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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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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과 대통령, 그렇고 그런 사이

대통령이 ‘개헌 블랙홀론’ 들고나오면서 ‘그렇고 그런’ 이슈로 비치게 된 개헌,

국민에게 진정성을 내보여야 개헌 실현할 수 있어
등록 2014-10-14 15:46 수정 2020-05-03 04:27

“장기간 표류하던 국회가 정상화돼 이제 민생법안과 경제 살리기에 주력해야 하는데 개헌 논의 등 다른 곳으로 국가 역량을 분산시킬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시킬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경제 살리기에 우선할 수 없다. 경제회생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국민 안전과 공직사회 혁신 등 국가 대혁신 과제도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font size="3">세월호 특별법에 이어 개헌 ‘가이드라인’</font>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정치권에서 출마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지금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정책의 성과를 통해 새정치연합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려 한다. 큰 전쟁에서 이기려면 (작은) 전투에서 이겨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는 “정치권에서 출마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지금 바로 진행할 수 있는 정책의 성과를 통해 새정치연합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하려 한다. 큰 전쟁에서 이기려면 (작은) 전투에서 이겨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 10월6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개헌 블랙홀론’을 또다시 들고나왔다. 올해 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개헌은 블랙홀처럼 모든 이슈를 빨아들여서 다른 것들을 할 수가 없다”고 한 데 이어 두 번째다. 이 발언은 지난 4월16일 세월호가 뒤집힌 뒤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친 책임이 있는 행정부의 수반이 오히려 ‘경제회생 골든타임’을 운운하는 아이러니를 넘어 의회주의를 위협하는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선 후보 시절 박 대통령 스스로 ‘4년 중임제 개헌’을 공약했던 것과도 여러모로 배치되는 발언이다.

새누리당의 개헌 전도사로 알려진 이재오 의원은 즉각 “개헌은 찬반의 문제이지 시기의 문제라고 본질을 호도하면 안 된다. 개헌은 경제 살리기나 일자리 창출, 국정 수행에 블랙홀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역할을 분담해서 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도 박 대통령의 ‘개헌 블랙홀’ 발언을 강하게 성토했다. 문희상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10월8일 비대위 회의에서 “대통령이 세월호 특별법 가이드라인에 이어 개헌 가이드라인을 내놓은 것으로, 의회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처사다.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개헌은 사실상 물 건너간다는 우려가 나온다. 청와대가 의회민주주의의 블랙홀이 돼서는 안 된다”며 공세를 가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박 대통령의 발언은 오히려 여의도 정치권의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이고 있는 듯하다. 여야 국회의원 152명으로 이뤄진 ‘개헌추진국회의원모임’이 10월1일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지만 언론은 이를 크게 다루지 않았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여당 비주류와 야당 대표까지 나서서 성토하면서 개헌 논의가 본격적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에 개헌추진국회의원모임의 야당 간사를 맡고 있던 우윤근 의원이 10월9일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에 당선되면서 개헌 논의가 더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런 움직임은 겉으로는 개헌을 실행하는 데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함정이 있다. 박 대통령이 개헌에 강하게 반대하고 야당이 이를 비판하는 모양새가 개헌이 ‘또 하나의 정쟁’이라는 ‘그렇고 그런’ 이슈로 비치게 한다는 점이다. 이는 ‘개헌론’의 오랜 딜레마이기도 하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 이래 27년 동안 개헌론은 수없이 등장했지만 그때마다 이슈를 제기하는 진영의 ‘정치적 의도’가 개헌이라는 대의를 희석시켜버리는 역할을 해왔다.

<font size="3">늘 제기했지만 한 번도 의제인 적이 없던 </font>

역사적으로 개헌은 새로운 정치적 기회를 얻으려는 세력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이 합당의 물밑 협상 카드로 오간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3당 합당의 힘으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동안 내각제 개헌을 실현하지 못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김종필 후보 연합도 내각제 개헌을 들고나왔지만 역시 합의는 파기됐고 개헌 이슈도 급하게 사라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고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지만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에 의해 좌절됐다.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의 제안이 ‘차기 대선 구도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정치적 노림수’라고 규정하고 거세게 비판했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행하다.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고 질책하기도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집권 3년차에 던진 개헌 이슈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서 개헌론은 늘 제기되는 이슈였지만 개헌이 의제였던 적은 없었다. ‘개헌론의 정치’는 있었어도 ‘개헌의 정치’는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누가 개헌론을 말하나. 두 유형이 있다. 첫째는 현재의 정치 경쟁 규칙하에서는 대통령 후보를 내기 어려운 세력들, 즉 경쟁의 규칙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 세력이나 다른 방법으로는 이슈 점유 능력이 약한 세력들이다. 두 번째는 현직 대통령이 개헌론을 제기하는 경우다. 민주화 이전 야권 분열을 위한 이원집정제론, 퇴임 뒤 안정된 조건을 갖기 위한 노태우의 내각제 개헌론, 여야 모두로부터 고립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분권형 대통령제와 이후 중임제 개헌론이 있다. 이유는 조금씩 달라도 대부분 정세 전환용 내지 변형된 정계개편론의 일환이다. 그러나 정치를 잘해서 상황을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판을 흔들어 기회를 갖고자 하는 정치는 좋다고 말할 수 없다”고 분석했다.

현재 벌어지는 개헌 이슈도 ‘정치적 의도’를 의심받는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은 그 스스로가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음에도 집권 초기 레임덕을 우려해 ‘개헌 불가’라는 쐐기를 박았다. 새누리당에서 개헌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고 있는 이재오 의원도 나름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새누리당 관계자는 “이재오 의원 같은 중진은 판을 확 바꿔야지 자신이 정치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의 공천제 아래서는 공천을 못 받으면 끝이다. 그러면 판을 바꿔줘야 한다. 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갈 경우 내치를 책임지는 총리가 될 수도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경우에도 박근혜 대통령의 ‘개헌 블랙홀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대통령 흔들기’라는 야당으로서의 정치적 의도성을 내보였다. 현재의 개헌 논의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친박을 한편으로 하는 ‘개헌 불가파’와 새누리당 비주류와 새정치연합을 한편으로 하는 ‘당장 개헌파’의 정치 대결로 변질되고 있다.

<font size="3">국민의 70.3%, 개헌 논의에 공감</font>

그러나 개헌은 정치적 논쟁거리로 삼을 만한 이슈가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는 문제이고 그렇기에 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만 실현될 수 있다. 개헌의 법적 절차로 ‘국민투표’가 포함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개헌을 실현시키려면 정치적 의도를 최대한 배제하고 국민에게 진정성을 내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자면 우선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함께 ‘어떤 방식의 개헌을 할 것인가’도 논의돼야 한다.

현재 개헌 논의의 필요성에는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10월6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1.9%가 ‘올해 안에 개헌 논의를 해야 한다’고 했고, 38.4%는 ‘개헌 논의를 내년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했다. 시기상의 차이는 있지만 국민의 70.3%가 개헌 논의의 필요성에 공감한 것이다. ‘논의할 필요 없다’는 응답은 11.7%에 불과했다. 정치권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CBS가 9월29일~10월2일 여야 국회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전화 설문조사를 한 결과, 설문에 응한 249명 가운데 92.8%인 231명이 개헌에 찬성했다.

그러나 어떤 개헌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제각각이다. 국회의원 조사의 경우 ‘개헌이 필요한 이유’(중복응답 포함)에 대해 127명(47.57%)이 ‘과도한 권력 집중’을 꼽았다. ‘5년 단임 대통령제로는 책임정치나 안정적 국정운영이 어렵다’는 의견은 53명(19.85%)이었다. 두 종류의 대답은 개헌의 필요성을 각자가 전혀 다르게 진단하고 있음을 뜻한다. 원인 진단을 논리적으로 분석해보면, ‘과도한 권력 집중’이 문제라고 지적한 쪽은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과도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쪽으로 개헌의 방향을 끌고 가야 한다. 반대로 5년 단임제의 한계를 지적한 쪽은 4년 중임제를 통해 더욱 강하고 안정적인 대통령을 만드는 방향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흐름과 달리 이들은 개헌 방식에 대해서는 다른 선택을 했다. ‘5년 단임제’를 문제로 삼았던 이는 53명(19.85%)에 불과했지만 개헌 방식에 대한 응답(중복응답 포함)은 ‘4년 중임 대통령제’가 104건(39.2%)이나 됐다. 원인에 대한 진단과 이를 해결하는 방식 사이에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를 선택한 답은 94건(35.4%), ‘의원내각제’는 33건(12.9%)이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불일치 현상은 국회의원들 스스로도 권력 구조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4년 중임제와 분권형 대통령제(또는 의원내각제)의 차이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4년 중임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했던 방식이다. 5년 단임제 아래에서는 대통령의 레임덕이 지나치게 빨리 오기 때문에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기 어렵고 정권이 바뀐 뒤에 정책의 연속성도 끊어지게 된다는 문제점에서 출발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4년 중임제는 사실상 8년의 임기를 보장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4년 중임제를 택한 미국의 경우만 봐도 연임에 실패한 사례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이 권력 구조는 5년 단임제보다도 대통령에게 더 많은 권력을 쥐어주는 효과를 나타낸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책 에서 “4년 중임제 개헌안은 사실상 대통령의 임기 연장을 통해 대통령 권력을 강화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font size="3">원인과 해결 방식의 불일치, 혼재된 중임·총리제</font>

반면 분권형 대통령제의 경우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은 의회에서 선출하는 총리와 그 권력을 나눠가지게 된다. 이는 대통령제 아래에서 대통령이 각료의 구성과 예산 등 너무 많은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는 문제점에서 비롯됐다. 분권형 대통령제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은 대통령이 국가원수의 역할과 동시에 외교·안보·국방 등 ‘외치의 영역’을 맡는 것이다. 총리는 나머지의 모든 내치를 담당한다. 의원내각제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비슷하지만 대통령이 없고 대신 의회가 뽑은 총리나 수상만 존재한다. 이 두 가지 권력 구조에서는 대통령의 독주가 거의 불가능하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 필요성을 주장하는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고 민의 반영에 뛰어난 합의제적 민주체제를 발전시켜가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권력 구조는 서로 정반대의 특징을 가졌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두 방식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혼재된 상태다. 개헌을 주장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여러 가지 원인과 그에 대한 진단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그 이후에 어떤 것이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방식인지에 대한 치열하지만 건설적인 논쟁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으레 그래왔듯이 정치권은 계속 ‘양치기 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송채경화 기자 kh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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