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7·30 재·보궐 선거에서 선거 승패의 주요 가늠자로 여기는 서울 동작을. 지난 7월9일 이곳에 사는 주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 보궐선거에 새누리당 후보로 나경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기동민, 통합진보당 후보로 유선희, 정의당 후보로 노회찬씨가 출마한다면, 누구에게 투표하시겠습니까?” 주민이 누를 수 있는 번호는 다음과 같다. ①새누리당 나경원 ②새정치민주연합 기동민 ③통합진보당 유선희 ④정의당 노회찬 ⑨모름/무응답. 주민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지하는 후보가 선택지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다른 기관에서 걸어온 여론조사에서는 그나마 ‘④기타 후보’가 주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민은 애써 ④번 버튼을 눌렀다.
주민들에겐 “땡볕에서 1인시위 하고 있는 분”언론에 보도되는 동작을 선거판은 나경원·기동민·노회찬 삼파전일 뿐이다. 그래서 후보를 유심히 살피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호 4번 바깥의 후보는 잘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다음 번호에 6년 넘게 동작구에 살며 생활정치를 실천해온 후보가 있다. 기호 5번 노동당 김종철 후보다.
김종철의 명함에는 ‘동작구에는 생활정치인 김종철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타 지역에서 급히 날아든 후보들은 내세울 수 없는 문구다. 동작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후보들의 이름값에 가려진 ‘김종철 생활정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김 후보는 2012년 지하철 9호선 요금인상 반대운동, 2013년부터는 사당동 어린이도서관 추진모임에 참여했다. 올해는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급식 조례’ 제정 추진운동을 벌였다. 방사능 문제가 불거지면서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은 동작구도 비껴갈 수 없었다. 시민단체 ‘성대골사람들’ 김소영 대표가 조례 제정운동에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김종철이 힘을 보탰다. 김 대표는 김종철 후보가 “출퇴근 시간에는 동네에서, 주말에는 성당이나 사찰을 돌며 열심히 서명을 받아왔다”고 떠올렸다. 김종철은 2010년 주민청원으로 제정된 ‘친환경급식조례’ 추진모임에도 참여한 바 있다.
동작구민들이 목격한 김종철 후보는 동네에서 서명운동이나 1인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흑석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정다영(38)씨는 김 후보를 “땡볕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는 분”으로 기억했다. 지난 5월 흑석초 담벼락 너머 공터에 자동차를 탄 채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맥도날드 드라이브 매장이 들어선다고 알려졌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통학로에 차가 들락날락하면 교통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이는 당시 김 후보가 1인 피켓시위에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2009년에는 서울시교육청이 동작을에 있는 두 개의 고등학교 중 하나인 경문고를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반대하는 학부모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도 김종철은 빠지지 않았다. 정씨는 “내 힘으로 직접 바꿀 수는 없더라도 나를 발판으로 힘있는 정당에서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김 후보의 말이 고마웠다고 전했다.
기존 국회의원들의 ‘정치’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어쩌면 ‘김종철의 생활정치’는 지역에 국한된 소소한 사안에 불과해 보일지 모른다. 김종철 후보는 생활정치가 단순한 ‘민원 해결’이 아니라고 일갈했다. 그는 “진보정치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이냐는 가치나 노선이 중요하다”면서도 “주민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건 안 된다. 내가 말하는 가치와 노선이 실현되려면 주민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요구사항을 갖고 있는지도 (현장에서 꾸준히)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노선과 주민들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그의 노력은 동작구 주민들에게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동네에서 에너지 절약 운동을 시작했는데 함께했던 주부들이 ‘탈핵투사’가 된” 일화도 들려줬다. 더불어 자신이 가교 역할을 한다면 주부들과 중앙대 청소노동자가 함께하는 ‘약자들의 연대’가 이뤄질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내게 당을 지우라는 건 그냥 ‘빵 없는 빵’”하지만 주민들의 삶 속에서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김종철의 생활정치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기도 한다. 실제 기자가 동작을 일대를 돌며 만난 주민들 중에는 ‘노동당’이라는 이름과 당명에서 연상되는 편견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는 사람도 있었고, 김종철이라는 사람은 지지하지만 노동당은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사당시장에서 떡볶이가게를 하는 한 아주머니는 김종철 후보에게 “당을 바꿔봐!”라고 조언했다. “열심히 하는 거 아는데 (당선이) 안 되니까 안타까워서” 그렇다고 했다. 김 후보는 한국의 레드콤플렉스를 인정하면서도 “내게 당을 지우고 하라는 것은 ‘앙꼬 없는 찐빵’이 아니라 그냥 ‘빵 없는 빵’”이라며 당적을 바꾸는 것에 딱 잘라 반대했다. 대신 자신의 정치활동을 통해 직접 “(진보정치의 가치를) 몸으로 보여드려야 한다”고 했다.
김종철 후보가 동작구로 이사한 때는 2008년이다. 원래 그의 지역구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용산이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용산구청장 후보, 2006년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 2008년 민주노동당이 분열되면서 만들어진 진보신당으로 옮겨 18대 총선을 시작으로 동작을과 인연을 맺었다. 2.01%, 5.14%. 18·19대 총선에서 그가 동작을에서 받은 성적표다. 누구에겐 초라한 숫자지만 김종철에겐 노력의 결실이자 희망이다. “이 양반 또 나오셨네.” 7월15~16일 저녁 사당동 인근에서 명함을 돌리는 김종철에게 몇몇 주민이 알은체를 했다. 금은방 아저씨는 “그래도 꾸준히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잖아. 계속 지켜볼게”라고 위로와 응원을 겸한 말을 건넸다.
동작을 주민들은 믿었던 의원들이 떠나는 경험을 몇 차례나 겪었다. 뼈를 묻겠다던 정동영이, 서울시장을 하겠다고 나선 정몽준이 그랬다. 이번에 나온 나경원은 당의 전략공천으로 급히 동작을로 주소를 옮긴 탓에 투표권도 없다. 장을 보러 나온 박명자(50대) 주부는 “동작구가 등신인 줄 안다”며 역정을 냈다.
시간 걸리더라도 지역에서 의정활동을여전히 당선 가능성은 낮지만 꾸준히 동작을을 고집한 김종철이 미덥다는 사람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채소가게 앞에서 부채질을 하던 할아버지는 “동네에 왔다 떠나는 사람은 필요 없다. 김종철 후보를 믿어보겠다”고 했다. 한편 진보단일화가 못내 아쉬운 사람들도 있다. 한 50대 남성은 “합당을 해야 유리하지”라며 혀를 끌끌 찼다. 50대 주부도 “노회찬과 김종철 중에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김종철 후보도 야권 성향 유권자들의 복잡한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진보정치의 모범으로 본다면 (출마)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뒤 국회로 가는 게 좋다”며 자신을 향한 지지를 부탁한 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역에서 뿌리를 박고 실력을 쌓아 (국회의원이 되어) 의정활동을 잘하는 게 진보정치의 본령”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선거에서 상도동에 공립 중·고등학교 유치, 사당동 골목상권 살리기, 흑석동 뉴타운 원주민 퇴출 방지 등 김종철표 생활정치 공약을 내놓고 있다.
김 후보는 최근까지 ‘우리모여 청소년센터’에서 일주일에 한 번 지역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강운신(15)군도 그 학생들 중 한 명이다. 국회의원은 “돈 많고 멋대로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운신군에게 ‘김종철도 국회의원이 되면 변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운신군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김종철 선생님은) 수업할 때마다 늘 똑같은 사람이었거든요.” 이번에 낙선해도 동작을을 떠나지 않고 생활정치를 실천하겠다는 김종철의 약속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지원 인턴기자 iddgee@gmail.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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