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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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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노역’ 판결, 향판의 잘못일까

법조일원화 일환으로 시작된 지역법관 향판 제도 사실상 폐지
평생법관제·로스쿨제도 등 다른 개혁 작업들도 흔들릴 우려
등록 2014-04-09 11:5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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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50대 판사를 만났다. 1심 민사 재판부에서만 20년 넘게 일해온 그는 정년까지 민사부 판사를 할 작정이라고 했다. 한국의 법관은 2년마다 민·형사부, 행정·특허법원을 오가며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하자 그는 깜짝 놀랐다. “한 판사가 어떻게 모든 법률에, 모든 지역에 다 능통할 수 있느냐?” 전문성이 부족한 채로 재판한다는 사실을 차마 고백하지 못했다. 대신 나는 되물었다. “왜 변호사로 개업하지 않느냐?” 답변은 명쾌했다. “경력이 많은 변호사들과 경쟁해서 내가 이길 수 없으니까.” ‘전관예우’가 없는 나라에서는 당연한 얘기다.

“한 판사가 어떻게 모든 법률·지역에 능통하나”

우리나라에서는 해마다 2월 전체 판사의 절반에 가까운 1천 명이 자리를 옮긴다. 판사의 80% 이상이 수도권 근무를 희망하는 탓이다. 이렇게 판사 인사를 자주 실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다.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첫째 법원의 관료화다. 판사의 전보와 승진 권한이 중앙에 집중돼 판사가 소신 있게 재판을 하지 못한다. 둘째, 판사의 중도 사직으로 전관예우 시비가 생긴다.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지 못한 많은 판사가 한꺼번에 옷을 벗는다. 이들이 변호사로 개업하면 동료 판사들이 배려한다는 전관예우 의혹이 싹튼다. 일부 전관 변호사와 법조 브로커가 이를 악용하기도 한다. 셋째, 재판이 지연·부실화된다. 복잡한 사건의 선고를 미루고 다른 데로 옮기면 후임 판사가 다시 재판 기록을 처음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사건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그래서 떠오른 대안이 ‘법조일원화’다. 일정한 경력을 갖춘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는 방식이다. 사회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사법고시를 통과해 20대에 판사로 임용되는 시대가 저물었다. 대신 실력 있는 40~50대 변호사를 판사로 데려오려면 ‘당근’이 필요하다. 장기간 전보 없이 특정 분야에서 재판을 담당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게 대표적이다. 2~3년 단위로 전국을 옮겨다니는 현재의 인사 시스템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2004년 대법원은 법조일원화의 중간 단계로 ‘지역법관’(향판)을 제도화했다. 향판은 오래전부터 관행적으로 존재했지만 이때 공식 인사 시스템으로 정착했다. 지역법관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다른 지역으로의 전보 없이 해당 지역 법원에서 최소 10년 이상 근무할 수 있다. 수도권을 제외한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4개 고등법원 관할 내에서 이뤄졌다. 현재 지역법관은 법관의 13%인 30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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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지역법관제도를 내년에 사실상 폐지하려고 한다. 박병대(57) 대법원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지난 4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2004년 도입된 지역법관제도를 폐지하더라도 전체 인사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역법관이 토호세력과의 유착 논란에 잇따라 휩싸이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은 탓이다.

서울 판사도 이건희 노역 일당 1억원대 산정

논란의 중심에 선 ‘황제노역’ 판결을 보자. 광주고법 형사1부(재판장 장병우)는 2010년 1월 허재호(72)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 벌금 254억원을 선고했다. 노역 대가는 일당 5억원으로 정했다. 통상 5만원으로 계산하는 일반인의 1만 배다. 비판은 항소심을 맡은 장병우(60) 광주지법원장에게 쏟아졌다. 그는 광주·전남 지역에서만 29년을 근무한 전향적인 향판이다. 대주그룹 역시 광주에 기반을 둔 업체다. 게다가 허 전 회장의 아버지 허진명씨는 이 지역에서 37년간 판사로 일했다. 허 전 회장을 변론했던 두 변호사도 광주지법원장을 지낸 향판이다. 토호세력과 향판 선후배가 얽히고설킨 셈이다. 장 법원장은 사직서를 냈고 대법원은 이를 수리했다.

향판 논란은 끊이지 않아왔다. 2011년 선재성(52) 당시 광주지법 파산부 수석부장판사는 부적절한 법정관리인 선임 파문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파산 업무를 전담하면서 친형과 고교 동문, 심지어 전 운전기사 등 측근을 법정관리 기업의 관리인이나 감사로 앉혔다. 이후 법정관리 기업의 사건 대리인으로 고교 동창인 강아무개(53) 변호사를 선임하도록 한 혐의로 기소돼 벌금 300만원을 확정받았다. 선 판사는 19년을 광주·전남 지역에서 보냈다. 2009년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부산고법의 박아무개 부장판사를 소환 조사했다. 박 판사는 부산·경남 지역에서만 20년 이상 근무했고 박 전 회장의 기내 난동 사건 당시 1심 담당 판사를 다른 판사로 바꿔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샀다.

대법원은 결국 지역법관의 신규 채용을 중단하고 현재 있는 지역법관의 수를 줄여가는 ‘단계적 폐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2004년 지역법관을 제도화하면서 10년간 해당 지역에서 근무하도록 허가해 올해 임기가 만료되는 지역법관이 155명이나 된다. 그러면 내년부터 이들은 순환근무를 해야 한다. 대법원은 한 지역에서 근무 기간이 5~6년이 넘는 70~80명도 의무적으로 다른 권역으로 보내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박병대 법원행정처장은 “제도 개선을 올해 상반기에 확정지은 뒤 2015년 인사 때부터 적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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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다른 사법 개혁 정책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역법관제도는 법조일원화 과정에서 중간 단계로 도입됐고, 현재 시행 중인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평생법관제 등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단장을 맡았던 김선수 변호사는 “경력이 있는 법관을 임용하는 법조일원화가 되면, 법관의 뜻에 반하는 인사가 불가능하다. 전체 법관의 절반 이상을 해마다 정기 인사하는 시스템으로는 법관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보장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번 논란을 지역법관의 문제로 축소하거나 덮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서울 판사들이 재벌 총수들(삼성 이건희, SK 손길승, ‘선박왕’ 권혁 )의 노역 일당을 1억원, 3억원으로 산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법관이든 서울 법관이든 잘못된 판결이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법원 내·외부에서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해 엄정한 감찰과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박인환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4월3일 ‘황제노역 판결을 통해 본 법조윤리 강화 방안’ 토론회에서 “2009년부터 5년 동안 법관 징계는 7건뿐이었다”며 “윤리 위반에 대한 판검사의 징계를 강화하라”고 제안했다. 광주 지역의 한 변호사는 외부의 감시 시스템을 강조했다. “지역사회 지도층의 카르텔(담합)에 언론도 동참한다는 게 큰 문제다. 광주 지역 신문은 모기업이 건설회사인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도 대주그룹 계열사 아닌가.” 황제노역 판결이 나왔던 2010년에 지역 여론이 잠잠했던 배경이다.

지역·서울 법관 가리지 않고 엄정한 감찰 필요

국회입법조사처 서창식 입법조사관은 최근 펴낸 ‘지역법관제도 쟁점 평가 및 과제’ 보고서에서 변호사의 역할에 주목했다. “미국에선 재판이 끝나면 사건 당사자와 변호사에게 법원이 만족도를 설문조사해 이를 참고자료로 삼는다. 일본과 대만에서도 변호사가 법관을 평가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우리나라의 일부 지방변호사회에서 운영하는 법관평가지표를 보완해 대법원이 근무평정에 활용하도록 하자.”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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