담은 문건 내용은 모두 거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정씨와 박 대통령의 측근 ‘3인방’(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정호성 제1부속비서관·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 ‘십상시 모임’이 시내 음식점에서 열려 국정 개입을 논의했다는 문건 내용은 허위라고 판단했다. 또 정씨가 박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 EG 회장을 미행했다는 내용의 문서도 사실이 아니라는 게 검찰의 결론이다. 박 대통령 측근들의 ‘국정 농단’(십상시 모임을 통한 국정 개입)과 ‘권력 암투’(정씨와 박지만 회장의 갈등)라는 이번 파문의 두 의혹을 검찰이 털어준 모양새가 됐다.
검찰은 청와대가 작성한 ‘정윤회씨 국정 개입 동향 문건’의 외부 유출 경로도 파악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 청와대 파견 근무를 마친 박관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경정)이 청와대 문건을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로 옮겼고, 이 문건을 서울지방경찰청 정보분실 소속 한아무개 경위가 복사하고, 이를 전달받은 최아무개 경위(사망)가 언론사와 대기업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박 경정→한 경위→최 경위→언론사·기업’의 경로로 흘러갔다는 얘기다.
‘박지만 미행설’ 문서도 박 경정이 지난 3월께 작성한 뒤, 이 문서를 박 회장의 측근을 통해 박 회장에게 전달했으나 관련 내용이 허위로 꾸며진 것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해당 문서엔 경기도 남양주시 카페 사장 아들이 ‘할리 데이비슨’이란 오토바이를 타고 박 회장을 미행했다는 내용과 미행 정보 제공자가 누구인지까지 적혀 있지만, 미행자로 지목된 사람과 미행 정보를 제공했다는 경찰관 등을 불러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다만 박 경정이 미행설을 허위로 꾸며 박지만 회장에게 전달한 목적은 아직 뚜렷하지 않다.
검찰은 이런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박 경정이 청와대 문건을 밖으로 빼돌리고(대통령기록물법 위반),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에 숨겼다며(공용서류 은닉)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박 경정은 자신이 문건을 청와대 바깥으로 갖고 나왔음에도, 지난 5~6월께 다른 이들을 유출자로 엉뚱하게 지목한 유출 경위서를 청와대에 전했다는 이유로 무고 혐의까지 받게 됐다. 대통령이 찌라시로 규정한 문건을 복사해 숨진 최 경위에게 전했다는 한 경위에겐 공무상 기밀 누설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고 검찰은 판단했다. 문건을 언론사·대기업 등에 전한 직접적인 유출은 수사 단계에서 목숨을 끊은 최 경위가 떠안게 됐다. 검찰 수사대로라면 정씨와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은 풍문을 모아놓은 ‘찌라시 문건’ 때문에 국정을 농단한 비선 실세로 억울하게 몰린 피해자가 된 셈이다.
미행을 박지만 회장에게 알린 목적은?여기까지가 박지만 회장까지 조사한 검찰이 잠정적으로 내놓은 수사 결과다. 그렇다면 검찰의 하수구 청소가 의혹의 찌꺼기까지 싹 치운 걸까?
눈여겨볼 대목은 검찰은 ‘정씨와 3인방’ 등이 시내 음식점에서 십상시 모임을 가졌다는 문건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판단한 것뿐이란 점이다. ‘십상시’라고 불리는 이들이 특정 음식점에 모인 적이 없을 뿐이란 수사 결과를 가지고 측근·비선의 국정 개입 의혹 전체가 해소됐다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란 뜻이다. 검찰이 정씨와 문고리 3인방 등의 광범위한 행적을 조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한 언론의 여론조사에선 검찰의 수사 결론과 반대로 정씨 관련 문건이 사실일 것이란 응답자의 비율이 50.2%에 달하기도 했다. 이런 의혹의 찌꺼기가 남는 것은 풀리지 않는 의혹들이 여전한 탓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8월 유진룡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따로 불러, 승마 선수 딸을 둔 정윤회씨 쪽까지 포함해 승마계 전반의 문제를 보고한 문체부 국·과장을 거론하면서 “(국·과장들)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며 사실상 좌천 인사를 지시했다는 의혹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의혹은 유 전 장관이 “(해당 내용은) 정확한 정황 이야기”라고 확인까지 해줬다. 박 대통령에게 ‘나쁜 사람’이란 인식을 심어준 ‘누군가’에 대한 의구심이 씻기지 않는 것이다.
1998년 박 대통령이 국회의원이 된 직후부터 청와대까지 동행한 3인방을 둘러싼 ‘문고리 권력’의 위세도 논란거리다.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문건 파문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이 다른 수석실(민정수석)에 파견되는 경찰 인사에까지 적극 개입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유진룡 전 장관도 문체부의 주요 보직에 자기 사람을 심었다는 의혹을 받는 “김종 문체부 2차관과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은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3인방 일원의 영향력이 정부 부처에 깊숙이 미치고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보인다. 3인방은 정씨와 최근까지 연락한 적이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지난 4월 정씨와 이재만 비서관이 통화한 사실이 밝혀지는 등 이들이 접촉한 단면이 드러나기도 했다.
십상시는 없고 7인회는 있다?청와대가 ‘정윤회씨 국정 개입 동향 문건’ 등이 대량 유출된 사실을 지난 5월께 인지했음에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이 당시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은 직무 태만도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청와대는 문건 유출에 대한 조기 대응에 실패해 연말 정국을 시끄럽게 한 책임에 대해선 말을 삼간 채, 이번 검찰 수사 과정에서 조응천 전 비서관 등 7인회가 유출의 배후라는 감찰 결과를 검찰에 전달해 ‘수사 개입’이란 논란까지 낳았다. 하지만 검찰 수사에서 7인회는 실체가 없다는 결론이 나와 청와대의 체면만 구겼다.
애초부터 이번 파문은 검찰 수사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함께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박 대통령이 일부 측근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지금과 같은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기춘 실장, 문고리 3인방 등을 교체하는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여권 일부에서도 나왔다.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청와대 문건 내용의 진위와 유출 경로만 밝힌다고 해서 이 문제가 조용해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청와대는 국민이 공감하는 국정 쇄신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권 내부에선 3인방 등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가 적지 않아 3인방 전체를 교체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예상도 많다. 그럴 경우 비선·측근들의 국정개입설은 풍문 수준을 넘어 ‘박근혜 정부’를 짓누를 정도로 덩치를 키울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만만치 않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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