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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자본주의’ 영영 이해 못하겠소

‘탈북자 성공신화’ 한성무역의 몰락 그 이후… “돈 먹고 돈 먹는 게

자본주의”는 “띄워주더니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게 자본주의”였네
등록 2014-04-17 14:36 수정 2020-05-03 04:27
탈북자 출신 기업인이 세운 한성무역은 탈북자의, 탈북자에 의한, 탈북자를 위한 기업이었다. 지난 4월10일 경기도 파주의 한성무역 정문 앞에서 빈 공장을 지키던 관리인이 사진 촬영을 막고 있다.정용일

탈북자 출신 기업인이 세운 한성무역은 탈북자의, 탈북자에 의한, 탈북자를 위한 기업이었다. 지난 4월10일 경기도 파주의 한성무역 정문 앞에서 빈 공장을 지키던 관리인이 사진 촬영을 막고 있다.정용일

지난 3월 ‘탈북자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조명을 받아온 어느 50대 기업가가 중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불과 얼마 전까지 언론은 탈북자 출신인 그가 연매출 400억원 규모의 무역회사를 일궜다고 상찬했다. 실종 3주, ‘납치’인지 ‘잠적’인지조차 오리무중인 가운데 일각에선 북한 보위부의 도움을 받은 ‘기획 재입북’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무너지는 것은 ‘한성무역’이라는 이름의 회사만이 아니다. 그에게 투자한 탈북 주민 수백 명의 삶 또한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투자자들은 대부분 전세금까지 털어 전 재산을 ‘올인’했다. 그들에겐 남한 사회의 ‘극한 자본주의’를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욕망은 쉽게 체화했지만 ‘리스크’를 가르쳐준 이는 없었다. 리스크를 계산할 만큼 처지가 만만치도 못했다.
한국 내 탈북 주민은 ‘먼저 온 미래’다. 그들의 삶이 통일 이후 한반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리트머스시험지임은 명백하다. 2만6천여 명 수준인 국내 탈북 주민의 삶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 대박’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한성무역 사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생경한 남한식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북 주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되짚는다. 그들의 처지를 고려해 정확한 나이와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_편집자

봄이면 경기도 파주를 찾는 일에 유금희(50대·가명)씨는 설레었다. 찾을 때마다 공장은 제법 체격을 갖추었다. 사무실만 있어 썰렁했던 부지에 공장 건물이 차례로 들어섰다. 함께 대절버스를 타고 온 투자자들에게 회사 직원들은 공손했다. 8년 전 북한을 떠나 남한에 온 뒤, 그처럼 융숭하게 대우받은 일이 그의 기억에 적다.

취업한 탈북여성의 23%가 일용직

‘한성무역’은 직원도, 사장도, 투자자도, 모두 ‘북한 사람’이었다. “정부에선 탈북자 기업이라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탈북자들이 합쳐서 돈을 투자해야 회사를 살리고 탈북자 3천 명을 고용할 수 있다.” 회사의 전망을 들을 때 유씨의 기대는 컸다. ‘회사가 커지기만 하면 우리 아들도 취직시켜주지 않을까?’ 탈북자인 아들을 고용해주는 회사는 대부분 ‘3D 업종’이다. 아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버느라 공장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일하고 있었다. 한성무역만 잘되면 북에서도, 남에서도 지지리 가난했던 가족의 삶을 더는 대물림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남한에서 유씨도 밑바닥 노동을 전전했다. 설거지, 빌딩 청소…. 지긋한 나이에 밑천 없이 남한 생활을 시작한 탈북여성이 할 일이라곤 “육체로 때리는 일”뿐이었다. 국내에 입국한 탈북자 2만6천여 명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이다. 대개의 처지가 유씨와 같다. 취업한 탈북여성의 23%가 일용직으로 일한다. 유씨의 경우 일용직 일자리를 구하는 것마저 나이를 먹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살아갈 방도가 막연할 때 ‘홍보팀 그 여자’가 나타났다.

‘홍보팀 여자’는 하나원(북한 이탈주민들의 사회 정착을 지원하는 통일부 소속기관) 동기였다. 의지할 데 없는 탈북자들에게 하나원 동기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남한에 와서 처음 사귄 동료이자 실향의 설움을 공유하는 벗이다. 같은 해에 비슷한 ‘난민’의 몰골로 남한에 왔던 그 여자가 어느 날 번듯한 차림새로 고급 승용차를 몰고 유씨를 찾아왔다. 밤낮없이 고단한 남한살이에 지친 유씨에게 ‘홍보팀 여자’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들려주었다.

유씨가 가진 돈을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 투자하면 이자를 20% 가까이 쳐준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언니 돈은 내가 책임지겠다. 손해 보는 건 몽땅 보상해주니까 투자하라’고 했다. “한국 사람이 그러면 후라이(거짓말)라 하겠지만 같은 북한 출신이니 믿었지요. 그걸 어째 안 믿겠습니까.”

‘홍보팀 여자’가 다니던 한성무역은 대단한 회사라고 했다. 함경북도 출신의 한아무개(58) 사장은 2003년 회사를 세웠다. 중국 동북 3성 지역에 생활필수품·식품류를 파는 보따리상으로 시작해 자체 생활용품 브랜드를 론칭하는 등 연매출 400억원 규모의 무역회사로 발돋움했다. 유명 언론사들이 “맨주먹서 기업신화를 일군 탈북기업인”으로 소개했다. KBS에도 성공한 기업인으로 소개됐다. 2013년에는 한국무역협회에서 주는 상도 받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유금희씨는 “밤낮으로 고생해 손끝으로 번 돈” 2천만원을 계약서 한 장에 내줬다.

김치만 먹고 살며 이자 모아서 다시 투자

‘홍보팀 여자’는 유씨를 비롯한 투자자들을 자주 방문했다. 투자금을 늘릴 것을 종용했다. 없는 살림에 유씨가 가진 돈은 전세금뿐이었다. “전세를 월세로 돌리고 투자를 하면 월세를 내고도 넘칠 만큼 이자가 나오잖느냐. 나도 전세금을 빼서 투자했다”고 했다. 혹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가슴을 칠 일이다. “그저 돈 있는 냄새만 나면 밤낮으로 찾아왔지요. 어떻게든 꼬여서 돈 챙겨가려고….” 유씨는 전세금을 털어 한성무역에 투자했다.

거래는 나쁘지 않았다. 5천만원 남짓한 돈의 한 달 이자가 50만원씩 빈틈없이 입금됐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사는 아들 내외에게 전셋집이라도 얻어줄 요량으로, 이자를 모아 다시 투자했다. 뼈 빠지게 건물 바닥을 닦는 것보다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비로소 알게 됐다. ‘돈 놓고 돈 먹기라더니, 자본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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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는 며느리가 붓고 있던 적금, 아들의 월급과 동생의 저축까지 모두 그러모았다. “먹고사는 돈도 안 남겼어요. 반찬도 김치 한 가지로 먹고 살며 모았어요.” 온 가족의 피눈물을 짜내 투자금은 4년여 만에 1억5천만원으로 불어났다. ‘한 사장이 중국에서 없어졌다’는 전화 연락을 받던 날 유씨의 집은 ‘왕왕’ 눈물바다가 되었다.

올봄 유씨는 처음으로 대절버스의 도움 없이 한성무역 파주공장을 찾았다. 지난 3월19일 중국 선양으로 출장 갔던 한 사장이 종적을 감췄다. 가족도 온데간데없었다. 유씨와 같은 피해자 100여 명이 회사로 몰려왔다. 전국의 피해자를 추산하면 400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한성무역은 연 20% 안팎의 이자를 보장하고 일반인들로부터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의 돈을 6개월 또는 1년의 약정기간 동안 투자받아왔다. 확인된 피해액만 100억원이 넘는다. 피해자의 99%는 탈북주민이다. 귀환 국군포로 10명이 목숨과 바꾼 돈 22억여원도 포함됐다.

지난 4월2일 이 해당 공장을 찾았을 땐 네댓 명의 투자 피해자들만이 빈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경찰에 한 사장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지만 아직 뾰족한 진전이 없는 상태다. 피해자들은 남한 사회에도 적잖이 실망하고 있었다. “나라가 한아무개를 탈북기업가라고 얼마나 선전을 했어요. 우린 아무것도 모르잖아. 우리는 사회주의 경영을 배웠지, 자본주의 경영을 배운 적이 없잖소.” “그 사람이 회사의 돈을 다 혼자 주무르는데 정부도 탈북자를 보호하지 못한 것이 아니에요? 탈북자들이 다 거리에 나앉아 죽게 생겼는데 통일부나 국회, 누구도 관심 갖지 않잖아요.”

갑갑함은 분노로 쏟아져나왔다. 한 탈북자 지원단체 활동가는 “믿었던 동료 탈북자에게마저 배신을 당한 터여서 탈북자 사회의 상실감은 동료를 향한 동시에 이 상황을 초래한 한국 사회에까지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국내 피해자 155만원, 탈북 피해자 1515만원

한 사장의 실종이 곧 ‘사기’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다. 수사를 맡은 노원경찰서 관계자는 “아직 한 사장의 거취와 관련해 확인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족 전체가 홀연 사라진 것을 감안하면 ‘계획된 탈남’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사건은 남한식 시장경제에 안착하지 못한 탈북주민들이 겪어온 피해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탈북주민들은 ‘사기’에 자주 노출된다.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이 탈북주민들의 범죄 피해 사례 140건을 분석한 자료(2010년)를 보면, 10명 중 6명은 일자리·투자·보이스피싱 등과 관련해 사기 피해를 당했다고 응답했다. 일단 사기범죄 자체가 탈북자들에게 낯설다. 탈북한 지 5년째를 맞은 한 탈북주민은 “북한에선 사기라는 걸 몰랐다. 사기를 치고 도망칠 수가 없고, 사기를 친다고 해도 크게 손에 쥘 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전했다.

‘정착금’이라는 목돈을 손에 쥔 까닭도 크다. 실제 사기·절도 등 재산범죄로 인한 피해금액을 보면 일반적인 국내 피해자들의 평균 피해금액이 155만원 수준인 데 견줘, 탈북주민들의 평균 피해금액은 그 10배에 가까운 1515만원에 이른다. 정착금을 한 방에 쓸어가는 사기범죄가 많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런 것이 자본주의라면 탈북자들은 영영 ‘남한의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탈북자 기업을 향한 ‘투자’가 ‘투기’로 전락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종업원 규모 80여 명의 중견 기업체가 한 사장의 실종과 함께 완전히 가동을 멈췄다. 회사의 재무구조에 대해 분명히 아는 이도 없었다. 투자자를 모았던 ‘홍보팀 여자들’도 자취를 감췄다. 한 사장의 실종이 기정사실화된 뒤 회사는 직원들로부터 권고사직서를 받았다.

직원들은 “일반 투자자들이 물에 빠진 사람의 처지라면, 우리들은 물에 빠졌는데 누가 위에서 머리를 누르는 격”이라고 말한다. 김동철(40대·가명)씨도 2년6개월 가까이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한국에 온 뒤 1년여의 일당 6만원짜리 ‘노가다’ 생활에 지친 김씨에게 알음알음 소개로 찾은 한성무역은 든든한 직장이었다. “우리 (북한) 사람들은 여기 오게 되면 일자리 잡기가 힘들잖아요. 나도 나이가 있다고 안 받아주더라고. 한성무역은 이북 사람들끼리니까 받아주더라고요.”

지난 2년5개월여간 한성무역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회사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주었다. 회사는 직원들에게도 투자를 강권했다. 투자하지 않는 직원에겐 사직을 권했다. 김씨도 월급과 이자를 모아 1억5천만원을 투자했다. ‘탈북자를 위한 기업’이라는 한성무역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1억원 떼이고도 3700만원 캐피털 대출

지금 회사를 그만둔 것보다 더 김씨를 절망케 하는 것은 눈앞에 쌓인 빚이다. 투자금을 날린 것은 “너 좋고 나 좋자고 했던 일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다. 당장 4월부터 이자를 물어야 하는 제2금융권 대출이 있다. 경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 화근이다.

회사는 ‘경영 상황이 어렵다’며 직원들을 불러모아 ‘캐피털 대출’을 지시했다. 직원 11명이 대출을 받기로 했다. 김씨는 회사를 위해 이미 ㄱ은행에서 1500만원의 대출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대출을 받지 않으면 다른 직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해고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지난 3월6일 회사로 찾아온 ㅋ캐피털 직원이 내민 대출 약정서의 내용을 살펴보고서야 불안감이 들었다. 이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3700만원을 대출받으면 월 84만원의 이자가 부과됐다. “배보다 배꼽이 크지 않냐”고 따지니 부사장은 “회사가 이자를 내주니 염려 말라”고만 했다.

이미 1억원이 넘는 돈을 회사에 떼인 처지에 김씨는 그 이자와 원금마저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북 사람들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거든요. 회사에서 다 해준다고 하니 믿었죠. 이 똥이 나한테 돌아온다고는 상상도 못했지.” 제2금융권 대출이 얼마나 위험한지 김씨에게 설명하거나 경고해주는 사람은 남한에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일의 위험성을 상상하긴 어려웠다. 애초에 은행과 제2금융권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누군가 곁에서 말렸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만 같다. 한성무역의 전 직원 허광호(30대·가명)씨는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한 탈북자라면, 그와 같은 투자·대출 강요가 얼마나 비정상적인 일인지 금세 알 수 있다. 내 경우는 남한 출신인 가족이 극구 말려서 투자를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대신 그는 지난해 5년여간 근무했던 한성무역에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후회뿐이다. 남한에서 먹고사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만 않았다면, 김씨는 ‘탈북자 기업’을 찾을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저인들 노가다 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잖아요. 남한 사회에서 노가다 하면 제일 밑바닥 하층민이라면서요.” 김씨가 말했다. 애초에 그는 북한에서 ‘장사’를 했다. 국경 지역에서 물건을 밀수해 타 지역에 팔아 이윤을 남겼다. 다른 북한 주민들에 견줘 어렵지 않게 돈을 만지며 살았다. 북에서도 시장경제를 어느 정도 배웠노라고 자신했다. 한국에 와서도 장사 비슷한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발 탈북하지 말라…”

그러나 남한 땅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도 무한경쟁의 도가니인 이곳에서 아무 사회적 자본이 없는 탈북자는 감히 시장에 진입할 꿈도 꿀 수 없었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시작하면 3년 안에 절반이 망한다고 들었다. 기회와 번영의 땅이라고 상상했던 남한 사회에서, 김씨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어찌 보면 탈북자들이 자신들만의 가냘픈 네크워크 속에서 거래를 트고 신용을 만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 사장은 떠났고 그들은 남았다. 현재를 저당 잡아 미래를 사고자 했던 탈북자들에게 ‘성공한 탈북자’였던 한 사장은 하나의 오아시스였다. 한 사장의 실종과 더불어 그들의 삶도 갈 곳을 잃었다. 한 사장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성공적인 남한 정착’이라는 탈북자들의 꿈은 영영 신기루로 흩어질 것이다. 그들의 욕망과 절망은 엄연하다. 그 절망과 욕망을 제대로 응시하지 않은 채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는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북한 사회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죽이지만 남한 사회는 경제적으로 죽여요. 그런데 겪어보니깐 경제적으로 죽이는 게 더 힘들어요. 길이 안 보이거든요. 이제라도 나는 강원도에 가서 대북방송이라도 하고 싶어요. 제발 탈북하지 말라고….” 탈북자 김동철씨가 꼭 그대로 옮겨달라며 남긴 마지막 말이다.

파주=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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